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복음 제4강의: 13-19

*들어가면서

성서학자들은 최후만찬에서 하신 주님의 행동과 마지막 말씀에는 요한복음서의 신학적 핵심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 새 계명, 천국 본향, 주님의 평화, 파라클리토 성령님과 공동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청원기도 등. 13장부터 14장까지는 세족례와 첫 번째 고별사이다. 15장부터 17장까지는 두 번 째 고별사와 세 번째 고별사 그리고 예수님의 고별기도로서 구성되어 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며 용기와 희망을 약속하신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 13,1-30

*13,1: 여기서 끝까지는 그리스어 성경에서 에이스 텔로스 ες τλος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끝까지의 의미 말고도 더욱 극진히란 의미도 갖고 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더욱 극진히로 번역하고 있다.

*13,2-5: 세족례가 정확이 만찬 중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만찬이 끝난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준 다음 빵 한 조각을 적혀 유다에게 주신 것이다.(13,26) 당대 유다 관습에 따르면 손님이 도착하면 입구에서 즉시 하인이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다. 샌들을 신고 다니면 먼지, 진흙, 짐승 똥이 묻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손님이 도착하면 하인들은 발을 씻어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사전에 하인들을 물리고 의도적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발을 씻어준다는 것과 노예란 말은 동의어였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는 것은 당시 명예를 중시했던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13,3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금 아버지께 돌아갈 때가 되었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파견되는 이유는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준 행위는 곧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을 상징한다.

*13,6-9: 13,7의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가 단순히 봉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만약 발 씻김이 단순히 봉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베드로가 지금 그 씻김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13,8은 상속과 관련된 단어다. (민수 18,20; 신명 12,12; 묵시 20,6)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베드로는 구원의 상속을 받을 수 없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발 씻음을 통해서 베드로가 받게 될 몫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그들의 죄와 인류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려주시고자 상징적으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을 수 없다면, 베드로의 죄는 씻김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 결과적으로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한편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내용이 없다. 대신에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를 보면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성체성사를 제정하는 이야기는 없는 대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발 씻김의 행동은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다른 식의 표현이라고 본다. 요한복음서에서 세족례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씻어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13,9: 발과 손, 그리고 머리까지 씻어달라는 것은 온몸을 씻어 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극구 세족례를 사양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듣자 돌변하여 성급히 청하는 모습이다. 양극단의 태도는 다 예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 고집하는 베드로의 자아를 보여준다.

*13,10: 예수님께서 발은 더러워질 때마다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발 씻김의 의미가 처음에는 구원을 가리키다가, 지금은 구원받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마다 용서받는 차원의 의미로 바뀌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발만 씻으면 된다는 후대의 필사가들이 삽입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가장 중요시되던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곧 목욕을 한다는 것을 세례성사로 해석하면서, ‘발만 씻으면 된다는 문장을 첨가하여 고해성사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13,14-15: 세족례는 십자가 죽음의 속죄 의미도 있지만 섬김에 대한 가르침도 포함되어 있다. 주님의 속죄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과 봉사를 하도록 요구한다. 그것도 주님이 하신 것처럼. 14절에는 오페일로 φελω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동사가 들어가 있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예수님을 주님이요 스승으로 고백하는 신자라면 필연적으로 실천해야 할 행동양식이다. 봉사는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봉사가 모름지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하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13,16-17: 이것들은(복수) 발만 씻기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섬기고 돌보아주는 일체의 행위들을 뜻한다. 또 행복은 실천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오지 않는다.

*파스카 전날에 최후의 만찬을 한 이유: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의 시기를 파스카 전날로 보고 있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하루가 앞 당겨진 이유는 예수님을 파스카 어린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파스카 당일 돌아가신다. 파스카 당일 낮 12시는 파스카 예절에서 먹을 양들이 도살되는 시간이다. 같은 시간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의해 사형언도를 받는다. 그리고 양의 몸속에 있는 피를 완전히 빼기 위해 저녁 6시까지 거꾸로 매달아 놓는데, 예수님도 낮 12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저녁 6시 무렵(안식일이 시작될 무렵, 루카 23,54)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다.(마태 27,57) 요한복음서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파스카 음식을 드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파스카 어린양으로서 돌아가신 것이다.

