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2-1강의: 요한 5,1-6,71
1. 본 강의에 앞서
*분위기 전환: 5장부터는 호의적인 분위가 적대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즉, 박해와 추방이 뒤 따른다. 이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다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첫 번째 핵심 주제는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축제를 완성하는 분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은 유다인들과 거듭되는 논쟁을 통하여 당신의 신적 정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로써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을 우리가 믿고 또 믿게 한려는 것이다.(20,31)
장 |
완성 내용 |
6장 |
파스카 축제 ☞ 예수님은 파스카의 본질을 완성하는 분 이집트 종살이 해방 ☞ 죄의 노예살이 해방 |
7-10장 전반부 |
초막절 축제 ☞ 예수님은 초막절의 본질을 완성하는 분 40년 광야 생활 물과 빛으로 돌보아 주심☞생명의 물, 세상의 참된 빛 예수님 |
10장 후반부 |
성전 봉헌 축제 ☞ 예수님은 성전 봉헌절의 본질을 완성하는 분 마카베오 형제의 성전 탈환 및 정화 ☞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
2. 치유기적과 예수님의 신적 권한(요한 5,1-47)
*5,1: 예수님은 매번 축제일을 택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여기서는 그 날이 구체적으로 어떤 축제일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예수님이 ‘안식일’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특정 축제일이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요, 안식일의 본질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4대 명절은 파스카, 오순절, 초막절, 봉헌절이다. 이를 근거로 그 안식일을 오순절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가 오순절을 명시하지 않는 이유는 오순절의 완성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 강림 때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식일은 모든 축제의 표본이다.
*5,2-4: ‘양문’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문으로 희생제사에 쓸 양들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그 문 곁에 벳자타(=올리브 집) 못의 크기는 오늘날 축구장 정도이고, 깊이는 6미터 정도였다. 벳자타 못은 선착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 병이 중하면 중할수록 가장 먼저 물속에 뛰어들 확률은 거의 없다. 겉보기에는 은총의 자리이면서 실제로는 절망과 갈등의 자리. 치유되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희망고문.
*5,5-7: 성경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병인지 말하고 있지 않다. 그저 몸이 약한 이, 즉 앓는 사람이다.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공관복음처럼 중풍병자일 수 있다. 또 38년 동안 계속 그 못가에 있었는지 본문으로는 알 수 없다. 그렇든 아니든 38년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병석에 있었다. 그의 상황은 절말 그 자체이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셨듯이 그가 간청하기 전에 먼저 찾아가 치유해 주신다. 사실 그는 물이 출렁거릴 때 마다 집념을 가지고 매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못을 향해 갔지만 항상 세치기 당했다. 그는 정말 낫기를 바랬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아픈 사람에게 건강 회복은 너무나 당연한 바람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 이 말의 직역은 “온전해지고 싶으냐?”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아는 부분이 아니라 온몸을 낫게 하신다. 온몸이란 우리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은 물론이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정신과 영혼도 가리킨다. 이 질문은 우리 삶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당신은 정말 우울증에서, 알콜 중독에서, 무질서한 악습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고 싶습니까?”
*5,8: 예수님은 따스한 친절을 베풀고 격려해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버겁다고 느낄 정도로 거칠게 대하며 도전하신다. 38년이나 병석에 있어 근육이 굳어버린 병자에게 던지신 “일어나거라.”라는 말은 병자의 내면을 흔들어놓고, 영혼에 불을 붙이고, 생명에 열정을 불어넣어주기 위한 도전의 말이다.
*5,13: 예수님이 급히 자리를 뜨신 이유는 군중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자기 병도 고쳐 달라고 몰려들며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치유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기적은 4복음서를 통틀어 30건 밖에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 이유가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노 교부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섯 주랑이 모세오경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다섯 주랑에 수많은 병자가 모여 들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아래 모여 들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율법 아래 모여 든다고 해서 병 고침이나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세 율법은 무엇이 잘못인지, 무엇이 죄인지 알려줄 뿐 병 고침과 죄 사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할 뿐이다.
