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의: 요한복음 1,1-2,22
총론: 1장
첫 장은 예수에 대한 신원을 밝히는 장이다. 서곡 부분(1,1-18)이 전체적인 내용을 포괄하여 예수를 “말씀, 생명, 빛”이라 소개하였다면, 1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수께 대한 다른 명칭들이 소개되며 그에 따른 증인들이 언급된다. 즉, 1,19-34에서는 요한이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 양,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또 1,35-51에서는 예수의 첫 제자들이 증언하는데, “메시아,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 요셉의 아들, 나자렛 출신 예수, 이스라엘의 왕”이라 한다. 점차적으로 예수의 정체가 드러난다.
2. 로고스 찬가(1,1-18)
이는 전례 중에 쓰인 찬가이다. 합창단의 일부가 서곡(1,1-5) 첫 부분을 음을 맞추어 낭송하고, 다른 파트의 합창단은 서곡의 두 번째 부분을(1,6-13) 음을 맞추어 낭송하고, 마지막으로 합창단 전체가 예수 안에 육신이 되신 하느님 말씀의 역사적인 출현을 노래한다.(1,14-17) 그리고 서곡은 말씀 찬가와 복음서의 이야기를(1,19 이하)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18절로 마무리된다.
*머리글: 이 머리말은 당시 공동체의 그리스도 찬미가(예: 필립 2,6-11; 골로 1,15-20; 히브 1,2-3) 가운데 하나인 로고스 찬미가를 바탕으로 엮었다. 로고스로 인한 새로운 구원질서(1,17)와 계시행위(1,18) 및 그에 대한 믿음(1,7. 12-13절)은 요한복음의 주류를 이룬다. 이는 마치 한 오페라의 서곡처럼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 내용을 앞서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1,1: 창세기 첫머리에도 나오는 “한 처음”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절대적 시간을 말한다. 즉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의 신적 실재를 뜻하며, 육화한 말씀의 선재성, 곧 천지 창조 전의 실존을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 말로 로고스라고 불리신다. 이 낱말은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잠언 8,23-36; 지혜 7,22-8,1; 집회 24,1-22)과 그리스화한 유다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로고스)”은 한 인격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즉,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됨으로써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또 “말씀”은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아버지”와 다르시면서도, 나중에는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결국 “말씀”도 “아버지”처럼 하느님이시다. 또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실존해 계셨다. 이는 선재 그리스도론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아버지” 외에 다른 한 격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도발이자 모독이었다.
*1,3: 모든 창조 활동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공동 행위이다. 즉,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적극 동참했음을 뜻한다. ‘생겨나다’가 그리스말에서는 창세 1,3의 ‘생기다’와 똑같은 동사이다. 이는 만물이 ‘無’에서 창조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이나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육화한 “말씀”은 창조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한다.(1코린 8,6; 골로 1,16; 히브 1,2 참조)
*1,4: 성경 전승 안에서 빛의 이미지는 하느님 말씀의 구원적인 계시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단순한 빛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빛이다. 육화한 “말씀”은 창조뿐 아니라 인간 구원에도 참여하신다. 곧, 사람들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참된 길을 비추어 주신다.
*1,5: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곧 하느님의 빛에 의해 아직 비추어지지 않은 인간세계를 뜻하며, 또한 이런 어둠으로 인해 소경이 되거나 악의 세계로 타락한 인간 자신도 가리킨다.(9,39;12,40) 따라서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빛”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또 ‘비치고 있다’는 현재형이다. 이는 육화된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신적 생명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깨닫지 못하였다.’의 다른 번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다. 이는 11절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빛”을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다.
*1,6-8: 요한은 예언자이고 증언자로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와 확실히 구분된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을 “빛”으로 믿고 따르던 무리가 있었고, 이에 대항하여 호교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 ‘참된’(=알레티노스)’는 ‘정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틀린’과 ‘거짓’의 반대말이다. 즉, “유일무이한”, “진실한”이란 뜻의 “신적인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육화된 “말씀”은 진리를 선포하는 계시자이시다.
