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복음 제3강의: 8,12-12

 

*들어가면서

820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란 선언을 헌금함 곁에서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황금 촛대 옆에서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그 말씀은 더욱 극적 효과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빛이 되어 그들을 이끌어 주셨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친히 유다인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어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8,12-59

*8,12: 빛이라는 명사 앞에 정관사가 있다. ‘세상의 그 빛이란 오직 예수님만이 죄의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의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를 따르는 이의 정확한 의미는 나를 계속 따르는 이. 빛을 선택한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8,15-16: 이 말씀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을 내리는 분이다. 유다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지만 정작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자 마음을 닫고 완고하게 거부했다.

*8,21-24: ‘위에서는 하느님의 영역을 가리키고, ‘아래에서는 이 세상을 가리킨다. ‘위에속한 예수님이 아래곧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다. 824절에서 내가 나임을 가리키는 단어는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 ἐγεμι.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8장에서만 무려 세 번이나 사용하신다.(24.28.58) 에고 에이미는 예수께서 당신이 하느님과 같은 분임을 드러내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으로, 하느님이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나타나 모세에게 밝히신 이름 야훼YHWH’의 그리스말 번역이다.(탈출 3,13-14) 예수님이 당신을 지칭하여 이 말을 하신 것은 당신이 하느님께 파견되어 이 세 상에 온 구원자요, 하느님과 같은 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8,28: 에고 에이미가 드러나는 자리는 십자가이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세 차례 예고하셨다.(마르 8,31;9,31;10,33-34) 그런데 요한복음서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단어인 들어 올려진다.’가 세 번 나온다.(3,14; 12,32; 8,28) 예수님은 편견과 불신앙으로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나서야 당신이 에고 에이미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8,31-36: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한다.(로마 6,22; 1코린 7,22참조) 우리말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그리스말 둘로스 δολοξ는 노예를 가리킨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모든 권리와 뜻을 그분에게 맡겼고 그로써 참된 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33절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유다인들은 수차례 대제국들의 지배를 받아 왔다. 여기서 노예살이를 한 적이 없다는 말은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죄를 지으면 죄의 노예이다. 36절은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14,6 참조) 주님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는 진리이시다.

*8,41: 그들의 아버지에 대하여 언급한 것에 반대하여 유다인들은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간음은 우상숭배를 말한다. 따라서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며 다른 신들에게 절하며 주님과의 계약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8,48-59: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셨던 예수님.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를 직역하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를 번역한 것이다. 유다인들의 구원 역사는 아브라함이 시발점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다.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이 말씀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분노하고 돌을 집어 든다. 신성모독죄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시간은 오지 않았기에 주님은 피신하신다.

 

2. 태생 소경의 치유: 9,1-41

*들어가면서

9장 역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있었던 사건이다. 구약성경 어디에서 인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탈출 4,11; 시편 146,8) 언젠가 메시아가 오면 눈먼 이들을 고쳐줄 것이란 예언이 있을 뿐이었다.(이사 29,18; 35,5; 42,7)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유독 예수님은 소경을 많이 고쳐주셨다. 이는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초막절 빛의 예식과 관련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심으로써 그 선언을 입증하신다. 7개 표징 중 6번째 표징인 이 기적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분을 거부하는 이들은 영적으로 소경이란 메시지를 전달한다.

*9,1: 흥미롭게도 저자는 태생 소경이 남자임에도 남자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아네르 νρ 대신에 인간 혹은 인류를 뜻하는 안트로포스 νθρωποξ를 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 점을 언급하며, 이 소경은 인류를 대표하여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눈이 먼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말씀이 사람이 된 목적은 눈먼 인간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1,18)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영적 눈을 뜨게 되는가?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빛으로 받아들일 때이다. 육신의 눈이 먼 사람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듯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도 인생의 참뜻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눈먼 이는 예수님을 볼 수 없기에 그분을 찾아 나설 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눈먼 이를 보고 먼저 다가가신다.

*9,2: 당시 유다인들은 눈먼 사람을 죄인이요 저주받은 존재로 취급했다. 눈먼 이는 하느님의 말씀인 토라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의 죄냐? 보편적인 고통관이다.(창세 3,17; 4,7-8; 8,3-6; 11,11) 라삐들에 따르면 태생 소경은 엄마 배 속에서 죄를 지은 것이다. 창세기에서 야곱과 에사우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장자권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듯 아기가 엄마 배 속에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라삐들은 주장한다. 부모의 죄냐? 부모가 지은 죄 때문에 자식이 고통 받는다는 생각은 보편적이다.(탈출 20,5; 신명 5,9; 2열왕 5,27) 대표적인 예를 아담의 원죄를 들 수 있다.