*5,14: 예수님은 성전에서 우연히 이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를 찾기 위해 성전을 돌아다니셨다. ‘찾다’라는 의미의 동사 헤우리스코(εύρισκω)이다. 예수님이 그를 찾았던 것은 그에게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단순히 치유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죄를 용서하셨기에 영혼이 온전해졌음을 선언한 말씀이다. 이윽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하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죄를 용서했으니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쁜 일’이란 다시 병고에 시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영혼이 파멸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신다.
*안식일 논쟁(5,9-18): 여기에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 곧 그리스도론적 정체에 대한 예수님의 계시가 확연히 드러난다.
*5,9-11: 여기서 유다인들은 ‘유다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 이들은 “당신을 낫게 한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요?”라고 물음으로써 그들의 관심사가 병자 치유가 아니라 율법 준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지키기 위해 39가지 금지 규정을 정하고, 각 금지 규정에는 세부 조항들을 추가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안식일에 가능한 한 침을 뱉지 마라. 뱉은 침이 흙 부스러기를 동그랗게 만들었다면 안식일에 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틀니 착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틀니가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틀니를 집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정원을 거닐면 안 된다. 정원을 거닐다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파리를 따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여자들은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을 보다가 흰머리가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뽑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용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용변 행위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것이기에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힌다.
이로써 인간에 대한 연민은 사라지고 형식적 율법주의만 남게 된다. 이는 영적인 죄이다. 오만, 교만, 타인에 대한 단죄 등. 이는 육체적인 죄보다 더 위험하고 더 파괴적이다. 그 까닭은 사랑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5,15: 이 사람이 배은망덕하게도 예수님에게서 ‘물러가’ 유다 당국을 찾아가 보고한 행위를 악의에서 나온 밀고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 때문에 유다 당국의 협박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고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입증할 수 없다면 그는 처벌을 받을 것이기에 자신이 살 길은 오로지 예수님을 밀고 하는 것 밖에 없었다. 38년 만에 치유 받은 이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언젠가는 죽을 목숨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어리석은 자다. 치유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께서 ‘다시는 죄 짓지 마라.’고 경고하셨는데, 그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이익에 두려워하며 안위 보전을 위해 죄를 짓고 만다.
*5,16-17: 하느님 아버지께서 안식일 규정에 관계없이 병자를 고쳐주신다면, 예수님은 그분의 아들이시기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느님만이 안식일에 일할 수 있는 데 ‘나도 일하는 것이다.’하며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한 발언 때문에 분노한다. 먼저 ‘내 아버지’라는 칭호는 누가 들어도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니,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심한 거부감을 일으킨 것이다. 또 안식일에 하느님만이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감히 예수님이 자기도 하느님 아버지처럼 안식일에 일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부러 안식일만 택해 병자들을 치유하신 것은 안식일이 어느 날보다 치유 행위를 하기에 적합한 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생명을 돌보는 날이다.
*예수님의 자기변호(5,19-47):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로 주장했다며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는 유다인들의 고발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통한 변호(5,19-30): 19절과 30절이 같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변호 처음과 끝에 부정을 사용하셨다. 17절을 자칫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와 대등한 존재이거나 아버지께 종속되어 철저히 의존하는 아들로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의미를 알아 들어서는 안 된다. 한편 19절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누리는 사랑의 관계, 곧 깊은 일치와 친교를 말씀하신 것이다.
*증인들을 통한 변호(5,31-47): 유다의 법정 관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말이 법적 증거로서 지지받으려면 그 사람의 진술을 뒷받침해 주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하다.(민수 35,30; 신명 17,6; 19,15)
①당신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 5,32; 5,37
②세례자 요한의 증언☞5,33-35 이미 1,29; 1,33 증언
③예수님이 하신 일들(기적들)☞5,36 참고로 단수 ‘일’은 아버지께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구원 사명을 가리키고, 복수 ‘일들’은 그 구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예수님의 공생활 행위를 리킨다.
④성경의 증언☞5,39.46;12,41 성경에 해박하지만 진리를 믿을 마음이 없는 유다인들. 동방박사가 헤로데를 찾아갔을 때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알아낸 사람은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유다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날지를 해박한 성경 지식으로 정확히 알아낸 이들이다. 하지만 그 왕을 경배하려고 베들레헴까지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그저 자기들이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다는 사실에만 만족할 뿐이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껍질뿐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달맞이꽃을 아는 것이 식물학을 아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신학을 아는 것보다 무한한 가치가 있다.”
