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을 믿는다는 것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삼위일체 교리도 없고, 사심판과 공심판 교리도 없으며, 우리 신앙 자체도 부정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종교를 만들기 위해 추종자들이 상상해낸 조작된 허구이거나 그분의 정신적 승리를 기리기 위한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리는 그분의 부활을 육신까지도 포함한 부활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십니까? 아마도 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부활을 증언합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령처럼 영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도 함께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승천하셔서 더 이상 우리 시야에서 볼 수 없을 때까지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고 성경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빈 무덤 이야기인데요. 아무도 주님의 부활 과정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무조건적인 믿음이 요구되는 무덤만이 하나의 징표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의심스러운 것은 빈 무덤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라는 대목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염습을 하고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히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시신을 몰약으로 방부처리를 하고, 수건과 아마포를 붕대처럼 징징 감습니다. 마치 이집트 미라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마치 나비가 번데기에서 허물을 벗고 나오듯이 수건과 아마포만 남겨 두고 쏙 빠져나왔다는 말인데요. 그렇다면 그 육신은 알몸으로 무덤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제자들과 재회했을 때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였는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의 의복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에게 나타나실 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도 때도 없이 발현하시며, 사도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나타나실 때에는 문이 지나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유령처럼 벽을 통과해서 방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때로는 필요하면 인간의 육신처럼 먹고 마시지만 때로는 시공을 넘나드시는 초월적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시고,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그분의 본성과도 일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시적인 현상에 집착하여 목격자의 알리바이를 재구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은 믿음을 요구하는 신비입니다. 부활 과정을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 차원에서 체험한 제자들의 증언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한때 스승을 배신했던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용기 없고 비천한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낙향하던 길에서 되돌아와 부활의 증인이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도 순교를 불사하고 이역만리 선교에 목숨 바치는 사도가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의 진위여부는 추종자들이 맺은 삶의 열매가 증명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그리 아끼던 그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스승의 길을 따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를 쓴 사도 바오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악독하게 박해하던 그가 왜 부와 명예를 버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거꾸로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확실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과학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가시적 현상에 집착하여 부활의 메시지를 놓쳐 버린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리석은 제자들은 어제 성야 미사에서 선포되었던 빈 무덤에서 천사가 여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갈릴래아는 우리네 삶의 현장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슬퍼하고 있는 어떤 형제의 상심 속에서 위로와 힘을 주시는 주님을 체험합니다.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당하고 사기까지 당한 어떤 자매의 분노와 상처 속에서 용서와 자비의 주님을 체험합니다. 가정불화와 경제적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고 신음하고 있는 이름 모를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화해와 축복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체험합니다. 육신이 병들어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는 병자와 임종자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평화와 용기를 주시는 주님을 체험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경험했던 슬픔, 두려움, 상처, 외로움, 고통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의 것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 대축일은 하나의 전례 이벤트가 아닙니다. 부활 대축일을 계기로 작은 부활절, 곧 주일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을 시작과 마침으로 해서 매주간 평일 미사가 봉헌됩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부활 시기 동안 매일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분은 말씀과 성체 속에 현존해 계십니다. 이 신비를 깨닫는 사람은 이미 부활을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 이제 슬픔과 두려움을 걷어내고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만나러 갈릴래아로 갑시다. 일상 안에서 우리는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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