*1,10: 그리스말로 코스모스 즉, “세상”은 우주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의적 표현으로 쓰인다. 첫 번째 “세상”은 인간세계를 가리킨다. 또 두 번째 “세상”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3,16), 하느님과 그분의 계시를 조직적으로 배척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12,31) 세 번째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 인간들을 가리킨다.
*1,11: “당신 땅”은 창조주의 소유인 인류를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한다.
*1,12-13: 구원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과 자격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 그분의 창조이다.(3,3-8참조) 특히 13절은 동정녀 잉태와 구세주 탄생을 연상시킨다.
*1,14: “사람”의 직역은 “살”이다. “사륵스”는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 본성을 뜻한다. 따라서 “말씀”이 “살”이 되셨다는 것은 육화로써 천상적인 것이 지상으로 내려왔고, 따라서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생명과 영광의 천상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살”은 영지주의의 가현설에 맞서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다음 문장에서 서술되는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사셨다.”의 직역은 “천막을 치셨다.”이다. 200주년 번역은 “거처하셨다.”로 표현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거처(예: 거룩한 장막, 계약의 궤, 지성소)가 마련되어 있다는 구약 성경적 사고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 태어난 아기 예수를 마태오가 임마누엘이라고 부른 것도 일맥상통한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영광”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드러나시는 것을 말한다. 복음서 저자는 앞으로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여러 가지 활동(2,11), 특히 파스카 사건(12,23.28; 13,31; 17,2-5), 그리고 제자들의 일치를 서술하게 된다.(17,22-23)
*1,15: 이미 6-8절 언급, 30절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분의 출신과 사명이 요한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을 호교론적으로 강조한다.
*1,16: 원래 로고스 찬가는 이 구절로 끝났을 것이다. 욱화한 말씀의 영광을 본 자들은 그분의 “충만함”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바로 그 은총까지 실제로 받았다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이다.
*1,17: “율법”을 준 모세와 “은총과 진리”를 가져온 그리스도를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구원 행위가 종래의 율법으로 인한 구원 질서를 능가했다는 설명이다. (로마 6,14; 10,4 참조)
*1,18: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직접 아는 데까지 이를 능력이 없다.(신명 4,12; 시편 97,2) 다만 갈망할 뿐이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의 직역은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이다. 이는 아기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는 그 어떠한 관계보다도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심을 드러낸다. 즉, 하느님과 함께 선재한 분으로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며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관계를 지닌 분으로서 육화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여기서 지상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품위와 계시 능력을 요약함으로써 앞으로 이어질 예수의 공생활 보도와 자연스레 연결시키고 있다.
3. 세례자 요한의 증언(1,19-28)
*1,19-20: 여기서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다 당국, 곧 합법적 지도자, 지배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이 파견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는 것은 공적인 임무 수행이다. 이들은 유다 최고의회를 구성하고, 대사제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답변도 공적인 신앙 고백이 된다.
*1,21-22: 집회 48,10-11; 말라 3,23 등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이 벌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와야 한다.(마태 11,14; 17,10) 그리고 유다인들의 여러 집단에서는 종말에 어떤 예언자가 오리라고 고대하였다.(신명 18,15) 그러나 요한은 ‘나는 아니오!’ 세 번 부정적인 고백을 한다. 이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고 자신을 계시하는 예수와는 상반된다. 요한은 철저하게 새벽을 알리는 파수꾼임을 자처했다.
*1,23: 이사 40,3 인용.
*1,24: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일반적으로 바리사이가 아니라 사두사이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저술될 때 성전이 파괴되고(70년) 상당 기간이 지난 뒤이므로, 사제와 레위인들은 물론 사두가이도 없었다. 다만 바리사이들만 유다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1,25: 바리사이들은 요한의 세례가 메시아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 세례를 종말론적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위로 이해하고 질문한 것이다.
