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주님 수난 성금요일)

 

삶의 현장에서의 십자가 경배

 

오늘 요한이 전한 수난기에서 주님의 육체적 수난의 기록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빌라도는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우리는 수난기를 귀로 듣고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본다면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신앙생활을 관념과 생각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의 순간순간을 세상 구원을 위한 간절한 몸 기도로 봉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수난기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모습의 주님,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모든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주님,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모든 고통을 참아 받아내시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의 주옥같은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로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수난 예고대로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파스카 축제일에 십자가가 합당하지 않다며 치워 버리기를 원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로 세상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주님은 죽어가면서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십니다. 그저 외아들을 잃은 성모님의 봉양을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훗날 사도들의 모후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우리를 위해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양떼인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목이 마르시다고 하십니다. 생명의 물을 주시는 그분께서 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저 심한 고문으로 인해 몸에 수분이 다 빠져나가 극도의 갈증을 느껴서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시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분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도 온 마음으로 그분께 극진한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 온 힘을 다해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다 이루어졌다.”는 말 안에는 다 소진되었다’(Cosummatum est!)라는 뜻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사랑을 다 쏟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부의 뜻은 비정해 보이지만 성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 수난 예식에서 사제는 십자가를 높이 받쳐 들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우리도 오늘 저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매달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속죄와 희생이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여 이 예식을 편하게 성전에서 행하고 있지만 사실 그 사건의 현장은 성전이 아니라 골고타, 즉 해골터 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수난 예식은 전례적 상징일 뿐 실제 십자가 경배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 주님의 십자가를 경배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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