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8일 월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신화나 전설에서 신이 신으로서 이 세상에 임재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들이 하느님이라 행사하는 자칭 하느님들은 많다. 그러나 신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오기 위하여 인간의 자궁을 빌리겠다는 말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 이전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을 사랑해서 너무도 사랑해서, 신으로서 누릴 수많은 영광과 찬양을 모두 다 버리고, 사도 바오로가 필리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6-8)라는 말씀처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신의 철저한 인간화의 시작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 탄생 예고 사건이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만남에서 우리들이 읽어 내어야 하는 진실 가운데 하나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밤, 피땀을 흘리며 게세마니에서 기도하시던 그 번민의 시간이 마리아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약혼한 요셉의 아이가 아닌, 그 아버지라는 자가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그걸 믿어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혼인 계약 파기에다가, 회당에 끌려가서 군중의 재판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해도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될 처지에 놓이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죽으러 들어가는 일이 뻔한 것인데, 어찌, 번민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참으로 매정하게도, 루가 복음사가는 단 한줄로 마리아의 그 번민을 요약해 놓았다. «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곰곰이 생각한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 이 여인의 아들은 그래도 제자 둘을 데리고, 자신의 번민에 함께 하기라도 했고, 적어도 몇 시간을 홀로 기도하고, 기도 중에 «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는 말까지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었는데, 그 어머니에게는 그런 시간이 과연 얼마나 허락되었을까?
이 모든 번민 속에서 마리아는 결단을 내린다.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38). 이 응답으로 이제 마리아라는 인간은 죽는다. 애비 없는 자식에,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태로움과 또 육체적 즐거움의 이별과 십자가 길을 향한 어머니로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는 온전히 죽는다.
인간 마리아가 죽자 마리아 속에 현존하시던 하느님이 살게 된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의 백미가 바로 이것이다.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경축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그 구세주의 어머니가 죽음을 각오하고, 구원을 향한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선택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 세상의 미래와 직결된 선택이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마리아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그에 이은 마리아의 투신을 우리는 찬양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삶을 본받으려는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마리아의 선택과 결단과 투신을 마리아의 몫으로만 돌려 버린다면, 그래서 마리아를 그저 « 천주의 모친 »으로 떠받들고, 박제된 포르말린에다가 가두어 놓아 버린다면, 거기에는 우리 삶의 변화란 없고, 그저 머리 조아림과, 강요된 복종이 아닌, 자발적인 복종과 그 복종에 대한 합리화와 먼훗날 그 합리화에 대한 부끄러움과 마침내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리네 삶에 대한 한탄의 한숨과 눈물만 남을 뿐이다. 우리네 자식들과 후손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삶의 질곡들을 겪게 하는 무한 반복의 지루함과 고루함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을 내 삶의 주인님, 마님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 경천애인의 삶, 사랑의 삶을 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내 길이라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마리아가 보여준 « ‘보십시오’(Ecce) 주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의 삶이다. 그 삶은 지금보다는 분명 보다 나은, 보다 밝은 미래로 열려 있는 삶이긴 하지만, 어렵다. 아니, 죽으러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부활로 가는 길이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나는 마리아를 통해 부활로 가는 길을 배운다.
여러분에게 성모님은 어떤 분이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