*9,3: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 한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로 만들었다는 잔인한 말씀으로 들린다. 마치 자신의 뛰어난 기량을 증명하려고 환자의 병이 깊어지도록 방치하는 잔인한 의사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절을 잘못 구분하면서 생겨난 오해이다. 본디 4절은 하느님의 일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4절은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기 위하여,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이다. 주님께서는 태생 소경을 우연히 만나 가엾이 여겨 눈을 뜨게 해주셨고, 그 결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을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을 주셨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으로 인간의 고통에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고통을 치워버리러 오신 것도, 고통을 설명하려고 오신 것도 아니다. 그분은 당신의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셨다.

*9,4-5: 낮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때이고, 밤은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때이다.

*9,6-7: 교부들은 진흙을 사용해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행위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드러낸다고 보았다.(창세 2,7) 실로암은 파견받은 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17차례나 파견받은 이로 불린다. 물론 예수님은 실로암이 아닌 다른 물로도 눈을 뜨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실로암에서 그의 분을 뜨게 한 것은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550여 미터 내려가야 만난다. 분명 소경은 여러 번 넘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리에서 바로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굳이 힘든 걸음을 하게 만드셨을까? 그것은 태생 소경이 믿음으로 응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진흙을 붙인 채 달려간 것은 순전히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요한복음서의 치유 기적은 언제나 인간 편에서 믿음으로 응답할 때 일어난다.

*태생 소경의 영적 성장: 처음에는 예수님이라는 분”(9,11)이라고 고백하지만 계속 이야기를 읽어보면 예언자”(9,17),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9,33), 그리고 주님”(9,38)의 순서로 고백은 깊어진다. 이렇게 믿음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이 성장하기보다 신앙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더 많다. 익숙함을 성숙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는 것은 주님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훈련을 통해 이뤄진다. 때로는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이뤄진다. disciplediscipline을 통해 성장한다. 직장을 잃고, 명예를 읽고, 젊음을 읽고, 건강을 읽고, 친구를 잃고,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서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신앙으로 나아간다.(집회 2,1-5; 유딧 8,25-27; 야고 1,2-3.12)

*9,13-34: 유다인들이 태생 소경을 종교법정으로 데리고 간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대목은 사실 요한공동체의 현실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영적 눈을 뜨게 된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믿음이 없는 가족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고, 회당에서는 이단자로 낙인찍혀 쫓겨났다. 여기서 유다인들이란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공생활 하실 당시 백성의 종교지도자들은 대사제가 속한 사두가이 그룹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60년쯤 후에 기록된 요한복음서에는 이 그룹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성전임무를 책임지고 있던 사두가이 그룹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서가 쓰일 당시 유다 백성의 지도자는 바리사이들이었다. 아무튼 예수님의 은총으로 눈을 뜨게 된 사람은 그의 부모와 달리 유다 당국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복음서의 내용이 예수님 공생활 중에만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내용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약 60년이 지난 뒤 요한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다. 이제 신자들은 배교와 순교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1,2차 심문에 태생 소경은 당당했다. 오히려 바리사이를 비웃듯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 또 태생 소경은 우리란 말로 증언한다. 31절의 우리는 요한공동체의 목소리이다.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았고, 그 박해의 가장 근본적 문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 곧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신원이었다. 이에 태생 소경은 구약성경 어디에서 소경을 치유해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그것은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음을 증언한다. 회당 추방의 의미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고통에서 면제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구원받는 것이다.

*9,35-41: 예루살렘 성전은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35배 크기다. 예수님은 우연히 그를 만나신 게 아니라 일부러 찾아 만나셨다.(헤우리스코)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태생 소경의 구원뿐이다. 그래서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바로 물으신 것이다. 온갖 박해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켜온 그는 이제 예수님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경배가 따른다. 주님에게 치유 받은 이들 가운데 경배를 드린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일상 중에 몇 퍼센트를 경배하는가? 믿음과 함께 하는 경배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존재 전부를 봉헌하는 것이다. (마르 12,30) 눈 뜬 소경 바리사이들. ‘는 율법이나 윤리 차원에서 지적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심판을 받는다. “태생 소경이었던 이가 점점 열린 눈으로 예수님의 진리를 보게 된 반면, 바리사이들은 더욱더 고집 센 태도로 그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브라운 이 세상은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충분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 대기에 충분할 만큼 어둡다.”-팡세

