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 제3주일)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
오늘 복음은 지난주 복음과 매우 비슷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인사하시며 의심하는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이제는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시며 유령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간임을 증명하십니다. 이즈음 되면 아둔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나무라실 만도 한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시고, 더 나아가서 복음 선포의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이 대목에서 왜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관대하다 못해 복음 선포의 특별한 사명까지 맡기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주 복음인 의심하는 토마스 사도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토마스는 제자들 무리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을 유일하게 목격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승의 상처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지요. 지난주 강론 때 말했던 것처럼 토마스라는 이름의 뜻은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토마스 사도의 실제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별칭으로 쌍둥이라고 부를 뿐이지요. 그렇다면 토마스 사도의 쌍둥이는 대체 누구일까요? 그것 역시도 성경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어쩌면 토마스를 닮은 또 다른 쌍둥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신앙의 진리를 의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요한 복음이 쓰여질 당시 초대 교회의 신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못 본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부활을 의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신 것처럼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현상을 뛰어넘는 신앙이 요구됩니다. 아무튼 토마스 사도가 의심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성을 가지고 끝까지 의심해 보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사실 의심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관심이 더 나쁜 것이지요. 의심한다는 것 자체는 신앙의 내용을 이성의 빛으로 최대한 비추어 본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의심은 맹목적인 불신이나 무신론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칫 기복주의나 광신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안수빨)
그렇다고 모든 신앙을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앙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든 교리이든 이성적 영역을 초월하는 신비가 있습니다. 이는 이성적 노력의 끝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정확히 그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추어 희미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보지 않고도 주님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으로 밝히는 수 없는 부분이지요. 주님의 부활도 그렇고 삼위일체 신비도 그렇습니다.
자, 이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일상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체험하도록 합시다.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이란 물고기 한 토막을 먹는 일상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미사란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식사하며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전례 행위가 아닙니까? 아주 평범한 우리들의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또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분명히 서 계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첫 성경 공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님 현존을 체험합니다.
여러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언제 어디서 만나십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일상 안에서 기뻐하라고 주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기뻐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왜 꼭 그분을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 만나시려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가 있겠다던 갈릴래아가 어디입니까? 지리상의 갈릴래아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바로 우리네 삶의 현장이 바로 갈릴래야입니다. 주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시려고 부활하셨는데, 왜 우리는 특별한 곳에 가야만 그분을 더 뜨겁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여러 차례를 갔다 온들 지금의 내 모습이 부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잠시 내가 만나야 할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여전히 주님 오상의 흔적이 가리키는 우리네 삶의 애환 속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와 나누는 삶의 기쁨 속에 항상 주님께서 계시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