*13,18: 예수님은 네 차례에 걸쳐 유다의 배신을 암시하신다.(13,10; 13,18, 13,21.26) 예수님은 유다의 회심을 간절히 바라셨다. 물론 예수님은 유다가 아니더라도 결국 유다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을 것이다. 이미 예수님에게 지명수배가 내려 졌기에 죽음은 시간 문제였다. 근동 문화에서 제 빵을 먹던 그는 아주 가까운 친구를 의미하고, ‘발꿈치를 치켜들며는 상대를 향한 모욕과 경멸의 제스처를 의미한다. 그런데 시편 41,10의 이 말씀을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 유다가 선택된 도구라고 봐서는 안 된다. 이른바 운명론은 잔인한 하느님을 만들어 버린다. 유다의 배반은 그의 자유로운 결단이었다. 예수님이 시편을 들어 말씀하신 것은 유다의 배반이 우정에 대한 배반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측근이자 친구였던 아히토펠이 자신을 배신하자 비통해하며 읊은 것이다. 아히토펠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그만 압살롬편에 붙어버렸다.

*13,21-22: ‘산란해하다동사 타라소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11,33), 당신에게 닥쳐올 죽음을 예고하시면서(12,27), 그리고 유다의 배반으로 이뤄질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시면서 사용된다.

*13,23-30: 성미 급한 베드로는 애제자에게 고갯짓을 하면서 도대체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런데 주님의 가슴에 기댄 애제자와 마찬가지로 유다는 예수님 왼편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예수님이 빵조각을 유다에게 주려면 유다가 당신 왼편에 비스듬히 앉아있을 때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애제자와 유다는 둘 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을 팔아넘길 배반자에게 의도적으로 영광스런 자리를 허락하셨을 것이다. 빨리 회개하라고.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하신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사랑받는 제자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유다가 밖으로 나갈 때 어떤 제자도 유다를 제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소스를 찍어 빵조각을 주자, 스승께서 그를 환대하는 의미로 그렇게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애제자는 배신자를 알고도 가만히 있었을까? 답을 얘기한다면 애제자조차도 유다가 실제로 배신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만일 애제자가 의심했다면 분명히 28절에 사랑받는 제자를 제외하고는이란 문장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의 명을 받아 파스카 음식을 사러 갔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애긍을 베풀러 나갔다고 생각했다. 사실 유다는 세리장 출신 마태오를 재치고 경리 담당을 맡을 만큼 예수님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사탄이 유다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는 말이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빵 한 조각을 받을 때 처음으로 사탄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유다는 향유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스승을 팔아넘길 결심을 굳힌다. 사탄이 한 영혼을 완전히 소유해 버리는 과정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 완전히 장악해 버린다.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떨어져 나간 시간은 밤이었다. 밤은 빛이신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나 반대 세력을 상징하거나, 예수님으로부터 단절된 암흑 상태를 상징한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시간도 밤이요, 제자들이 풍랑 중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헤매던 시간도 밤이다. 유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빛이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2. 첫 번째 고별사: 13,31-14,31

*들어가면서

고별사는 요한복음서만의 독톡한 내용이다. 고별사에 나오는 내용들 다수는 예수님이 사셨던 30년대의 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요한공동체 구성원들이 살아가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 시대 상황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크게 세 번 바뀌었고, 고별사도 세 번에 걸쳐 작성된다.

첫 번째 고별사(13,31-14,31): 이는 예수님의 재림 지연과 관련이 있다. 곧 재림하실 것이라 믿고 있던 공동체는 이것이 지연되자 혼란을 겪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한 약속들을 하셨음을 밝힌다. 그 약속들이란 예수님이 제자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돌아오시는데,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을 주셨는데 교회 공동체는 이 계명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두 번째 고별사(15,1-16,4): 이는 유다교 회당에서 추방된 것과 관련이 있다. 추방의 의미는 여러 번 언급했기에 생략한다. 아무튼 요한 공동체 구성원 중 일부가 회당에서 추방당하지 않고자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저자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되게 붙어 있을 것을 권고한다.

세 번째 고별사(16,4-33): 이는 로마로부터 오게 될 임박한 박해와 관련되어 있다. 로마 제국은 허락 받은 종교만을 용납하였다. 유다교는 합법적 종교였다.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일종의 신흥종교로 규정할 경우 그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 숭배와 관련해서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조만간 박해할 것이다. 요한공동체는 에페소를 중심으로 퍼져있었는데, 에페소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에페소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황제의 상 앞에서 경배를 드리지 않았다. 곧 박해가 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저자는 구성원들이 로마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로마를 상징하는 세상에 대해 궁극적인 승리를 이루셨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16,33)

요한복음서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전해 받은 예수님의 고별사를 뼈대로 삼아서, 당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지금의 확장된 고별사를 작성했을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이 최후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고별사를 확장시킬 때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확신을 가지고 작성했을 것이다.(16,13)

한편 요한복음서의 고별사와 모세의 고별사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서로 밀접한 유사성을 보인다.