“별들이 움직이는 길을 알면서도 자기 영혼이 살 길은 등한시하는 교만한 지식인보다 하느님을 겸손하게 섬기는 농부가 하느님을 훨씬 더 기쁘게 한다.”
이상 이렇게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오직 심판이 있을 뿐이다.(5,22.29-30)
3. 빵을 많게 하신 기적과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6,1-71)
*6장 구성: ①빵을 많게 하신 기적(6,1-15) ②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신 기적(6,16-21) ③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6,22-59)
*공관복음과 비교한 빵의 기적 차이점
공관 복음 |
요한 복음 |
기적을 행한 시기 기술 하지 않음 |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때 |
빵을 드시고 ‘찬미기도’를 드림 |
빵을 드시고 ‘감사기도’ 드림 |
제자들이 빵을 나눠줌 |
예수님이 직접 나눠줌 |
최후의 만찬과 성체성사 연결 |
빵의 기적과 성체성사 연결 |
*요한복음사가는 빵의 기적에 따르는 긴 담화를 통해 그것의 영적 의미를 전다하고자 한다. 즉, 예수님이 파스카의 참 의미를 완성하시는 분이시고, 성찬전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빵은 기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의미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만일 사랑의 기적이었다면 굳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모시려 했던가. 이는 신명기 18,15의 모세 유언 때문이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던 군중은 빵의 기적을 목격하고 배불리 먹게 되자 모세의 예언을 기억해 내고 예수님이 바로 그 예언자(새로운 모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한복음사가는 실제로 있었던 이 기적 사건으로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첫째,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세상에 다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란 것이요, 둘째, 생명의 빵, 곧 성체성사의 대한 가르침이다.
“인생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후자의 삶이다.”-아인슈타인
*6,1: 갈릴래아, 티베리아스, 겐네사렛, 킨네렛 호수 다 같은 호수를 부르는 말이다. 남북 21Km, 동서 13Km, 둘레 55Km. 최저 수심 44M. 그런데도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는 까닭은 히브리어에는 바다와 호수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얌’이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6,1): 통상 동쪽. 유다인들은 주로 서쪽에 모여 살았고, 이방인들은 동쪽(지금의 골란 지역)에 살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셨던 호수 건너편은 구체적으로 벳사이다(=어촌) 이다.
*6,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6,60-66을 보면 예수님이 성체와 성혈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거북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떠난다.
*6,3-4: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까닭은 병자들을 낫게 하신 것을 보고 열광하며 몰려온 군중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또 파스카와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는 표현은 모세를 연상시킨다. 곧 모세가 파스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광야로 인도해 만나를 먹게 하고(탈출 13장), 시나이 산에 올라가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했던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탈출 19장)
*모세와 비교
모세 |
예수 |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민수 11,13) |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6,5) |
“양 떼와 소 떼를 다 잡는다 한들...” (민수 11,22) |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6,7) |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여라.” (탈출 16,16) |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6,12) |
광야의 만나 |
빵의 기적, 영원한 생명의 빵 |
이집트 노예 살이 해방 |
죄의 노예 살이 해방, 구원 완성 |
예언자(신명 34,10-12) |
‘그 예언자’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 |
*6,5-6: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이기 때문에 음식을 구할 곳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필립보 조언 없이도 일할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필립보를 시험하신 것은 열두 제자와 또 우리 생각이 당신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드러내 보이고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이다.
*6,7: 필립보는 예수님이 물으시자 즉시 계산하여 답을 내어 놓는다. 이백 데나리온은 대략 노동자의 아홉 달치 월급이다. 그의 계산으로는 그 큰돈을 구하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을 보았다. 아직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으로 탁월하고, 분석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그러한 능력만을 앞세우다 보면 도리어 신앙의 길에서 뒤쳐질 수 있다. 한편 필립보는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는 주님의 질문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필립보는 인간적인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신 것은 사실 당신에게서 무상으로 살 수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이사 55,1 참조) 물론 여기에서 필리보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계획과 그 계획의 완성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 이뤄짐을 유념하라는 것이다.