*1,26: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메시아적 의미를 가진 세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베푸시는 분을 알리기 위해 수행되는 “물의 세례”일 뿐이다.(1,31.33) 요한이 자기보다 무한히 우월하다고 선언하는 그 신비스런 사람은 유다인, 바리사이들, 파견된 사제와 레위가 모르는 사람이다. 요한도 영이 그분 위에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제 요한은 이미 그분을 알고 있다. 그는 신적인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1,27: 신발끈을 푸는 행동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어서 유다인 종들에게도 시킬 수 없었다. 요한은 그렇게 낮추는 행위조차도 하기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1,28: 이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라자로의 고향이 아니라, 정확한 위치는 모르나 요르단 강 동쪽 페래아 지방에 있던 한 고을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요한은 약속에서 성취로 가는 통로를 지키는 국경의 사람이다. 즉,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려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장애였던 요르단강 동쪽 강가에 백성들을 모으면서(여호 3장), 요한은 이스라엘이 새로운 모세(요한 6,30-35 참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완성되는 새롭고 결정적인 탈출을 준비하게끔 했다.
4. 하느님의 어린양(1,29-34)
*1,29: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상기시킨다. 첫째는 자기는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어린양처럼 희생하는 ‘주님의 고통 받는 종’의 표상이다.(이사 52,13-53,12) 둘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하는 파스카 때 잡는 어린양의 표상이다.(탈출 12,1-28)
*1,30: 그리스도의 선재성이 세례자의 입을 통해 증거 된다.
*1,31: 세례자는 예수의 신비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그분을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이스라엘”은 “유다인들”과 달리 항상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1,49; 12,13)
*1,32: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비둘기는 아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라 비둘기는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 있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을(아가 2,14; 5,20)을 가리킬 수 있다. 또 세상 창조 때에 심연의 물위를 감도신 성령을(창세 1,2) 비둘기 모습으로 연상한 유다인들의 전통에 의거하여 복음서의 이 비둘기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킨다.
*1,33: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몰랐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분은 곧 메시아시다.
*1,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선재”와 함께 “하느님의 아드님”은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다.
5. 첫 제자들(1,35-51)
*1,35-39: 찾는 인간 그러나 찾아진 인간, 우리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은 것이다. 줄탁동시.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공관복음은 그는 그의 형 베드로와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리를 잡다가 예수께 부름을 받았다. 두 전승을 고려할 때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따라다닌 제자라기보다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함께한 제자로 볼 수 있다.
*무엇을 찾느냐?(1,38):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존재의 의미, 인간 행위의 의미에 대한 질문, 심저에서 우리를 몰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질문.
*점차 “무엇을 찾느냐?”(1,38)에서 “누구를 찾느냐?”(20,15)로 바뀐다. 곧 처음에는 무엇인가를 찾아왔던 인간이 나중에는 그분 자체를 바라는 것으로 믿음이 성장한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도 시간이 흐르면서 강조점이 바뀐다. ‘나를 따르라.’☞‘나를 믿어라.’☞‘나를 사랑하라.’☞‘서로 사랑하라.’