 

3. 성부와 하나이신 성자: 10,1-42

*들어가면서

10장 전반부(10,1-21)는 초막절 마지막 날에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후반부(10,22-42)는 성전 봉헌절에 벌어진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10장 전반부는 9장과 관련이 있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을 고쳐주시지만, 그는 곧 회당에서 추방당한다. 결국 태생 소경은 유다교의 양우리에서 쫓겨난 양이 된다. 예수님이 그 소식을 듣고 친히 그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10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그를 당신의 양우리, 곧 생명이 넘치는 목장으로 인도하시고 당신 친히 착한 목자가 되어 그를 돌보아 주신다.
*10,1-6: 목자는 아무리 양들이 많아도 그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의 목동은 숫자를 셀 줄 몰라 자기가 돌보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양들의 얼굴을 다 기억하기 때문에 누가 그 자리에 없는지 바로 알아차린다고 한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 어느 양이 약한지, 어느 양이 성질이 있는지, 어느 양이 한눈을 팔아 애를 먹이는지 안다. 이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 양들인 우리 각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약한 점, 상처받기 쉬운 점, 번번이 넘어지는 유혹과 죄를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감시하고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보기 위해서이다. 헤매는 양은 찾아내고, 길 잃은 양은 도로 데려오고, 상처 입은 양은 싸매주며, 아픈 양은 잘 보살펴 주기 위해서이다.(에제 34,11-16) 팔레스티나의 목자들은 앞장서서 걸어가며 양들을 인도한다. 미국의 카우보이처럼 말을 타고 양들을 몰거나 호주의 목동들처럼 양치는 개를 이용하지 않는다. 팔레스티나 광야는 온통 바위투성이인 데다 곳곳에 벼랑과 협곡이 있어 자칫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의 목자는 양들보다 앞장서간다. 한편 양들은 자기 목자와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안다. 그래서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그 목자를 따라간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양우리를 공동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목자들은 낮 동안 들판에서 양을 치다, 저녁이 되면 공동우리에 집어넣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아침이 되어 목자가 나타나면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고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불러내어 들판으로 데리고 나간다. 우리 속에는 다른 목자들의 양들이 함께 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들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음성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 욕심 때문이다.

*10,7: 팔레스티나 목자들은 낮동안에는 양들을 풀어놓아 풀을 뜯게 하다가 밤이 되면 임시로 마련한 우리에 들여보냈는데 양들이 우리에 들어가려면 먼저 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목자들은 양들이 들짐승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문앞에서 밤을 새며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데려갈 때는 자신을 가리켜 문이라 하고, 우리를 돌보실 때는 목자라 지칭하신다.”-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나는 양들의 그 문이다.” 문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당신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10,8: ‘먼저 온 자들또는 도둑이며 강도라고 비난받은 이들은 바리사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기보다 박해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앞을 보게 된 태생 소경이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다고 회당에서 추방했다. 바리사이들을 도둑이요 강도라고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관복음서에도 자주 나온다.(마태 23,14; 23,16; 23,25)

*10,10: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는 표현은 양들이 도둑을 만나 처하게 되는 처참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착한 목자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되도록 돌보아 주신다.

*10,11: ‘착한 목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착함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 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다. καλξ아름다운뜻이다. 양들을 위해 대신 죽을 때 목자는 아름답다. 양들은 스스로 방어할 수 없다. 또 양들은 야생할 수 없다. 반드시 목자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목자는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착한 목자이기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4번이나 말씀하신다.(10,11.15.17.18) 예수님이 당신의 희생적 죽음을 반복해 언급한 것은 당신이 바로 그렇게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초막절 마지막 날이었다. 여섯 달 후 그 목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다.

*10,12-13: 삯꾼이란 글자 그대로 삯 때문에,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소명을 돈벌이로 바꾼 이들이다. 삯꾼이 양들을 인도할 경우 양들은 두 가지 위험에 처한다. 첫째 위험은 이리와 같은 들짐승의 습격이다. 들짐승들이 공격해 오면 삯꾼은 죽지 않으려고 도망친다. 둘째 위험은 내부에서 온다. 삯꾼은 양을 배불리 먹이는 것보다 자기 뱃속을 채우는데 관심이 있기에 양털이나 고기를 탐낸다. 양의 생명에 관심이 있으면 참된 목자이고,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면 삯꾼이다.(1베드 5,1-4 참조)

*본당 신부들의 수호성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귀여운 꼬마야, 나에게 아르스로 가는 길을 알려주면 나는 네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줄게.” “어느 사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 공동체를 변화시킴. 프랑스 혁명 이후 230명의 냉담자, 하루 18시간 고해성사. 새벽 2시 기상 성당에서 성무일도, 성경묵상 후 미사, 감사기도, 아침 식사 후 정오까지 기도. 매일의 기도가 사람들을 변화.

