✠ 요한복음 20,19-23
오늘 대축일 전야 1독서(창세11,1-9)에서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분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에 반해 대축일 독서(사도2,1-11)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게 되는 사건을 들려줍니다.
마치 지난 주간동안 들었던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기도(요한17)가 실현되는 시작을 알리는 듯합니다.
사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요?
이 하나됨의 시작은 상대방의 말을 듣는 일입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때 서로 듣지 않고 있습니다. 설혹 듣는다하더라도 반박하기 위해 들을 뿐입니다.
우리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끼리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과연 하느님의 언어, 그분의 음성은 알아들을까요?
내 생각, 내 원함만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때 우리의 삶은 바뀝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외우고 있을만큼 익숙한 말씀이 새롭게 들리고, 마음을 불붙게 하고 매혹시키며, 지금 나의 깊은 바램, 아픔, 의혹들에 답해 주는 말씀으로 다가와
우리 삶을 흔들어 놓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에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엠마오의 제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타오르는 마음, 곧 성령의 불꽃이 우리에게 내리면 죽은 활자가 생명을 얻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우리 안에 탄생케 하고
성장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오셔서 평화와 용서를 주십니다.(요한20,19-23)
이 평화와 용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으로 주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이 평화와 용서가 우리를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성령님, 제 안에 말씀이 주는 참평화가 임하게 하소서."
"성령님, 제가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듣게 하소서. 그리하여 용서로 하나되는 길을 걷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