*1,39: ‘무엇을 찾느냐?’☞‘와서 보아라.’ 당시 유다교 라삐들은 공개된 곳에서 가르치기도 했지만 대개 집에서 생활을 같이 하면서 가르쳤다. 공관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카파르나움의 ‘베드로의 집’도 사실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가르친 학교였다. ‘와서 보아라.’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잘 나타낸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칠 뿐이지 예수처럼 자신을 체험하라고 초대하지 않는다. 그 초대를 통해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머문다. ‘머물다’(=메네인, 살다, 지내다)는 신약성경에 112번 나오는데 그 중 66번이 요한계 문헌에 나올 만큼 요한복음의 키워드이다. 이 말은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행동양식을 가리킨다. 곧, 예수님 곁에(1,38-39), 예수님 안에(6,56; 15,4-5), 예수님 말씀 안에(8,31), 예수님 사랑 안에(15,9-10) 머무는 것,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시간은 대략 10경이었다(직역): 오늘날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후 4시경이다. 유다인들에게 10은 충만함과 완성을 상징한다. 또 10시경은 하느님께 저녁 제물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두 제자가 10경에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과 일치하여 충만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은 10경을 실제 시간으로 보는 것이다. 많은 학자가 이 견해를 따른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을 어찌 기억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요한복음사가는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시간을 기록하는 것을 즐긴다. 피곤한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신 때는 대략 6시경(4,6=정오), 고관의 아들에게 열이 떨어지게 한 때는 대략 7시경(4,52=오후 한시), 빌라도가 예수를 유다인의 왕이라고 선언한 때는 6시경이었다.(19,14=정오) 참고로 성경에서 ‘흘러가는 시간, 감각에 따라 살아가는 시간’을 ‘크로노스’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시간, 내적 인간으로 깊어가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한다. 전자는 흘러가는 시간이고 후자는 구원의 시간이다. 또 전자는 허망한 삶이고 후자는 영원한 삶을 지향하는 시간이다.
*1,40-42: 한 탈렌트 사명에 충실한 자 되어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1,41): ‘만났다’의 본래 뜻은 ‘찾았다.’(헤우리스코)이다. 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오래전부터 메시아를 찾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첫 번째 제자, 그러나 삼인방에 낄 수 없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렸고(갈라 2,9) 야고보는 열두 사도단에서 가장 먼저 순교하는 영광을 받았다.(사도 12,2) 그러나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소개시켜주었듯이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이끈다. 참고로 안드레아는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하는데 등장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예수께 인도한다. 첫 번째는 교회의 수장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 두 번째는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갖고 있던 소년을 인도했다.(6,8-9) 세 번째는 헬라인들(이방인들)을 인도한 것이다.(12,20-22) 그리하여 예수님이 만만의 주님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선포하게 만든다. 그는 형을 예수께 인도하여 최초의 국내 선교사가 되었고, 헬라인들을 인도하여 최초의 국외 선교사가 되었다. 위대한 조연, 안드레아.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 파드라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다. 그는 형이 그랬듯이 주님과 똑같은 형태로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십자가는 X자이다.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새로운 이름을 주시다(1,42): ‘눈여겨보다’(엠블레포)는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사용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신다.(루카 22,61, 용서와 자비의 눈빛) 또 부자 청년도 눈여겨보신다.(마르 10,21) 아무튼 시몬을 눈여겨보심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내적 가능성, 잠재된 지도력과 능력을 깊이 헤아리며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를 능력과 상관없이 사랑하셨다. 부족하여도 배신하여도. 하느님의 사랑은 비이성적이며 무모하다.
*케파: 요한복음에서는 시몬이 ‘요한의 아들’인 반면 마태오복음에서는 ‘요나의 아들’로 나온다. 서로 전승이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이름을 새로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신적 사명이 주어짐을 말한다. 공관복음을 보면 시몬은 예수님을 따른 지 한참 지나 이 이름을 받는다.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예수님의 신적 정체를 고백한 다음이다. 요한복음에서 시몬이 처음부터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가 처음부터 드러났기 때문이다. 복음서 곳곳에 드러난 베드로는 진중해야 할 때 떠벌리고, 깨어 있어야 할 때는 잠을 자고, 침착해야 할 때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만일 베드로가 성숙하고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가 아니라 의인들의 교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회, 잘못한 이들을 단죄하고 못난이들을 배척하는 교회였을 것이다.
*필립보를 찾으신 예수님(1,43): 예수님이 필립보를 ‘만나시자’로 번역되어 있지만, 직역은 ‘찾으시자’(헤우리스코)이다. 우연히 필립보를 만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당신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작정하고 찾으신 것이다.
