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5강의: 20-21장
<들어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행전이 전하듯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이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사도 1,3.6-11)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제자들에게 성령도 주시고(20,22), 승천도 하신다.(20,17) 나아가 승천도 사도행전과 달리 모든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지지 않는다. 요한은 왜 이렇게 다르게 서술했을까? 요한의 신학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을 보내심을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연결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주간 첫날(20,1): 안식일 다음날. 이날은 일요일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날’ 또는 ‘주님께 속한 날’이다.
*이른 아침(20,1):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시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안식일 때문에 삼일 동안 주님의 무덤에 갈 수 없다가 안식일이 끝난 다음 급하게 새벽에 무덤을 찾는다. 공관복음에서는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서 찾았지만(마르 16,1; 루카 24,1)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니코데모가 향료를 발라드렸기 때문에 순전히 주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찾은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였다.
*아직 어두울 때에: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에 있었음을 상징.
*마리아 막달레나: 요한복음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다.(19,25;20.1.11.18) 그녀는 베타니아의 마리아도 아니고, 죄 많은 여인(루카 7,36-50)도 아니다. 루카 복음은 그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8,2)이라고 소개한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신적 수동형 동사를 써서 초자연적 힘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무덤의 입구 돌은 여러 명의 남자가 힘을 합쳐야 겨우 열 수 있는 큰 돌이다. 굳이 돌을 치우지 않고도 부활하셔서 무덤 밖으로 나가실수도 있었지만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려고 그리하신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그들은 유다 지도자들을 말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들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주어 장례를 치루게 해 준 것을 바로 잡고자 몰래 시신을 꺼내서 사형수들의 시신이 썩어가고 있는 웅덩이에 버리거나 다른 곳에 치워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막달레나는 시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부활을 암시.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달레나는 혼자 무덤에 가지 않았다. ‘우리’라는 주어가 생략되었음. 공관복음에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무덤에 갔다.(마태 28,1; 마르 16,1; 루카 24,10) 요한의 ‘두 사람 간의 대화 기법’에 따라 막달레나가 혼자 간 것처럼 묘사된다.
*무덤에 다다른 두 제자(20,3-5): 애제자가 더 빨리 무덤에 도착한 것은 그가 베드로보다 젊고 건강해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애제자의 영적 탁월성을 상징한다. 애제자는 베드로와 달리 빈무덤 안의 아마포와 수건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베드로의 수위권을 존중하여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주님 부활의 표징, 아마포와 수건: 공관복음에 따르면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몰래 와서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다 놓고 부활을 주장한다고 비난했다.(마태 28,13) 이들의 비난이 맞다면 아마포 수의가 무덤 안에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날 시신에 많은 양의 몰약을 발랐기에 몰약의 달라붙는 성질 때문에 수의를 벗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서둘러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굳이 수의를 벗겨서 옮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과 아마포 수의는 잘 개켜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잘 정돈되어 있다(엔튈리소)’는 신적 수동형으로 쓰인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마포와 수건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하신 주님 부활의 강력한 표징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마포와 수건을 두고 무덤 밖으로 나오셨는데 그렇다면 알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일까? 성경에서는 부활 후 복장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영적인 몸이시기에 옷이 필요 없을실까?)
*그리고 보고 믿었다(20,8): 무덤에 도착한 애제자는 힐끗 보았다.(블레포) 그 다음 도착한 베드로가 아마포와 수건을 육안으로 보았다.(테오레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제자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보았다.(호라오; 직관이나 통찰력으로 보다) 신앙의 눈으로 부활의 표징을 본 요한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20,9-10): 요한은 빈 무덤의 표징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지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성경의 성취임을 깨닫지 못하였다.(진리의 영 파견 예고 14,26; 16,13)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애제자는 부활을 믿었기에 더 이상 주님의 시신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반면 부활을 깨닫지 못한 베드로가 주님의 시신을 찾지 않은 이유는 유다 지도자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20,19)
*부활의 강력한 표징, 두 천사가 앉아있던 자리(20,13): 마리아 막달레나는 슬픔에 잠겨 천사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천사들이 앉아있던 위치를 보고도 부활의 표징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의도적으로 묻는다. 울음을 그치고 주님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여라는 뜻.