*10,22-39: 봉헌 축제 때 있었던 일이다. 초막절은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사이, 봉헌축제는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 사이에 거행된다. 봉헌축제는 기원전 167년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시리아 총독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안티코오스 4)는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 제우스 신을 세우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숭배하라고 명했다.(1마카 1,41-54; 2마카 6,1-7) 이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엄청난 불경죄요 성전모독이었다. 이에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항쟁을 벌여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 성전을 정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후 유다 달력으로 키스레우 달 25일 새롭게 건립된 제단을 하느님께 봉헌했다.(1마카 4,41-61) 이 봉헌을 기념하는 축제가 바로 성전봉헌축제다. 바로 이 축제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께 축성된 분임을 선포하면서(10,30) 봉헌절 축제를 완성하신다.

*“때는 겨울이었다.”: 유다인이라면 성전 봉헌 축제가 겨울철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때가 겨울이었다고 보고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솔로몬 주랑: 광장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성전과 예루살렘 도시를 구분하는 바깥 담 구실도 했다. 또 겨울에는 동쪽 광야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어 자주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사도 3,11 설교 장소, 사도 5,12 초대교회 예배 장소) 솔로몬 주랑은 로마의 포럼이나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이 유다인들이 이곳에 모여 율법에 대해 토론도 하고 유명 인사들의 연설도 들었다. 또 라삐들은 이곳에서 즐겨 제자들을 가르쳤다.

*10,24: ‘둘러싼다는 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기필코 얻어내겠다는 강경한 태도이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경배하겠다는 의도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고대하고 있던 메시아는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할 임금이었다. 유다 지도자들은 특별히 빌라도 총독을 의식하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사실 빌라도는 봉헌축제를 맞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봉헌축제는 마카베오 집안의 영웅들이 외국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한 것과 예루살렘 성전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독립 축제일이다.

*10,27-30: 특히 30절의 말씀에 주의하라.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일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일치하고, 하느님 뜻과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는 내용을 총체적으로 함축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즐겨 사용하던 아들이 아니라 를 쓰고 있다. 30절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요 절정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는 물론이요, 그 이상의 존재 곧 신적 존재임을 나타낸 말씀이다. 유다 사회에서 메시아란 하느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임금도 사제도 메시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여느 메시아와 달리 하느님과 일치된 신적 존재임을 가리킨다. 또 이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와 이루는 인격적·의지적인 차원의 일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의 신성과 당신의 신성이 하나라는 뜻이다. 이는 삼위일체 교리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4세기 아리우스 이단은 예수님의 이러한 신성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피조물로 여겼다. 최근의 여호와증인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다.

*10,31-33: 유다인들 입장에서 돌을 다시 든 이유는 당연하다. 신성모독죄이기 때문이다. 친그리스도교적인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은 높게 사지만 본체론적으로 성부와 성자가 일치한다는 말에는 아직도 부정적이다.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은 유다교에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10,34-37: 예수님은 이제 랍비들의 방식대로 성경 말씀에 의거하여 논증을 전개한다. 시편 말씀(82,6)을 인용하시면서 하느님은 율법을 당신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랍비들의 문헌에서도 입증된다. 하느님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라 칭하는 사례를 구약성서의 다른 대목에서도 볼 수 있다.(탈출 4,16; 7,1; 시편 45,7; 즈가 12,8)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신들로 칭해진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말씀, 곧 당신 계시의 전달자로서 파견된 자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세상에 파견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들로 칭해진 자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성모독을 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칭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 자신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표시한다.

*10,38: 예수님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들이고, 그 일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10,39: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거부한 유다인들의 강한 반응이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불신은 예수를 붙잡으려하거나 죽이려 하거나 돌을 집어 던지려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다시란 표현으로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다. 여전히 주님은 피해 가신다.

*10,40-42: 이곳은 라자로가 사는 베타니아도 아니고 요르단강 동쪽 지점으로, 세례자가 그의 임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은둔한다. 행적을 통해 얻은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온다. 이 새로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끌리며 메시아를 믿는다.

