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오르심
오늘은 주님의 승천대축일입니다. 오늘 승천대축일에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이 전하는 하늘이 단순히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하늘도 아님을, 우주선을 타고서야 도달하는 우주의 공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고 전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은, 곧 하느님이 계시는 곳은 제자들의 시야 너머입니다. 제자들이 눈과 귀 너머에, 제자들의 경험과 지혜 너머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은 우리의 말로 다 표현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으로 다 파악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체험하는 곳입니다. 다 말할 수 없고 다 알 수는 없지만,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계속 체험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은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고 두 눈이 멀어버렸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곳도 하늘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부르심 역시 하늘에서 울려왔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입니다. 그렇게 보면, 내 마음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 바로 그곳이 하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져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그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이 가서 닿는 곳이고, 우리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시는 곳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아 하느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시는 곳 역시 하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이 어렵고 마음이 지쳤을 때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만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하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비로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며 째째하게 굴던 부끄러운 내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을 우리가 올려다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세상을 더욱 각박하게 살아가며, 우리의 삶이 더욱 지치고 어려워집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좀 더 여유있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늘을 올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를 보면,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한 하늘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용기와 위로를, 내가 겪은 사랑과 화해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사랑과 화해를 체험하게 해주신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승천대축일에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 우리도 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하늘을 보며 힘들고 지친 우리 마음이 위로와 용기를 받기를 청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그 위로와 용기를 이웃들 앞에서 당당히 증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하늘에 가 닿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