*서계신 것을 보았다.(20,14): ‘나타나셨다’가 아니라 ‘서계셨다’고 한 이유는 환상이나 환각 또는 비현실적인 만남이 아니라,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만났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20,15): 동산지기로 착각한 이유는 “다른 모습으로”(마르 16,12)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 육신은 영광을 입은 다른 차원의 몸이다.(1코린 15,43)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37)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예수님을 그저 나그네로만 생각했다.(루카 24,16)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무엇을 찾느냐?”(1,38) 신앙생활의 필요성 추구 “누구를 찾느냐?” 신앙의 성숙 단계 곧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선.
*주님을 찾는 막달레나(20,15): 아가서 3,1-3에 나오는 신부와 같다. 아가서의 신랑은 하느님이고, 신부는 그분의 백성이다. 따라서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찾는 모든 신앙인들의 사랑을 대변한다.
*돌아서서: 남녀가 유별했던 유다 문화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들과 대화를 하다가 고개를 돌려 예수님을 뒤돌아보고 주님을 어디에다 모셨는지 물어본 다음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제서야 몸을 돌려서 예수님을 정면으로 바라본 것이다. 두 번째 돌아섬은 영적으로 돌아섬을 상징한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비통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섬을 의미한다.
*마리암!(아람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 소리를 듣고 그렇게 자신을 불러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다음 부활 후 첫 번째로 당신의 소중한 양인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라뿌니!: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 제자가 스승에 대해 특별한 애정과 친밀함과 존경을 가득 담아 부를 때 호칭이다. 최고의 신앙고백. 라뿌니!하고 외쳤을 때 이미 그녀의 눈에서는 조금 전까지 흐르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른 눈물, 환희와 기쁨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20,17):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꽉 붙잡는다. 공관복음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발을 잡았다고 한다.(마태 28,9)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전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지상적 현존으로 언제나 함께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곧 그녀 안에 머무실 성령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내 형제들: 수난 전에는 친구들, 부활 후에는 형제들. 그리스도는 맏형.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들이다. 그리고 주님의 형제가 되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본성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고(1,14; 3,16),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이들이다.(1,12)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직역 ‘위로 간다.’, 승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신 후 성령을 통해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것을 전제한 표현.
*사도들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20,18):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고 신앙을 고백한 첫 제자의 영예. 그녀는 십자가 밑에서부터 시신을 매장할 때까지 수난 내내 주님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의 수난 동안 예수님과 일치해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정 먼저 뵙는 영예를 입었던 것이다.
*사도들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20,19-23)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 안식일 다음 날이니 주일로 넘어가는 시간이다. 특전미사!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원래 그리스어 본문은 ‘문들’(튀라이) 복수이다. 사도들은 유다 지도자들에게 붙잡힐까 봐 두려워 문이란 문은 모두 잠가놓고 있었다. 사도들은 갈릴래아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다락방에 있었던 것은 아직 파스카 축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례자들은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 분.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하심. 그리고 인사를 함께 상처를 보여주셨다는 것은 예언(즈카 12,10)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알려주는 행위이다. 당신이 십자가 죽음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인류가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평화는 갈등이나 다툼이 사라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안녕, 질서와 조화가 있는 상태,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폭풍우 속의 평화’(마태 8,23-27)는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이다.(필리 4,7)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 공생활 중에 예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같은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 또 십자가 죽음에서 승리하심이 복음선포의 핵심임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보다 동사는 ‘호라오’, 즉 영적인 직관으로 주님을 알아 았다라는 말이다. ‘기뻐하였다’의 그리스 말은 에카레산, 즉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말한다.
*두 번 째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어서 파견 사명이 주어진다. 복음 선포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평화를 간직해야 한다.