*6,8-9: 안드레아는 카나 혼인 잔치 기적을 또 올렸는지 필립보가 계산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도록 최소한의 양식을 구해온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자발적으로 오병이어를 제공한 어린 아이는 꼬마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 꼬마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100-110 순교)라고 한다. 어린 꼬마 이냐시오는 빵의 기적이 있기 전에 예수님 품에 안긴 적이 있었는데, 바로 열두 제자가 서로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당신 품에 안으신 적이 있었는데(마르 9,36-37참조), 그 아이가 바로 이냐시오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 시대 보리빵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밀 값이 너무나 비싸 밀로 만든 빵은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옵사리온(ὀψἀριον) 두 마리는 물고기를 뜻하는 옵손(ὄψον)의 약칭으로 아주 조그만 물고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갈릴래야 바다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작은 정어리 자반이다. 마른 보리빵을 먹을 대 목이 메지 않도록 함께 먹는 밑반찬이었다.
*안드레아의 회의: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빵 다섯 개를 드리면서 하찮게 여겼다. 사실 봉헌을 앞두고 신구약의 남자들은 회의를 품는다.(탈출 3,11; 이사 6,5; 예레 1,6; 루카 5,8 참조) 그러나 한 여인만이 순명하신다.(루카 1,38) 우리가 너무나 부족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쓰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말이다. 하느님은 부족한 인간을 당신의 유용한 도구로 쓰신다. 이 대목에서 아무리 우리가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한다 해도 진정한 봉사라 할 수 없다. 안드레아가 주님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주님, 지금 저희가 갖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6,10: 그리스어로 아나피프토(ἀναπἰπτω)는 풍성한 음식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먹는 자세를 가리킨다. “자리 잡게 하여라.”는 “비스듬히 눕게 하여라.”이다. 즉, 왼쪽 팔을 베고 비스듬히 누운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자세이다. 유다인들은 평상시 식탁에 앉아서 먹는다. 그러나 파스카 같은 축제 때에는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서 음식을 먹었다. 이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파스카(4절)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기적이 성체성사에 대한 영적 진리를 드러내는 표징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는 6,22 이하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빵의 기적과 성체성사의 밀접한 연결은 초대교회 안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빵조각이 산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아들게 하소서.”(디다케 9,4) 여기서 산은 빵의 기적이 있었던 바로 그 산을 의미한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에는 보리빵을 성찬 예식에 사용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파스카는 3~4월 사이에 거행되는데, 이 무렵 갈릴래아 들판은 푸른 풀로 덮인다. 이 말은 푸른 풀밭에 양떼를 인도하여 배불리 먹이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시편 23,2)
*6,11: ‘감사를 드리신다.’의 그리스어 동사는 유카리스테오(εὐκαριστέω)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최후만찬 본문에 이 단어가 등장한다. 곧 예수님이 최후만찬 중 파스카 음식을 드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유카리스테오 동사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는 빵의 기적을 최후만찬의 성체 성사와 연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안드레아에게서 오병이어를 받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보잘것없는 초라한 음식이지만, 하느님이 사랑으로 주신 음식이기에 더없이 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은 자기 몫의 음식을 기꺼이 바친 어린 꼬마의 아름다운 마음을 크게 사셨을 것이다. 주님은 빵이 다섯 개든 만 개든 개의치 않으신다.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돌을 가지고도 빵을 만드실 수 있다. 아니, 아무 재료 없이 한 마디 말씀으로도 빵을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적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일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믿음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한편 예수님은 손수 이만 명이나 되는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신다. 만일 그랬다면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을 것이다. 요한복음서가 굳이 예수님이 직접 빵을 나누어 주셨다고 묘사한 것은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성체를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6,12-13: ‘남은 조각을 모아라.’에서 ‘남은 조각’은 클라스마(κλἀσμα)는 초대교회에서 성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디다케 9,3-4) 그리고 ‘모아들이다.’는 쉰아고(συνἀγω)로, 초대교회의 성체성사 기도문에도 나온다.(디다케 9,4) 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남은 조각을 보관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다음날 상해서 구더기가 끼었기 때문이다.(탈출 16,20) 그런데 예수님이 나눠 주신 빵은 성체를 상징하는 것이고, 상하지 않기에 남은 조각을 거둬들일 수 있다. 또 사도들이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는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새로운 열두 지파)인 교회를 배불리 먹이는 주님이심을 드러낸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하신 말씀은 지구촌 기아와 빈곤, 사치와 낭비, 쓰레기 문제를 반성하게 한다.