*제자의 삶을 방해하는 선입견(1,45-51): 나타나엘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열두 사도 명단에 없다. 그러나 나타나엘이 12사도 가운데 하나라는 증거는 요한복음을 보면 베드로를 위시한 일곱 사도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그 가운데 나타나엘이 있다.(21,2) 나타나엘은 바르톨로메오의 다른 이름이다. 그 근거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열두 사도 명단에서 필립보 다음에 바르톨로메오가 나오기 때문이다. 둘의 친분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동지로서 함께 모세오경과 율법서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메시아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다. 필립보는 자신이 만난 나자렛 예수님이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주인공이라 보았기에 나타나엘에게 달려간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벽촌 나자렛이라는 말에 회의를 품는다. 메시아는 성경에 의하면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타나엘에게 한 예수님 말씀: 선입견을 가진 나타나엘은 반신반의했지만 필립보의 확신을 믿고 그를 따라 나선다. 덕분에 그는 예수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이란 칭찬을 듣는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저 사람 안에는 야곱(=속이는 자, 탈취하는 자, 움켜쥐는 자)이 없다. 곧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나타나엘 개인에게 한 말이면서 동시에 그가 대표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는 열두 사도단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열두 제자를 뽑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6장 70절을 보면 12사도가 있었음이 분명하고, 따라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나엘을 부르신 것은 12사도단을 완성시킴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 곧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1,48): 이는 라삐 전통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이다. 무화과나무는 선악을 알려 준다는 나무로써 성경공부에 전념하는 율법 학자들의 관습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또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나무는 비밀스런 장소를 의미한다. 이 나무는 그 줄기가 15피트가량이며 그 가지는 25피트나 뻗는다. 팔레스티나 유다인 집 대문 앞에서는 으레 무화과나무가 심겨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무화과나무 그늘을 이용했다. 나타나엘도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게 해 주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 특히 사람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관한 부분들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거가 확실한 해석은 아니다. 한편 이 말씀을 그분의 초자연적인 지식, 곧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타나엘의 신앙고백, 하느님의 아들(1,49): 이 고백은 나타나엘 개인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요한 공동체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이다. 또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의 왕권을 이스라엘에서 재건할 메시아와 같은 의미이다. 이 두 칭호는 “예수는 성경에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1,45)라는 필립보의 말을 재확인해준다.
*그보다 더 큰일들(1,50): 이는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계시적 말씀과 기적, 곧 “표징”을 뜻한다. 그리고 그 표징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정체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낸다. 일단 예수께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약속을 하신다.
*1,51: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는 구절은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케 한다. (창세 28,12-13) 그런데 이 구절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사다리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자), 곧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로서 성부와 일치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도록 통교의 다리를 놓으신다. 공관복음에서처럼 요한복음도 사람의 아들 칭호를 쓴다. 이는 다니 7,9-15을 상기시키고 또 최고 의회에서 벌어지는 재판 중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종말의 광경이(마태 26,64; 마르 14,62) 이미 지금부터 시작된다. 요한복음에서 사람의 아들 칭호는 거의 항상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과 연관지어 나타난다.(3,13-14; 6,62; 8,28; 12,23.34; 13,31)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왕좌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며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실 것이다.
6. 카나 혼인잔치 기적
*미리 알아 두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적(뒤나미스)이란 말보다 표징(세메이온)이란 말을 쓴다. 이는 메시아 시대의 개시를 알리는 종말론적인 큰 이적으로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게 촉구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처럼 치유기적이 아니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일까? 요한복음사가는 기적의 연대기적 서술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에 비추어 그 기적들을 취사선택하고 재배치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나 기적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넘어 갔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른바 대치 신학인데, 아래의 표를 보면 2장에서 10장까지 여러 장면의 핵심을 알 수 있다.