-둘 다 고별사를 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

-모세의 고별사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의 고별사는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 곧 교회가 탄생되기 전에 주어진다.

-두 고별사를 듣는 이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잃어버리기에 그들이 용기를 내도록 위로하고 격려한다.

-두 고별사는 주변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주변 국가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제자들 경우에는 세상을 향해서.

-두 고별사에서 서로 간에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다 강조된다.

-두 고별사에서 보상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진다. 둘 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약속되고,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서의 고별사는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설교를 모델로 했다. 모세의 고별사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고 나서 한참 뒤에 쓰인 책이다. 모세의 고별사는 약속의 땅에서 오랜 세월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이 그 옛날 시나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양성된 백성임을 잊지 말고, 하느님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서의 고별사도 수난 전날 12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1세기 후반 요한공동체의 신자들을 위해 쓰인 것이다. 앞에 소개된 세 가지 위기 상황 속에서 순례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떠나가시는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섬세하게 예비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각 고별사가 나오게 된 위기 상황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고별사 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예수님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14,2-3.18-20.22-23.28;16,5-7.16-22.28)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청원기도(14,6-7.9-11.28;15,10.23-24;16,15)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14,15.21.23;15,10.12-14.17)

성령에 대한 약속과 그분의 역할에 대한 설명(14,16-17. 26;1 5,26-27; 16,7-15) 특별히 성령은 각기 다른 세 번의 위기 상황에서 일관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 세 번의 고별사에 다 등장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다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교회의 시대요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13,31: 고별사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도 하신 유언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이제는 유다가 떠나면서 예수님에 대한 체포, 심문, 죽음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이제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이다. 그런데 앞으로 있을 일인데 이미 다 끝난 것처럼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확고히 걸을 것임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는 카보드는 하느님의 속성과 본질과 관련된 단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자리이다.

*13,33: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신 다음 이어서 당신의 떠남을 말씀하신다. 이미 앞서 7,338,21에서 암시하셨지만 예수님이 잠시만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란 말씀에 충격에 빠진다. ‘얘들아란 표현은 그리스 성경의 어린 자녀들이여 τεκνα를 의역한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여기뿐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떠나심으로써 이 세상에 고아처럼 남겨질 제자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면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애들아이 호칭에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애틋함이 가득하다. 참고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보다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세는 유다인 남자들 중에 스무 살이 넘은 남자들이 내는 세금인데(탈출 30,13-14),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만 성전세를 내게 하셨다.(마태 17,24-27) 이를 보면 다른 제자들은 스무 살이 아직 안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베드로의 동생이 20살이 안된 안드레아인 점을 미루어 보아 베드로 역시도 20살은 넘었지만 예수님보다 어릴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형과 동생 터울이 15살 차이가 나기가 당시로서는 어렵다.

*13,34: 주님은 당신을 위해 순교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다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다. 새 계명인 형제적 사랑은 요한복음에서 도합 세 번 등장한다.(15,12; 15,17) 이 새 계명이면 족하다. 그런데 왜 새 계명인가? 구약성경이 말한 이웃 사랑의 근거는 너 자신에 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그러나 새 계명에서 형제자매 사랑의 근거는 예수님에게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출발점이 다르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13,35: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된다. 예수님은 왜 새 계명을 주신 것일까? 십계명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범죄 행위만 규제하고 있는 십계명은 한계가 있다. 십계명을 지키면서도 선행을 한 번도 안 할 수 있고,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도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

*13,36-38: 새 계명을 받고도 베드로는 그 새 계명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만 정신이 팔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다. 이에 예수님은 꾸중하지 않고 자상하게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수제자의 자존심 때문인가 베드로는 반발하듯 따라 죽겠다고 외친다. 이는 베드로의 고집과 교만이다. 쿼바디스 도미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로마에서 순교한다.