*6,14-15: 군중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모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려 한다. 예수님 시대에는 민족주의의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기대에 예수님의 기적은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를 떠올리게 했고, 군중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줄 것은 물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왕이라고 보게 된다. 이에 주님은 자리를 피하신다.(마태 4,9-11 권력욕)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표징(6,16-21)
*6,16-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를 건너가라고 하시고 당신은 군중이 몰려들기 전에 산으로 물러가신다.(마태 14,22) 그 까닭은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의 움직임에 제자들이 뇌화부동하지 못하도록 미리 그들을 떼어 놓은 것이다. 그들은 기적을 보고 들떠 있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작 한 광주리를 하나씩 들고 배에 탔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파스카 시기라 보름달이 환하게 잔잔한 수면 위에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심한 돌풍이 불어오면서 큰 풍랑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마태 8,21 세이스모스, 지진을 동반한 풍랑) 배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6,19: 벳사이다에서 카파르나움까지는 물길로 대략 6킬로미터이다. 그들이 배를 타고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왔다는 것은 4.8~5.1킬로미터 정도 왔다는 것이니,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직를 지척에 두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풍랑은 거셌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바람은 잦아들 것 같지 않아 제자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갈릴래아 호수는 해수면보다 낮고(182미터), 호수 주위를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기압 차이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종종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면서 큰 풍랑이 일었다. 어부 출신이 주인 제자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세이스모스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하고 의지하던 배우자와 갑자기 사별하게 되었을 때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을 때
-자녀가 중병에 걸리거나 먼저 하늘나라로 갔을 때
-이혼의 아픔을 겪을 때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절망하던 제자들 옆에 여전히 광주리는 있었다. 만일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광주리를 기억했더라면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기적을 체험했을지라도 그것이 내면화되지 못하여 세상 세파와 근심에 평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편 23,4; 히브 13,5; 요한 14,18을 기억하라.
*제자들이 파도와 싸우는 동안 예수님을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 제자들은 전날 저녁부터 새벽녘가지 사투를 벌였다.(마태 14,25) 그러나 이 시간 주님은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마르 6,45-48) 막상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시려 호수 위를 걸으신 것은 새벽이었다. 제자들이 역풍을 만나 고생하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계셨지만 한참 지난 후에야 그들에게 다가가신 것이다. 그 까닭은 제자들이 공경을 겪으면서 더 성숙하고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찾아오신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그 고통과 시련을 잘 견뎌내기를 바리시며 지켜보고 계신다.
*6.20: 예수님은 큰 풍랑이 이는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이 구약성경이 묘사한 하느님처럼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고 풍랑도 지배하는 신적 존재임을 드러내신다.(욥 9,8;시편 77,17) 그리고 거센 풍랑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에고 에이미’(ἐγω ἐιμί: 나다)를 써서 위로해 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적 존재를 계시하신다.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이 단순히 ‘모세 같은 예언자’ 또는 ‘다실 오실 예언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 곧 하느님과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신다.