일곱째 되는 날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사업의 마지막 날이다. 요한복음은 창세기 1,1-2,4의 연상 작용을 사용한다. 요한 서장은 창세기 서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창조 7일째 되는 날 하느님은 안식을 취하시며, 인간에게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내도록 명하셨다.(탈출 20,8; 신명 5,12) 즉, 하느님은 모든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7일째 되신 날 당신 영광을 드러내셨고, 인간과 하나 되어 인간의 찬미와 경배를 받으셨다. 이것이 카나의 혼인잔치에 그대로 적용된다. 새로운 창조의 일곱째 날인 카나 혼인잔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영광을 드러내시고 인간과 하나 되시어 안식을 취하신다. 예수님은 7일째 되는 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면서, 곧 율법 시대를 복음의 시대로 대치하심으로써 당신 영광을 드러내신다. 또 이날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 되어 안식을 취하시는데, 그 방법은 7일째 되는 날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도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하나 되신다. 여기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인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세상 종말에 예수님은 신랑으로서, 교회는 곧 신자들은 그분의 신부로서 결합될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동사 ‘계셨다.’(엔)란 계속되는 행위를 가리키는 미완료 시제이다. 이는 성모님이 혼인잔치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계셨다는 말이다. 아마 성모님은 신랑 집과 친척이었거나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것이다. 단순히 손님으로 갔으면 어떻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겠으며, 어떻게 잔칫집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을까? 콥틱어로 쓰인 요한복음서를 보면 성모님은 신랑의 이모였다. 이는 예수님이 신랑과 이종 형제라는 소리다.
*포도주가 없구나(2,3): 당시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고소를 당할 수 있는 결례였다. 그러나 성모님은 섬세하고 자애롭게도 그 처지를 아시고 주님께 간구한다.
*여인이시여(2,4): 여인(귀네)은 본디 미혼이든 기혼이든 장성한 여인을 가리키는 칭호로써 문맥에 따라 ‘여자, 여인, 아내, 부인’ 등으로 옮긴다. 그리스 말을 쓰는 지역에서는 이 말이 일반적으로 외간 여자를 공손하고 점잖게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여인들(마태 15,28; 루카 13,12), 긴 대화를 나누시는 사마리아 여인(4,21), 간음하다 들킨 여인(8,10), 마리아 막달레나를(20,15) 이 호칭으로 부르신다. 그러나 어머니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히브리말과 아람 말을 하는 지역에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단 예수님과 마리아 사시에 어떤 거리감을 두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호칭에 상대를 비하하거나 관계를 부정하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 어머니와 모자 관계를 끊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고 한다. 그동안은 한 어머니의 아들로 살아왔지만,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세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저자의 의도를 간과한 해석이다. 요한복음서 전체에서 딱 두 번 성모님을 ‘여인’이라 부른다. 공생활 시작 카나 혼인 잔치와 공생활 마침인 십자가 위에서이다. 이렇게 처음과 끝을 ‘여인’이라 부름으로써 성모님은 다만 예수님을 낳은 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의 어머니가 되심을 알려준다. 이제 성모님은 구세사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지니신다. 일곱 째 날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종말론적 혼인잔치를 통해 신자들과 하나 되는 순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여인’으로 불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마리아는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새로운 하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인류의 어머니 하와가 ‘여인’으로 언급되었듯이(창세 3,20) 성모님은 새로운 인류, 곧 신약 백성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여인’이라 불릴 것이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이미 물이 포도주로 변하기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모자로 맺어진 요한 사도가 복음서의 저자라면 어찌 마리아를 홀대하겠는가?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2,4): 직역하면 무엇이 당신과 내게 있나이까? 200주년 성경은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의역하면 ‘저더러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저를 끌어들이지 말아 주십시오.’ 이상 종합하면 ‘어머니,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걱정하시는 것과 제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 카이로스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신적 영광이 드러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이때에 예수님께서 영광 속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7,3; 8,20; 12,23.27; 13,1; 17,1) 이러한 때가 대부분 십자가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성모님의 청을 물리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당신의 시간표에 묶이지 않았던 것은 생명을 돕고 살리기 위해서이다. 마치 모세가 간청하자 당신의 계획을 바꾸신 하느님처럼.(신명 24,16☞연좌제 사형; 탈출 32,11-14☞금송아지 숭배 처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마리아는 마치 예수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뒷전으로 물러나 아들을 신뢰하며 지지한다. 신약성경에서 성모님의 말씀은 총 6번 나오는데 이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하느님이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이 말씀만이 우리에게 하신 영적 유언이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우리한테는 양식이 떨어졌고, 건강이 떨어졌고, 시간이 떨어졌고, 삶의 에너지가 떨어졌고, 활력이 떨어졌다. 우리가 성모님의 유언대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 그대로 믿고 따른다면 우리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뀔 것이다. 한편 성모님의 이 유언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는 영광스런 변모 때 성부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해준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이시다. 성모님의 기도는 어떤 성인의 기도보다 더 힘이 있다. 다만 중재자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인간 사아의 중재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의미에서이다.