*숨을 불어넣으며: 이 표현은 창세기의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숨은 ‘프네오마’, 즉 성령을 가리킨다.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심(20,23): 고해성사를 가리킴. “너희가 사람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면 그 순간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일주일에 한 번 고해성사 볼 것을 권고한다. 깨끗하게 청소한 방도 일주일이 지나면 먼지가 쌓이듯 세속의 때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20,24-29)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을 직접 뵙지 못한 공동체 신자들을 위해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했다. 토마스라는 말 자체가 쌍둥이라는 뜻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모른다. 별칭으로 불리는 그의 이름은 어쩌면 토마스와 똑같이 의심하는 쌍둥이인 우리를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마스의 의심은 불신이 아니다. 또한 실증주의적 신앙도 아니다. 결국 토마스는 본인만을 위해서 다시 나타나신 주님을 뵙고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아도나이 야훼)하고 최상의 신앙고백을 한다. 토마스의 의심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신앙의 신비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의심보다 더 나쁜 것은 무관심이다.
<부활에 대한 부정 논리>
①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에 옮겨놓고는 그분이 부활했다며 거짓말을 한다. -초대교회 시절 유다인들의 사고.
②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베드로의 주관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환시를 보고 믿고 외치게 되었다.-현대 성서학자 뤼데만
③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환시를 보았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마음속에 죽은 예수님이 영원히 살게 되었다. -19세기 성서학자 르낭
<부활 사건이 환시가 아니라는 근거>
①오백 명이 넘는 신자들이 한꺼번에 환시를 볼 수 없다.(1코린 15,3-8) 바오로는 예수님의 부활 발현을 목격한 오백 명의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증언하였다.
②만일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거나 제자들의 환상에 불과하다면 배신자 사도들이 어떻게 180도로 변화되어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며 순교까지 감당했겠는가?
③게다가 공생활 내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바오로의 회심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들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 전향적으로 복음 선포자,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모두 순교하신다.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했던 그들이 목숨을 걸 만큼 심적 변화가 일어날 계기는 부활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1,29): 1세기 요한 공동체 신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도 전하는 메시지. (1베드 1,8-9; 히브 11,1; 2코린 4,18). 원래 요한 복음서는 20장으로 끝난다. 21장은 편집자가 추가한 에필로그이다. 따라서 복음서 마지막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자’의 행복선언으로 끝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직접 주님을 뵙지 못하지만 사도들의 전해준 신앙을 받아들여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다. ‘행복하다’의 그리스어는 ‘마카리오스’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말을 happy가 아니라 blessed로 번역한다. Happy는 ‘우연히 발생하다’ happen에서 유래한 것이고, blessed는 주님이 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blessing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행복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모님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시다.(루카 1,42) 성모님은 눈에 보이는 표징과 기적을 아니라 말씀을 믿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 되신다.
*다른 많은 표징: 일곱 표징만으로도 충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 믿고, 또 믿어서. 요한복음은 ‘믿음’이란 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믿다’라는 동사만 98번 사용한다. 믿음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성장하는 역동적인 속성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 성장, 태생 소경의 믿음 성장.
*21장 에필로그: 후대 편집자의 작품. 원저자 사도요한, 실제 저자 사도 요한의 수제자, 21장과 로고스 찬가는 편집자가 기록한 것이다.
*에필로그가 추가된 이유: 요한복음이 완성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애제자 세상을 떠났다. 요한 공동체 신자들은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워했다. 주님 재림 때까지 살아있으면서 공동체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죽었는데 어찌 그렇지 않으랴. 게다가 순교의 영광을 입지 않은 요한을 폄하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편집자는 애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고(21,22), 애제자가 베드로처럼 순교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것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고귀한 목격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받은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해명해야 했기 때문이다.(21,20-24) 그리고 베드로의 수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수위권 복원 과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승천 후 재림이 아직 오지 않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초대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뜻을 말씀하시고(21,6),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친교의 식사를 함께 나누고(21,12-13), 수제자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도록 명하심으로써(21,15-19) 당신이 초대교회는 물론이요, 후대 교회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고 돌보아 주실 것임을 전한다.
*에필로그 편집자는 프롤로그(1,1-18), 일명 로고스 찬가의 저자이기도 하다. 프롤로그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있었던 역사를, 에필로그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오르신 다음에 펼쳐지는 교회의 시대와 주님 재림 때까지를 묘사한다. 로고스 찬가는 본문에서 다뤄지는 주제(생명, 빛, 어둠, 외아들, 영광, 은총, 진리, 계시, 거부와 영접, 하느님의 자녀됨 등)를 집약한 깊이 있는 작품이다. 편집자는 탁월한 영성가, 신학자이다.