*14,1: 미라클 메이커 예수님이 언제나 자기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제 곧 자기들을 떠날 것이라 하니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너무나 슬펐다. 이에 주님은 너희는 하느님을 계속해서 철저히 믿어라.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그대로 살려서 나를 계속해서 믿어라. 나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운명의 길을 걷는 것이다.”라고 믿음을 권고하신다. 100원짜리 동전은 아주 작은 동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우리 눈앞에 갖다 대면 태양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걱정이나 두려움이라 해도 그것에 우리 시선이 사로잡히면, 우리는 태양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신학자들은 걱정과 두려움을 불신앙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중 대다수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내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에게 자기 자신들을 온전히 의탁하지 못했던 것이다.

*14,2-3: 천국 본향에 가면 미안한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첫째,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있어서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둘째, 나를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 미안하고, 셋째, 내 힘으로 오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은총으로 온 것이기에 마냥 미안하다는 것이다.(필리 1,21-23) 이승보다 훨씬 좋다. 무신론자의 죽음은 비참하다. 왜냐하면 돌아갈 고향이 없기 때문에 절망적이다. “삶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는 영생에 비해 이 땅에서의 삶은 지극히 짧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구라는 곳은 우리가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라는 것이다.”-릭 워렌. 순례자인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관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의 가치관이다. 매 순간 우리는 주님의 뜻에 일치하면서 살아야 한다.

*14,4-6: 실낙원 전의 아담은 세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았고,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었고,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둘 째 아담께서 첫 번째 아담 이후 잃어버린 이 세 가지 특권을 회복시켜 주신다. “천국을 가는 길은 줄곧 천국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는 그 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시에나의 카타리나. 주님은 진리(1,17; 18,37; 8,32.36)이자 생명(1,4; 10,10) 그 자체이시다. 한편 예수님은 성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길은 그리스말로 호도스 δος이다. 엑소더스 ξοδος 참조. 구약의 엑소더스는 이집트 노예 삶의 길에서 자유인의 길이란 의미이고, 신약의 엑소더스는 죄의 노예 삶의 길에서 자유인의 길이란 의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엑소더스이고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이뤄진다. 14,6 ‘그 길은 요한공동체 신자들이 드리는 신앙 고백이지, 타종교들을 향해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교에만 있음을 주장하는 선언문이 아니다. 가톨릭 포용주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타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해서 선교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부를 온전히 알 수 있다.

*14,7-9: 예수님의 신적 정체를 드러내는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그러나 필립보는 이토록 오랫동안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보았음에도 그것들이 모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14,10-11: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상호내주는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필립보를 향하여, 또 한 번은 나머지 제자들을 향하여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심을 알려주신다. 또 이는 계속되는 고별사와 고별기도에서도 반복된다.(14,20; 17,21; 17,23) 11절은 이미 유다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10,25; 10,37-38) 예수님은 직접 자신을 메시아라고 소개하지 않고 당신이 하시는 일을 통하여 당신이 메시아시고, 당신에 의해서 메시아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려준다.

*14,12: 청출어람? 제자들은 스승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더 많은 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능력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복음 선교 사업을 주도하셨다.(14,16-17; 15,26-27; 16,13-15; 사도 10,19-20; 13,1-2;16,6-9)

*14,13-14: 15,7-8; 15,1616,24까지 치면 네 번이나 약속하신다. 그런데 우리의 청원기도가 응답을 받으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첫 째 그 기도가 하늘나라 건설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또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또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응답받을 수 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에 일치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다 응답받는가?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하느님 아버지에게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청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마르 14,32-39) 바오로는 육체의 가시를 치워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주님께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늘 응답하지 않으시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예수님의 경우,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이 원하는 대로 수난의 잔을 치워주시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 잔을 기꺼이 마실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바오로의 경우, 그가 원하는 대로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지는 않지만 그가 그 가시 때문에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주님의 능력을 갖고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다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세속 생활을 위한 기도만 한다면 그 청원기도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선 하느님의 뜻과 영광을 찾는 기도를 한 뒤 필요한 부분을 청해야 할 것이다. 이미 하느님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때로는 그 기도가 영혼 구원을 방해하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을 때도 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 일찍 응답하시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느님께서 늦게 응답하시는 경우는 절대 없다.’

*14,16-17: 보호자란 단어는 그리스어 팔레클레토스παρκλητος옆ㅇ 있도록 불린 자. 파라는 옆에이고, 클레토스는 불린 자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법정에 서게 된 누군가를 변호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변호사 말고도 위로자, 중재자, 협조자 등의 의미가 있다. 요한복음사가만이 성령께 이 호칭을 붙이고, 그 역할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한다.