*여섯 항아리(2,6): 7은 완전수이지만 6은 불완전수의 극치를 의미한다. 정결 예식에 사용한 항아리가 여섯 개라는 것은 유다교 의례가 가져다주는 빈 효과를 가리킨다. 한편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율법 시대에서 복음 시대로 넘어감을 상징한다. 또 새 포도주가 오래된 포도주보다 맛있다는 것은 유다교보다 그리스도교가 더 우월하다는 말이다.
*한동이(메트레테스)는 약 40리터이다. 그러므로 총 480에서 720리터가 된다. 오늘날 포도주 병으로 무려 600병이다. 최상품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
*과방장: 하인들이나 일꾼들을 지휘하여 잔치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게 하는 책임을 맡은 매니저 일꾼.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2,10): 잔치 주관자 입장에서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어놓아 하객들을 흥겹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체면을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신랑이 최상품 포도주를 뒤늦게 내놓은 것을 보고 하객들은 놀라는데, 이는 인간 세상의 혼인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이 베푸시는 하늘나라 잔치에서는 최상품의 포도주가 마지막에 나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세상 종말 잔치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7. 성전 정화
*예수는 해방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다. 그러나 그의 의노는 성전에서 시작된다. 성전 ‘이방인 마당’에서는 여러 장사꾼과 환전상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순례자들이 성전에 바칠 제물과 성전세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 남자는 매년 성전세를 이스라엘 은화 반 세겔(=고대 시리아 화폐)로만 지불해야 했는데, 시중에서는 로마 제국 화폐만 사용했으므로 성전에서는 환전상이 필요했다. 이 과정 속에서 상인들은 폭리를 취했고, 이들의 뒤를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인들이 봐 줌으로써 종교를 가장한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공관 복음서는 비둘기를 언급하지만 소와 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밧줄로 만든 채찍으로 상인들을 쫓아내는 장면도 없다. 이는 요한 특유의 편집 부분이다. 성전 상점은 키드론 골짜기 혹은 올리브 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사제 카야파가 연 것이라 한다.
*2,16: “내 아버지의 집”(루카 2,49)이라는 표현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 정화함을 시사한다.
*2,17: 성전 정화 사건을 제자들은 시편 69,10의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했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즉, 제자들은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이 위험한 결과, 곧 죽음을 초래할 것으로 이해했다.
*2,20-23: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경부터 성전 신축 공사를 시작했으니, 46년 뒤라면 27/28년경, 곧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수는 자기 몸이 곧 성전임을 밝힘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예수의 몸이 성전,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 후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장소요(1,14),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 성전이다.(7,37-39; 19,34)
*사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2.23-25): 외적인 표징만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할 표징을 제대로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상태의 믿음이다. 이적을 보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열광은 아직 사람이 되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하고서 자기에게로 보여든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으신다. 또 신앙이란 한 번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여정이라는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한편 예수의 관통력은 구약의 하느님처럼 인간의 마음까지 아는 신적 지식을 갖춘 그분의 메시아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