 

4. 라자로의 소생 기적: 11,1-57

*들어가면서

라자로의 소생 기적은 마지막 표징이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왕실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심

-벳자타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심

-빵 다섯 개로 군중을 배불리심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심

-태생 소경을 고쳐주심

 

수많은 표징 중에 7개만 소개한 이유는 7이라는 숫자가 충만함, 온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라자로 소생 기적은 영예롭게도 충만함을 완성하는 일곱 번째 기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다. 흥미로운 점은 첫 번째 표징이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드러내는 결혼식 자리에서 이뤄졌다면, 마지막 표징은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무덤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11,1: 우리말 성경은 시종일관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라고 라자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성경에는 오빠라는 칭호가 없다. 오빠로 번역된 단어는 형제를 가리키는 아델포스이다. 이것만으로는 라자로가 삼남매 중에 몇째인지 알 수 없다. 베타니아는 고통의 집이라는 뜻으로 병든 라자로와 잘 어울리는 지명이라 하겠다.

*11,2: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은 12장에 나온다. 그러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언급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 라자로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한다는 것이다.

*11,3: 마르타와 마리아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라고만 해도 주님께서 바로 알아차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삼남매를 모두 사랑하셨다. 그리고 유다 지방에서는 당신이 사랑한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을 복음 운동의 근거지로 사용하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매는 라자로를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하고 일러준 것으로 끝난다. 사실 라자로는 예수님께 기별을 보낸 그날 죽었다. 그만큼 라자로의 병은 위중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매달리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1,4-6: 라자로는 사랑하신 예수님은 즉시 달려오지 않았다. 이틀을 지체하셨고, 라자로가 죽은 지 4일 만에 도착하신다. 또 라자로의 병을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했으니 아마 두 자매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자로의 중병을 방치했다고 보면 안 된다. 이 말씀은 이미 비극적 사건은 일어났지만, 그것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뜻이다.

-첫째 날: 라자로가 중태에 빠지자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기별꾼을 보냈다. 기별꾼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자로는 죽었고 당일에 무덤에 묻혔다. 기별꾼은 라자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룻길을 걸어 예수님께 갔다.

-둘째, 셋째 날: 예수님은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넷째 날: 예수님이 하루길을 걸어와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섰다. 그날은 라자로가 죽은 지 넷째 날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라자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서둘러 가도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이틀을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더 머무르신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여덟 시간 만에 무덤에 안장한다. 시신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 때문이다. 이런 유다인들의 장례풍습을 볼 때 라자로는 기별꾼이 예수님께 간 바로 그날 무덤에 묻힌 것이다.

*하필 이틀을 더 지체하셨을까?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흘 동안 시신 주위를 맴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고 삼 일째 되는 날 무덤 문을 열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는지 살펴보았다. 또 사람이 죽어 넷째 날이 되면 영혼은 멀리 떠나가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신이 썩는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던 날 무덤 앞에 선 이유는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라자로의 시신을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욱 굳게 믿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1,7-9: 유다인들은 하루 열두 시간은 낮이고, 나머지 열두 시간은 밤이라고 생각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란 말씀은 지금은 낮 시간이지 아직 밤 시간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아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11,11-14: “우리의 친구 라자로는 예수님의 친구일 뿐 아니라 열두 제자의 친구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내가~라고 하신 것은 라자로를 살려주실 분은 예수님이며, 그분만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잠들었다.’는 죽음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예수님은 이 말을 선호하셨다. 그분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이 말은 선호하였다.(사도 7,60; 1코린 15,18) 우리는 번데기에서 나비가 태어나듯 죽음을 통과해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런 존재로 태어난다.

*11,15: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 라자로를 소생시킨 것을 보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세상에 생명을 줄 구원자이심을 믿게 되었기에 기쁘다는 말이다.

*11,16: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길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의 말이다. 사실 성전봉헌 축제 때의 발언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로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11,17-19: 많은 유다인이 올리브 산 꼭대기 베타니아까지 찾아가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했다는 것은 이들 가족이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서 명망을 얻고 친분 관계를 맺을 만큼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준다. 이들 가족은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것 같다. 12장을 보면 라자로가 살아난 것을 기뻐하며 감사의 잔치를 베푸는데, 이렇게 큰 잔치를 베풀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때 마리아는 노동자 임금 300일치에 해당되는 최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닦아드렸다.

*11,20-22: 마르타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만 듣자마자 황급히 그분께 달려간다. 매사 적극적이고 분주하며 흥분 잘하는 그녀이다. 아마 그녀는 원망과 기대를 함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지체하신 예수님을 원망했지만 그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변함없었다.