예수님 대신 오시는 분: 고별사에서 37번 등장. 예수님은 가시는 분, 파라클레토스 성령은 오시는 분. 승천 후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할 것이다.

예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 16절의 다른 보호자란 표현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파라클레토스임을 알 수 있다.(1요한 2,1 참조) 예수님과 본질이 같으신 성령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은 그분이 예수님의 계승자로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할 것이란 의미를 준다. 곧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제자들을 돌보시며(14,26; 15,26; 16,13),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신다.(16,13)

진리의 성령: 14,17; 15,26; 16,13 참조

교회 시대 내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교회의 시대에 교회와 신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성화해 주시는 분은 파라클레토스 성령이시다. 그래서 교회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른다.

<성령의 역할>

교사: 14,26; 16,12-13. 가르치신다는 것은 미래와 관련해서이다. 교회 안팎의 여러 문제와 직면하게 될 것이고, 성령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가르쳐주실 것이다.(사도 15,28)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사도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성령께 기도하고, 또 회의를 통해 성령의 뜻이 담긴 해결책을 찾아보아야 한다.

기억하게 해주는 분: ‘기억하게 해 주신다.’ ‘휘포밈네스코는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그리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차원에서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명해 주신다.’ 또는 깨닫게 해주신다.

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2,22;12,16 참조) 주석서를 본다 해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성령은 인격체이시다. 그러므로 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많이 들어오고 적게 들어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14,26), 우리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시고(14,26), 우리를 책망하시고(16,8), 우리를 인도하신다.(16,13) 또 그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시고(15,26),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다.(16,14) 성령은 어떤 에너지나 힘이 아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기에 감정을 갖고 계신다. 우리가 그분을 속일 수도 있고(사도 5,3-4), 모욕할 수도 있으며(히브 10,29), 슬프게 만들 수도 있다.(에페 4,30) 그분은 지식을 갖고 있고(1코린 2,11), 원의를 갖고 있으며(1코린 12,11), 뜻을 갖고 계신다.(로마 8,27) 우리를 인도하시고(로마 8,14),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다.(로마 8,16)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해 주시고(로마 8,26), 우리에게 지시하시고(사도 20,22), 경고하신다.(사도 20,23) 그분은 또 애정을 갖고 계신다.(로마 15,30) “나는 얼마나 성령을 찬미하고 존중하고 있는가? 나는 성령과 대화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성령께 도움을 청한 적이 있는가?” 성령이 없다면 교회법, 신학, 전례, 시스템 모두 영혼이 없는 죽은 몸과 같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도움을 받는가?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분께 항복해야 한다. 물에 빠져 익사 전에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순간은 힘이 다 빠져 모든 걸 포기하고 가라앉을 그 때이다.

*14,18-20: ‘다시 오겠다이제 조금만 있으면은 부활하신 날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일을 가리킨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시면서 예수님의 영적인 현존이 비로소 신자들 안에 이뤄진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의 약속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현존이 곧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를 버리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실 때도 세상을 버리는 방식으로 아버지께 가지 않으셨습니다.”(요한복음 강해, 아우구스티노) 성령은 요한공동체는 물론 오늘날 우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제자들을 예수님과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

*14,21-24: ‘내 계명들은 복수다. 새 계명을 포함한 주님의 모든 가르침과 바람을 말한다. 이는 밑의 내 말들을 지킨다는 표현과 연결된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분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지 알지 못한다. 투명한 보석이 먼지 하나를 견디지 못하듯이,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분과 깊이 일치해 사는 사람은 그분의 작은 뜻조차도 어기는 것을 힘들어한다. 이냐시오 성인을 비롯한 많은 성인들이 대죄는 물론 소죄조차 범하지 않는 은총을 구했던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어기고 슬픔을 드리는 일은 어떤 작은 것이라도 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가리킨다. 이 두 분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는 앞 절 유다 타대오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이 분명하지만 소수 유다인들에게만 받아들여지고 대다수 유다인들에게서는 거부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당신의 가르침을 지킬 것이고, 그런 이들 안에 예수님은 물론이요 아버지 하느님도 함께 머물 것이라 대답하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주님이 그들 안에 있는 것을 봄으로 해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신 그리스도란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14,27: 예수님의 유산은 그분의 평화이다. 예수님은 내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 평화는 당신이 유다 지도자들과의 갈등과 박해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실 때에도 누리셨던 것이요, 상처 받고 신음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몸과 마음이 몹시 지치셨을 때에도 누리셨던 것이고, 제자들의 이기적인 모습과 약한 믿음 앞에서 실망을 금치 못하셨을 때에도 누리셨던 것이다. 샬롬은 단순히 갈등의 부재, 안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안녕, 질서와 조화가 있는 상태, 온전한 상태를 말한다. 주님이 유산으로 남기고 간 평화는 어떤 곤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누리는 평화를 말한다.(16,33) 이 평화는 폭풍우 한가운데서 누리는 평화다.(마태 8,23-27) 산사에 가면 며칠 해방감과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세상으로 돌아오면 도루묵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누리게 되는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평화이다.