*두려워 마라: 풍랑은 인생의 일부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해서 인생에 비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거짓 신앙 “두려워 마라. 하느님을 믿어라. 하느님은 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돌볼 것이다.” 참된 신앙 “두려워 마라. 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일들이 너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윌리암 배리
*우리는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이다. 그런데 비바람은 우리 인생 여정 내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비바람과 함께 선물 하나를 허락하셨다. 무지개다. 비바람이 지난 간 뒤에는 무지개가 있다. 성경에서 비바람을 겪고 무지개를 본 사람은 세 사람이다.(창세 8, 13-16; 에제 1,28; 묵시 4,3)
*6,21: 공관복음서를 보면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풍랑을 잠재우시지만(마르 6,45-52), 요한복음서에는 본문 어디에도 풍랑을 잠재우셨다는 말이 없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볼 때 인생에 풍랑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셔 들인다면 풍랑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카파르나움)에 가 닿았다고 한다.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그 순간 이미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다. 우리도 인생의 풍파를 없앨 기적을 기대하기보다도 굳센 믿음으로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한다.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우리를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평화로 이끈다.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6,22-71)
이 대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써 요한복음서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공관복음서보다 나중에 쓰인 요한복음서가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보도를 생략한 것은 당시 신자들은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날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있었기에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요한복음사가는 성체성사의 영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싶어 했다. 그 까닭은 당시 신자들 중 일부가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진짜 주님의 살과 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설령 믿고 있다고 해도 날마다 반복하여 받아 모시다 보니 성찬 예식이 구태의연하고 형식적으로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6,23: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이라는 표현은 빵의 기적이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전달해 주는 기적임을 강조하고자 저자가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다. 그러나 군중들은 순전히 속물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빵의 기적을 일으킨 곳에 다시 온 것이다.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그분을 찾아 왕으로 옹립하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은 물론,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 빵을 배불리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말이다. 사실 로마의 식민 지배보다 더 힘든 것은 부패한 유다 귀족의 엄청난 착취였다. 당시 갈릴래아 사람들은 대다수 소작농이었고, 지주들에게 지속적으로 빚은 진 상태에서 끼니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6,25-27: 군중들은 결국 예수님을 찾아내고 반색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찾아온 동기가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라는 점을 들어 질책하신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실 때는 정신 차려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화: 한 사제의 어머니 점집에 가다. “어떤 이들은 자기 소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들이 소를 사랑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중세 신비가 M. 엑크하르트. 주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나에게 오지 말고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오십시오.”(마태 4,4; 6,25.33 참조)
*다음 글은 로렌스 경이 보츠와나의 칼라하리 사막에서 부시맨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배운 삶의 지혜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은 두 부류의 ‘굶주린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게 굶주린 자와 작게 굶주린 자. 작게 굶주린 자는 배를 채울 음식을 원하지만, 크게 굶주린 자는 의미에 굶주려 있다. 인간을 궁극적으로 깊고 극심한 고통에 빠뜨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의미 없는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행보이나 불행이나 더 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의미다. 의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자기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행복해도 불행해도 괜찮다. 그는 보람을 느끼며, 하느님 안에서 외롭지 않다.”
*6,28-29: “어떤 일들을 해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일들’은 복수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요구하는 일을 많이 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로마 3,20-21:율법 구원관) 예수님은 이에 단수로 대치하신다. ‘하느님의 일’ 그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파견되어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또 믿는 것이다.
*6,30-33: 군중은 빵의 기적을 보고도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광야의 만나와 모세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모세가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었다는 것이 틀렸다고 지적하신다. 모세는 단지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 또 예수님은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당신의 신성을 강조하고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편 하느님이 주시는 빵은 만나와 다르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빵이었다면, 참된 빵은 온 세상을 위한 생명의 빵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 예수님이 생명의 빵, 곧 성체가 되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6,34-40: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여기서 빵 앞에 정관사가 있다. “나는 생명의 그 빵이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생명의 빵이 될 수 있고, 생명의 빵은 곧 예수님인 것이다.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이, 여기서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이 당신 자신이심을 밝히신다.
*6,41-51: 41절을 보면 수군거기는 이들이 ‘군중’이 아니라 ‘유다인들’로 바뀐다. 지금까지 군중은 예수님에 대한 호의와 기대를 가지고 비록 얄팍한 차원의 믿음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적대하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군중을 유다인들로 바꾼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라는 말을 듣고 어이 없어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신을 가지고 수군거린다.