*11,23-24: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를 마르타는 단순한 위로로 알아듣는다. 당시 대부분 유다인들은 세상 종말 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11,25-27: 25절은 육체적 죽음 이후 세상 종말에 누리게 될 부활에, 26절은 현재 누리는 영적 생명에 방점이 있다. 마르타는 전자만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비록 육신 죽음이 와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타는 불완전하게 신앙고백한다. 언뜻 보면 가장 완전한 신앙 고백 같지만 생명의 주님이라는 가르침과는 무관한 고백이다. 마르타가 정말 믿었다면 후에 주님, 죽은 지 나흘이니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주님을 만류하지 말았어야 했다.

*11,28-32: 예수님은 마르타의 집으로 오지 않고 왜 마을 바깥에 서계셨던 것일까? 그리고 마르타는 왜 조문객들이 듣지 않게 마리아에게 가만히전한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안전 때문이었다. 마리아 옆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인들이 많이 있었다. 밀고 구실을 마련하지 않은 조치였다. 마리아는 마르타와 달리 대뜸 원망부터 하지 않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한다.

*11,33-36: 33절에 나오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졌다는 말은 격앙되다는 뜻인데, 그리스 말로 엠브리마오마이 μβριμοαι인데, 동물이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는 모습을, 그리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사람이 씩씩거리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격앙하셨던 것은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떼어놓고 슬프게 만드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해 분노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하는 벗의 죽음을 실감하고 자연스럽게 흘린 눈물이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슬픔이 있다. 하나는 희망이 없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이 있는 슬픔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면서도 희망이 있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주님 품에 안겼다는 것을 믿지만 이별의 슬픔은 어찌할 수 없다. 부활을 믿는다고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11,38-41: 돌 하나 치우는 데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까? 주님께서 돌을 치워라.”하신 것은, 기적은 주님의 능력과 우리의 응답이 함께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면서도 그분을 믿고 순종했다. 돌문을 굴려 막은 무덤 형태는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기 위해서,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열고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가족들은 몇 년 후 시신이 썩으면 뼈를 추려 유골 항아리에 담아 동굴 한쪽에 보관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비워두었다. 아무튼 기적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이미 썩은 시신이라며 주님을 만류한다. 그녀가 간과한 것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신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점이다.

*11,41-42: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시작된다. 이 호칭은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청을 언제나들어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하면서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8,29) 라자로 소생 기적은 당신이 아버지에게 받은 권한으로 한 것이지 초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님을 알려주시고자 하신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아드님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기도를 하시기 전에 감사를 드렸으니 주님은 청할 필요가 없으셨다는 것을 나타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11,43-44: 제자들과 군중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고 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로써 5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5,25)하신 말씀이 진리임이 드러난다. 성경에서 발로 걸어 다닌다.’는 말은 살아 있다.’와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스 말 페리파테오걸어 다니다는 뜻 말고도 살아가다란 뜻도 있다.

 

라자로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자란 뜻이다. 라자로의 운명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언제가 죽어 무덤에 묻히겠지만 우리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무덤 밖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인생의 비참함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의 그 무엇인가가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무질서한 애착과 어두운 모습, 충동적인 악습과 증오, 도를 넘는 경쟁과 소유욕, 명예심과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

 

*11,45-46: 많은 사람이 소생 기적을 보고 믿었지만, 몇 사람은 유다 지도자들에게 일러바쳐 결국 산헤드린이 소집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된다. 일부 유다인들이 라자로의 소생이란 엄청난 기적을 목격하고도 생명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다. 교만 때문에 천사가 지옥으로 떨어졌고, 교만은 회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11,47-48: 믿지 않기로 작심하면 기적을 보고도 더 큰 악을 도모한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이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의 추종자들은 계속 늘어나 언젠가는 그를 임금으로 앉힐 것이다. 로마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면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것이고, 바빌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유다인들을 포로로 끌고 갈 것이다.” 산헤드린 의원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나라를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위와 기득권을 잃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누리던 이권을 상실하는 것이다.

*11,49-50: 예수님을 두고 열린 산헤드린은 비공식적인 모임이었다. 먼저 대사제 카야파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모임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식 모임이었다면 카야파는 의장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산헤드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공식적 모임으로 봐야 한다. 실 산헤드린에는 니코데모나 아리마태아 요셉처럼 예수님에게 호의적인 인사도 있기에 공식적으로 의회를 소집하면 문제가 복잡해지니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만 불러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11,51-53: ‘그해의 대사제는 일년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신 그해를 가리킨다. 영구직인 대사제직을 그 해 맡고 있었던 카야파는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고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에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카야파의 예언은 아이러니 기법이다.

