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강론)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의 표징
가끔 하느님 아버지의 이미지를 본가에 계신 제 아버지를 통해서도 떠올리곤 합니다. 과연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실까요? 하느님을 정의할 수 있는 말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독서와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성실하심입니다. 성실하다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말입니다. 가령 ‘성실한 학생’이라는 말은 ‘결석하지 않고 학업에 꾸준한 학생’을 말합니다. 또 검찰청에 출두하면서 피의자들이 의례하는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는 말은 ‘거짓됨이 없이 충실히 조사를 받겠습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성실하다’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는 히브리 말로 베리트, 즉 계약과 관련된 말인데, 이는 제물을 ‘자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징표로 번제로 바칠 짐승을 반으로 갈라 서로 마주 보게 합니다. 이는 고대 중동 지역에서 성행하던 쌍무 계약의 표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계약의 의무를 다하되, 만일 한 쪽이 배신하면 그 사람은 반으로 갈라진 번제물처럼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계약은 목숨을 담보로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은 무엇일까요? 서로에게 성실하여 배신하지 않겠다는 계약입니다. 그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시고, 인간은 하느님을 한마음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이 쌍무 계약은 단 한 번도 이행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느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약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약속이고 선언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계약을 설명했을까요? 계약은 곧 성실함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맺은 계약에 항상 성실했지만 인간은 늘 그 계약을 파기했으며 하느님께 불성실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 역대기 하권은 예루살렘 패망과 유배, 그리고 해방과 복귀를 다루고 있습니다. 계약에 불성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벌을 받고 유배를 떠나지만, 계약에 성실한 하느님은 그 백성들을 다시 해방시키시고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도 계약에 성실한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이 말씀을 새기십시오. 신·구약 성경의 모든 구원 메시지가 이 말씀 안에서 집약됩니다. 배은망덕한 인간에게 아쉬울 게 전혀 없는 하느님께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어주셨다는 말은 십자가 희생 제사를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의 성실함은 이렇게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는 때가 차가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계약을 이행하시려고 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다시 말해 당신 외아들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리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죄인은 사필귀정으로 멸망하게 되어 있는데, 하느님은 그런 죄인들을 살리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부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입니다. 이 점을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은총은 라틴어로 gratia라고 하는데, 이는 공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다시 말해 천부당만부당 공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구원된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사순 제4주일을 다른 말로 장미주일, 레따레(laetare: 즐거워하여라) 주일이라고 합니다. 사순시기의 엄중한 재계로 지친 신자들이 부활을 기쁨을 미리 맛보기 위해 생긴 주일입니다. 이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참고 내적 기쁨을 간직하자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본연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받았고, 그것을 믿는 모든 이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으니 기쁘다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하느님만이 성실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변절자인 우리와 달리 당신이 맺으신 계약에 변함없이 성실하십니다. 그 성실함으로 인해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공짜로 그 선물을 받았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지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은총도 다 공짜입니다. 비록 죄가 많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자비와 용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공로 때문에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 안에 주님께서 계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 안에 주님께서 머무십니다. 인간적인 잘잘못을 떠나 조건 없이 주님께서는 사랑의 현존으로 계십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보면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