*6,51-59: 이 본문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먼저 공관복음서에서는 ‘몸’(소마 σῶμα)을 주신다고 했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살’(사륵스 σαρξ)을 주신다고 했다. 그러나 살이나 몸이나 아람어로는 다 같이 ‘바사르’이다. 요한복음서가 ‘몸’대신 ‘살’이라고 한 것은 로고스 찬가에 나오듯 예수님의 실제적인 육화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살을 먹으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까지 마시라고 한 것은 분명히 성체성사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디 살과 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참 생명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희생 죽음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6,53-54: 동사 ‘먹고’는 사실 ‘씹어 먹고’로 번역되어야 한다. ‘먹다’의 동사는 ‘에스티오’이다. 이는 단순히 먹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동사 ‘트로고’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소리를 내어 씹어 먹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만큼 신자들이 실제로 당신의 살을 먹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의 피까지 마셔야 한다고 유다인들이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멘을 반복하셨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초대 교회 박해 원인처럼 우리는 식인종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인육)는 율법이 금하고 있다. 사실 이 말씀은 미사성제에서 그분의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심으로써 이뤄진다.
*6,55-59: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명의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게 된다. 이는 개신교가 말하듯 헌신헌혈의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의 사건이다. 54,56절 병행 구절은 보면,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주님과 우리가 갈림이 없이 하나가 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일치는 성체성사로써 구체화된다. 미사성제에서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는 것은 생명의 주님을 모시는 것이요, 그리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성체는 나를 지탱하는 주는 음식이기에 성체 없이는 내 봉헌 생활은 하루 한 시간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마더 데레사
*6,60-71: 여기서 제자들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결정적인 이 말씀(살과 피)으로 그들은 등을 돌린다. 이들은 아마도 성체와 성혈을 안 믿는 것은 물론이요, 예수님의 신성도 받아들이지 않는 당시 요한 공동체와 대립하고 있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거북하고 거슬리게 들리는 것은 비단 이 당신의 살과 피에 대한 말씀뿐이겠는가? 산상수훈을 보면 그 뜻은 알겠으나 실천하기가 거슬리고 거북한 게 한 두 가지인가? 그러나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8,31)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떠나는 제자들: 만일 개신교처럼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예수님의 생애와 행위를 은유적으로 기념하는 것을 해석한다면 굳이 제자들이 떠났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열두 제자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가톨릭의 성체성사론은 형상(=질료)은 빵과 포도주이지만 미사 중 축성된 그것은 실제적으로 그 본질과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직역하면 “열두 제자인 너희만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거야. 그렇지?” 예수님은 사도들이 “아닙니다.”하기를 바라시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었고 신앙고백을 제대로 한다. 이는 저술 목적과 상통한다.(20,31) “너희만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예수님의 이 마음을 예레 3,12과 호세 6,4를 통해 묵상해보자.
*당신이 직접 세운 12사도 가운데 배신자가 나올 것이라는 미리 아신 그분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유다 듣고 회개하라고 악마라고 경고해도 돌아오지 않는 제자를 보는 스승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나서 곧바로 유다의 배반행위를 소개한 것은 두 제자의 상반된 모습을 소개하면서 요한 공동체 신자들이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말아야 함을 물론이고, 신앙을 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끝까지 주님의 종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성공에 취하여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들이 영적 능력으로 성공적인 사도직을 수행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기쁨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지, 큰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살을 먹으라는 것은 이제 내가 없어지고 너희의 밥, 너희의 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밥이 되신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진실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 몸을 주시는 것은 우리와 늘 함께 하고 싶어서이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우리와 늘 함께 하고 싶어 우리의 밥이 되기를 결심하셨다. 우리가 하도 좋아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살고 싶어 밥이 되기를 자청하셨다. 과연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이런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헤아리는가?
*얼라이브. 1972년 우루과이 가톨릭 럭비팀 45명. 안데스 산맥 추락. 16명 72일 만에 구조. 충격적인 인육 사건. 니코리치의 메모 발견. “아버지,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먹는 일입니다. 저도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 제 살이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제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의 고해
“저는 학창시절 주일성수를 철저히 지키며 어른들에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은 다녔지만 하느님 집에 머물지는 못했습니다.(중략)...수도 없이 성찬예식에 참여했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성체와 상혈을 받아 모셨을 뿐 그 의미가 제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산 속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글자 그대로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을 본받은 작은 예수님의 몸이지요. 생명이 무엇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죽음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