 

5.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12,1-50

*들어가기 전

12장부터 19장까지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한 주간의 일들로 기록되어 있다.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림(12,1-11)

-임금으로 예루살렘 입성하심(12,12-19)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옴,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12,20-36)

-막간(12,37-50): 표징의 책 1, 수난과 영광의 책 2부 사이에 유다인들에 대한 비판과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가 들어 있다.

-고별사와 고별기도, 예수님의 체포(13,1-18,11)

*12,1-3: 잔치 때에는 비스듬히 누워 그리스 로마 풍습을 따라 식사를 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수월하게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릴 수 있었다. 당시 여인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여성의 마리카락은 남자들의 성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 않고 집을 나서는 것은 가슴이 다 들여다보이는 파인 옷을 입고 나가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었다. 그러니 마리아가 사람들 앞에서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게다가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만지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유다 풍습에서 스승의 발을 만지는 사람은 종들뿐이었다. 마리아는 스승께 대한 극진한 사랑과 존경 때문에 스스로 추문거리가 되었다. 사랑하는 스승의 수난에 동참하고 그 장례를 미리 준비하려고 했다. 실제로 장례 때 죽은 사람 몸에 기름을 바르기 전에 먼저 발에다 기름을 발랐다고 한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이다. 게다가 비난을 감수하고 머리를 푼 것은 애도할 때 머리를 푸는 유대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 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자리다툼하고 있을 때 그녀는 스승 발치에 앉아 성실히 그분의 말씀을 경청했다. 충실한 제자인 마리아는 예수님이 예고하신 그 시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년 이미 수배령은 내려졌고 수난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고 자칫 사형수로 돌아가시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황급히 묻힐 가능성이 높기에 미리 장례식을 치러준 것이다. 향유 한 리트라는 340미리리터니까 상당히 많은 양이다. 가격은 1,500만원 정도된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이 향유는 상당히 고가품인 알라바스트로스 단지에 들어 있었다. 마리아는 순나르드 향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얼마나 비싼 것인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마리아는 예수께 대한 지극한 정성과 조건 없는 사랑, 헌신을 보여주었다.

*12,4-8: 유다를 도둑이라고 한 것은 평소 그가 돈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사실 회계는 세리장 출신 마태오가 맡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를 신뢰하고 기회를 주었다. 그럼에도 유다는 배신하고 조금씩 돈을 꺼내 개인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니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서 얼마나 못마땅했겠는가? 그런데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만 유다만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다고 전한다. 나아가 유다가 그렇게 한 것은 가난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탐욕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요한공동체에서 신앙을 버리고 이탈하는 이들 때문에 배교자를 경멸하고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이들을 염려하고 경고를 보내고자 유다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유다처럼 썩어 없어질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지 말하는 메시지이다.

*12,8: 예수님은 곧 떠날 것이다. 그러니 그분을 향한 사랑의 행위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딱 한 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딱 한 번 있는 일이고, 그 유일한 죽음을 미리 기념했던 마리아의 믿음은 길이 전해질 것이다.

*12,9-11: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는 순례객들이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기원후 66파스카 기간에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들은 270만 명이었다. 참고로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3만명 정도였다. 산헤드린은 이제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한다. 라자로는 예수님이 신적 능력을 갖고 계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정한 이들은 수석 사제들이다. 이들은 사두가이파에 속한 이들로서 부활신앙을 부정했기에 죽은 라자로가 살아났다는 사실이 저주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라자로는 부활신앙을 부정하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만방에 알리는 증인이다.

 

*12,12-15: 종려나무는 전통적으로 유다 민족주의를 상징하고 그 가지를 흔드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거나 승리에 대한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한 것에서 유래한다.(1마카 13,51; 2마카 10,7) 따라서 유다인들이 열광하고 환호한 이유는 자신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독립시켜 줄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귀는 행동화된 비유이다. 군중은 예수님을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전차를 끄는 말 대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심으로써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주셨다. 이는 평화의 임금님이시며 만민의 임금님임을 드러내는 상징 행위이다.(즈카 9,9-12)

*12,20-22: 그리스어를 하는 이방인을 뜻한다. 디아스포라는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온 그리스 사람들은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방인 도시에서 온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파스카를 보내려고 순레 온 것을 보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분명하다. 비록 할례를 받고 유다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다교에 호의를 갖고 안식일을 지키며 하느님을 섬기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전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고, 이방인의 뜰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찾았던 것 같다.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면담하고 싶다란 뜻이다. 마치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처럼. 그리스 사람들이 필립보를 찾아 것은 그가 그리스어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벳사이다는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지역이다. 필립보는 그리스말로 말들의 친구란 뜻이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공생활 초기 자발적으로 형과 친구를 예수님께 인도했는데, 이제 공생활 말미에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있다.