*14,28-31: 제자들이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하느님께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큰 손실이 아니라 큰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떠나야 세상에 구원이 온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한 분을 들어 이단자 아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보다 못한 열등한 인간으로 하락시켰다. 그러나 이 표현은 파견한 자와 파견 받은 자의 관계 안에서 나온 고백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작은 존재로 표현될 때는 언제나...한 분이 다른 분보다 위대하거나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근원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십시오.’라고 그의 저서 막시마누스 반박에서 말하고 있다. 기원후 325년 니케아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판결한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에서 일은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그렇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일이 발생한 다음에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일종의 예방주사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갑작스럽게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아버지 뜻 안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믿어야 하고,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세속 권력자가 예수님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31절 예수님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예수님의 이 사랑과 순종을 제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하신 예수님은 비록 세상의 우두머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그로써 이뤄지는 구원의 열매만큼은 세상에 속한 모든 이들이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일어나 가자.”

이 말씀으로 모든 고별사가 끝나고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야 했다. 그러나 고별사는 16장까지 계속 되고, 17장 고별기도가 이어진다. 사실 13-14장은 애초 요한복음서 저자에 의해서 들어간 고별사이고 나머지들은 요한복음 편집자에 의해 나중에 삽입된 것이다. 그래서 세 개의 고별사를 비교해보면 충돌과 반복이라는 모순이 있다. 편집자는 두 개의 고별사를 첨부할 때 첫 번째 고별사 마지막 구절 일어나 가자”(14,31)을 그대로 두었다. 편집자는 혼동을 예상했지만 요한복음서 저자에 대한 존중 때문에 생략하지 않았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 강의록 요한 묵시록 주임신부1004 2024.11.22 83
21 강의록 요한 복음 심화 학습 주임신부1004 2024.05.18 78
20 강의록 요한복음 제5강의: 20-21장(종강) 주임신부1004 2024.05.15 72
19 강의록 요한 복음 수난기 주임신부1004 2024.05.13 81
18 강의록 요한 복음 고별사2 주임신부1004 2024.05.13 33
» 강의록 요한 복음 제4강의: 13-19장 주임신부1004 2024.05.13 66
16 강의록 요한 복음 제3강의: 8-12장 1 주임신부1004 2024.04.26 72
15 강의록 요한복음 제2-2강의 1 주임신부1004 2024.04.22 58
14 강의록 요한 복음 제2-1강의 주임신부1004 2024.04.22 66
13 강의록 요한 복음 제1-2강의 주임신부1004 2024.04.16 80
12 강의록 요한 복음 제1-1강의 1 주임신부1004 2024.04.16 67
11 강의록 요한 복음 해제 주임신부1004 2024.04.16 61
10 강의록 탈출기 부록2 주임신부1004 2024.03.21 53
9 강의록 탈출기 부록1 주임신부1004 2024.03.14 137
8 강의록 성경공부 제4강의: 광야에서 만난 하느님과 계약의 백성 주임신부1004 2024.03.10 51
7 강의록 성경공부 제3강의: 이집트 탈출과 해방자 하느님 주임신부1004 2024.03.10 124
6 참고자료 이집트 탈출과 약속의 땅 file 주임신부1004 2024.03.10 35
5 강의록 성경공부 제3강의: 성조들에게 나타난 하느님 주임신부1004 2024.03.05 143
4 참고자료 원역사를 위한 ppt 자료 file 주임신부1004 2024.02.26 51
3 강의록 성경공부 제2강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인간과 신 file 주임신부1004 2024.02.26 84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