*테베리아스 호숫가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21,1-14)
*갈릴래아 호수, 티베리아스 호수. 6장의 티베리아스 호수와 연결하여 성체성사를 상기시킨다. 여전히 주님은 성체성사를 통해 초대교회 신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돌보아 주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고기를 잡으러 간 이유는 주님이 하신 약속 때문에(마태 26,32;마르 14,28 갈릴래아로 먼저 가겠다.)
*이렇게 드러내셨다: 파네로오(감춰져 있던 것을 계시하다. 그동안 모호했던 것을 확실히 보여주다) 동사 사용.
*물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 완전수 7. 즉 교회를 상징. 어부가 아닌 나타나엘의 신앙고백(1,49), 토마스의 신앙고백(20,28) 요한복음 처음과 끝에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두 제자를 포함시킨 것은 1세기 말 보편교회가 예수님께 드려야 할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 세 번에 걸쳐 베드로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가 상황을 주도한다.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밤이 되면 수면 위로 물고기가 올라온다. 그러나 밤은 빛이신 예수님과 분리되어 혼동과 어둠 속에 있던 베드로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는 배반으로 인한 죄책감, 유다인들에 대한 두려움,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아둔함 등.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이 나타나신 시간은 진리와 질서와 생명의 세계를 상징하는 빛의 시간.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모든 복음서 일관된 내용. 그분의 육신이 영광을 입었기 때문에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애들아: 이 호칭은 한 사람의 배반으로 당신이 죽을 것이라고 하자 제자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13,33),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탈해하며 낙심하고 있을 때(21,5) 등장한다. 삶의 무력감과 방향을 잃고 어찌할 줄 모르는 제자들을 보며 윗사람으로서 측은하게 부르는 것.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 오른쪽은 신적 영역인 구원의 세계를 상징.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인생의 그물을 어느 쪽으로 던질지를 알려주신다.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다보면 마음은 평정을 찾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되어 복음 선교 사명을 수행하면서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것임을 상징한다.
*주님이십니다: 저기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애제자가 배 안에 있는 동료들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외친 이유는 베드로의 수위권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겉옷을 두른 베드로: 웃통을 벗고 일하다가 베드로는 예의를 갖춘다.
*숯불이 있고: ‘안트라키아’는 신약성경에 딱 두 번 나옴. 베드로가 배신할 때, 그리고 베드로를 용서하시며 교회를 맡기는 장면에서.
*작은 생선 한 마리, 빵도 있었다: 옵사리온. 6장의 오병이어 기적 상기. 즉 성체성사를 가리킴.
*큰 물고기 153마리: 1에서 17까지 합한 숫자. 17은 10+7. 10은 십계명, 7은 일곱 은사. 따라서 153은 율법과 성령의 은사를 받아 교회 안에서 들어올 모든 신자를 상징.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끌어 올렸다’의 뜻인 그리스어 ‘헬코’는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때 사용되는 단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6,44),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12,32)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교회 선교의 수확이 클 것이고, 그 양이 엄청나더라도 교회가 수용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의미.
*호숫가에서의 아침 식사: 6장 성체성사 연상. 보리빵과 작은 생선. 식탁에 둘러싸인 일곱 제자는 교회를 상징,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하시며 교회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고 계신다.