*12,23-24: 23절 완료형을 써서 그때가 이미 왔음을 알려주신다. 십자가 사건은 며칠 후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미 온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는 사건이 분명히 이뤄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24절은 32절과 함께 보아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이 땅에서 들어 올려져 돌아가시면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올 것이다. 추수 때가 되면 밀알 하나에 40개 정도의 밀알이 맺힌다. 다음 해 1,600, 다음 해 64천 개, 또 그다음 해 250만 개, 그다음 해에는 1억 이상의 밀알을 내게 된다.

*12,25-26: 우리도 주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야 한다. 자아를 부인하면 가장 완전한 예수님의 인격을 옷 입게 될 것이다. 탐욕이 아니라 절제가, 이기심 아니라 관대함이, 비열함이 아니라 고결함이, 잔인함이 아니라 온유함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삶의 신비는 우리의 육신이 죽기 전에 죽는 것이다. 곧 삶의 신비는 육신이 죽기 전에 자아가 죽는 것이다. 자아가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없다.

*12,27-30: ‘산란하다는 그리스말로 타라소 ταρσσω이다. 공포, 고뇌, 저항감, 동요 등 아주 강한 느낌을 담고 있는 말이다. 인간 예수님이 존재 밑바닥에서 두려워하고 괴로워하시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주님이요 스승인 예수님이 수난의 형별과 죽음이 두려워했다면 말이 안 된다. 예수님의 두려움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단절을 체험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이다. 한 번도 하느님 아버지와 단절되어 본 적이 없는 그분에게 일시적이나마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공포였다.(마르 15,34 참조)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이 반어법적 질문에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증명한다. (마르 14,36 참조) 이미 영광스럽게 했다는 공생활 중에 행한 많은 표징과 가르침을 두고 한 말이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며칠 후 이뤄질 십자가 죽음을 두고 한 말이다. 4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하늘의 소리는 세 번 나온다. 세례를 받을 때(마태 3,17), 거룩한 변모 때(마태 17,5), 그리고 지금이다.

*12,35-3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자들을 계속 가르치실 것이다. 하지만 군중을 향한 공적인 가르침은 이로써 끝난다. 이 말씀 후 몸을 숨기기 때문이다. 그다음 13장부터 16장까지는 고별사이고, 17장은 제자들을 위한 고별기도이고, 이후로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다.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간절한 호소다.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군중을 향해 빛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암시하면서 군중들이 당신을 믿어 그 빛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신다. 여기서 빛의 자녀가 되다는 일회적 행위를 강조하는 시제이지만, 한편 동사 믿다πισεετε는 계속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시제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한 번의 결단으로 이뤄지지만,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간(幕間, intermission): 12,37-50. 표징의 책과 수난의 책 사이에. 첫째 목소리는 요한 복음 저자의 목소리이고, 둘째 목소리는 예수님의 목소리이다. 이제 예수님의 공생활은 끝났다. 그러나 그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끝내 유다인들은 완고하게 믿지 않았다. 이에 저자는 유다인들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회심의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인들은 왜 그랬을까? 그 대답을 저자는 이사야서 6장에서 찾는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불신앙은 처음부터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유의지로 주님을 거부한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의 호소는 끝까지 이어진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고자 많은 표징과 가르침을 주셨다.

*12,44-50: 이 말씀은 당신 눈앞에 있는 군중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미 예수님은 군중을 떠나 몸을 숨기셨다. 그러므로 이 막간의 말씀은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기 전 무대 조명이 꺼지고 어두운 적막 속에서 들려온 외침이다. 비록 이 말씀들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지만 저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분의 목소리로 다시 한번 들려주심으로써 그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유다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공생활 3년간 주신 가르침을 한 번 더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들은 진리와 권력 사이에서 진리를 선택하도록 마지막으로 권고 받고 있는 것이다. 또 이 말씀은 당시 요한 공동체에서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들과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이기도 하다.

 

*독일 뤼벡 성당 마당 돌판에 새겨진 글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를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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