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 제6주일 강론)
친구 아이가?
어떤 분이 저한테 죽마고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어린 시절 대나무 말을 타고 놀았던 오래된 친구를 두고 일컫는 사자성어 아닙니까 했더니 더 오묘한 뜻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사자성어이니까 한 글자씩 운을 띄어 보면, 죽! 죽치고 앉아서, 마! 마주 보며, 고! 고스톱이나 치는, 우! 친구랍니다. 아재 개그입니다. 그러나 아시죠? 고스톱 재미로 치다가 판돈이 커지면 싸움 나고 원수됩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끼리 부르는 말 중에 교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친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벗 友자가 서로 싸우고 갈라서면 근심할 憂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끔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완전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경우를 보기도 하니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그 어떤 종교도 창시자를 친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동일한 주님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따라서 친구라는 표현은 천부당만부당하게도 상식을 뛰어넘는 호칭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항상 ‘얘들아!’ 하고 부르십니다. 실제 예수님의 나이가 수제자 베드로보다 형이었고, 동생 벌의 제자들을 자식처럼 여겨 친근하고 따뜻하게 ‘얘들아!’하고 부르신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다릅니다. 당신 죽음이 가까워지자 더 이상 제자들은 얘들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 제자들에게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보시고 실제로 북받치시어 우셨습니다. 라자로를 가슴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라는 표현은 항상 아가페적인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단순한 우정하고는 차원이 다른 운명을 함께 나누는 관계라고 할까 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는 형제애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말씀은 머지않아 십자가 위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유언을 남기시는데,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해 대신 죽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인 우리들 역시도 서로 친구가 되어 그렇게 대신 죽어주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참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보면 어떨까요?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랍니다. 진정한 친구는 내가 잘 나갈 때 어떤 이익을 보고 붙어 있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처지가 곤란해지고 궁핍할 때도 변함없이 붙어 있는 친구라고 하지요. 인디언식 표현대로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짊어진다는 말은 친구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친구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위로해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친구가 일어설 수 있게 곁에서 돕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죽지 않으면, 즉 나의 이익을 버리지 않으면 친구를 살릴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초대교회 신자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서로 기도해주고, 서로 나누며,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누군가 붙잡혀 처참하게 순교하면 그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장사를 치러 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인도 붙잡혀 죽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결과물이 지금 로마의 카타콤바입니다. 공동 지하 묘지에 수많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친구이신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전포성당도 역사가 벌써 50년이 흘렀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고, 아직 살아 있지만 노환과 지병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없는 친구도 있습니다. 또 한때는 친구였는데 가슴 아프게도 개인적인 갈등과 분쟁으로 절교하고 떠난 친구도 있고, 반대로 친구라고 믿었는데 지금 내 주위에 맴돌고 있지만 뒤에서 나를 반대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이상 어찌 되었든 우리 모두는 친구입니다. 좋은 친구, 나쁜 친구, 도움이 되는 친구, 필요 없는 친구 등 그 수식어가 무엇이든지 우리는 주님과 운명을 같이 나눈 친구들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한편 오늘 부활 제6주일은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생명의 문화는 꽃을 피울 것입니다. 오늘 비천한 나에게 친구가 되어주신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하신 고별사를 다시 들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