*베드로의 지위 복원과 미래 운명(21,15-19)
베드로에게만 따로 나타나신 주님(1코린 15,3-5;루카 24,33-34)을 통해 베드로가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은유적으로 알 수 있다.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베드로의 지위 복원이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친교의 식사에서 이뤄졌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제자로 부르실 때 처음 하신 호칭. 그러나 이후로 케파, 베드로로 부르심.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수제자에서 강등당한 것 같은 충격과 지난날 잘못에 대한 큰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가파오와 필레오: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 필레오는 친구들과의 우정.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아가파오)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오)?”(21,15)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오)”(21,16)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21,17)
베드로는 이 세 번의 질문에 다 필레오라고 대답한다. 자기 같은 죄인이 감히 신적 차원의 사랑을 드릴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께서 필레오를 쓰자 슬퍼하며 겨우 필레오한다고 말한다.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셔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가파오를 할 수 없는 베드로를 질책하시는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21,15)
그리스어 성경에 따르면 첫 번째 명령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두 번째 명령 “내 양들을 다스려라.”, 세 번째 명령 “내 양들을 먹여라.” 먼저 어린 양들은 새 신자들과 공동체 내에서 가장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다. 새 신자들에게는 지속적인 재교육이 필요하고, 공동체 내 작은 이들은 섬세한 사랑의 돌봄이 필요하다. ‘다스려라’(포이마이노) 성경에서 목자들이 양들을 돌보고 지키고 다스리는 모든 행위를 말함. 요한복음 10장 착한 목자 편 참조. 목자의 막대기와 지팡이(시편 23,4) 막대기는 들짐승이나 적을 상대로 양을 지킬 때. 지팡이는 양떼에서 방향을 제시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면 옆구리를 툭툭 쳐서 제 갈 길로 인도할 때. 그리고 양이 어디에 빠지거나 바위 틈새에 끼었을 때 고리로 낚아채어 끌어 올린다. 세 번째 ‘내 양들을 먹여라.’ 목자는 어린 양들은 물론, 성장한 양들도 잘 먹여야 한다.(1베드 5,2-4) 기도와 말씀 봉사를 통해 기성 신자들에게 영적 음식을 먹이는 사도들(사도 6장)
*두 팔을 벌리면: 결박당해 끌려가서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의미.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제자로 임명할 때 쓰는 표현. 이 말씀으로 다시 수제자 베드로의 지위(수위권)를 복원시켜줌.
*애제자 요한의 사명과 미래 운명(21,20-24)
*내가 올 때까지: 세상 종말에 이뤄질 재림을 말함.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직역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러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당시 요한 공동체는 애제자는 베드로처럼 순교하지 않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요한은 죽고 재림은 오지 않았다. 사실 신자들이 애제자는 죽지 않고 주님 재림을 맞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만일’(ἐάν 에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편집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애제자가 주님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밝힌다. 당시 신자들은 ‘만일’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흘려들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편집자는 지적하고 있다. 한편 애제자가 순교하지 못한 것은 주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애제자에게 순교가 아니라 증언의 사명을 주셨다. 위의 예수님 말씀에서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라는 말에는 모든 신자와 애제자의 사명이 들어가 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각자의 인생 여정에서 주님의 참된 제자로서 그분 안에 항구히 머물러 있어야 한다. 머무르다(메네인)은 요한복음과 요한 서간에서 66번 나온다. 이는 주님 안에, 주님 말씀 안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제자 직분을 가리킨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말은 베드로와 애제자가 각기 받은 사명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순교 vs 증언, 교회 조직 운영 vs 영성 강화, 주님께 부여받은 달란트가 다를 뿐이다.
<요한복음의 형성 과정>
▶1단계: 40-60년경으로, 사도 요한이 직접 전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전승 자료들이 요한 공동체 안에 구전으로 전달되던 단계이다.
▶2단계: 전승 자료들이 발전되는 단계이다. 사도 요한과 그가 양성했던 제자, 나중에 요한복음을 실제로 기록한 사람에 의해 예수님에 대한 전승 자료들이 신학적, 영적으로 깊이 성찰되었고, 그 결과물을 요한 공동체 구성원들을 가르친 단계다.
▶3단계: 요한복음 제1판이 나온 단계다. 90년경으로 본다.
▶4단계: 요한복음 제2판이 나온 단계다. 요한 공동체 안에 발생한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수정보완판을 만든다. 고별사 2(유다교 회당 추방 배경)와 고별사 3(로마의 박해 임박한 배경) 추가.
▶5단계: 마지막 단계로서 100년경 실제 저자가 아닌 편집자가 사도 요한이 100년경에 죽자 신자들이 크게 실망하고 혼란을 겪기에 사도 요한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에필로그를 첨부했다. 그리고 이어서 프롤로그(1,1-18), 곧 로고스 찬가를 첨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