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성경공부 제3강의: 성조들에게 나타난 하느님

 

1.아브라함의 하느님

1) 부르심과 떠남(창세 11,27-12,9)

*칼데아의 우르(11,28): 칼데아는 칼데아 사람들이 다스렸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오늘날의 이라크, 인도양에 근접한 페르시아만 유역)을 가리킨다. 우르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으로 손꼽히는 수메르 문명을 꽃피운 수메르 왕국의 수도이다. 최초의 도시국가, 왕정제, 문자, 법전제정, 학교교육, 바퀴가 달린 전차, 맥주 생산 등. 그들은 측량술·기하학 등 건축법을 발전시켜 기원전 4100년경 우르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를 위한 신전, 즉 지구라트(11장 바벨탑 이야기의 모티브)를 만들었을 만큼 찬란한 도시 문명을 꽃피웠다.

*Tip: 칼데아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등장한 때는 대략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된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유명한 지도자 므로닥 발아단 2세가 바빌론 임금을 자칭하며 세력을 키웠고, 마침내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웠다. 따라서 칼테아의 우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 시대와 상당히 시간이 먼 시대착오적 표현이다. 아마도 이 이름은 유다인들에게 멸망과 바빌론 유배라는 처참한 기억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테라가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것은 후대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하는 맥락과 일치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르를 떠나다(11,31): 왜 정착민에서 떠돌이가 되었을까? 테라의 막내아들 하란은 관례를 깨고 두 형들보다 먼저 장가들어 롯을 낳아 집안의 수치가 되었고, 게다가 갑자기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더 큰 불효를 한다. 이에 테라는 서둘러 남은 두 아들, 아브람과 나호르를 같은 날 결혼시켜 버린다. 그러나 맏며느리에게도 후사가 없는 실정이고, 당시 우르는 식량 부족과 외세 침략으로 쇠퇴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더 이상 미래와 안정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신앙적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

*하란에 주저앉음(11,31-32): 왜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직통하지 않고 하란을 통해 우회했는가? 그것은 가나안이 그의 최종 목적지란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히브 11,8)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야 그게 최종 목적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가나안을 향해 길을 나섰다는 말은 후대에 독자를 위해 삽입된 것이다. 하란은 지금의 터키 땅으로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 근처이다. 하란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비옥한 초승달 곡창지대로써 터키어로 금빛 이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테라가 수메르 문명의 마지막 도시라 할 수 있는 하란에 주저앉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순례 여정도 중단된다. 또 이곳은 범신론적 종교가 범람하고 있는 다신교의 도시이다.

*하란에서의 부르심: 본문은 테라가 죽고 난 다음 아브라함이 75세에 두 번째 부르심을 받았다고 되어 있지만(12,4)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당시 테라는 145세이다. 그러나 테라는 70살에 아브라함을 낳고 205살에 하란에서 죽는다. 이러한 모순은 설화자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테라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려 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하란에 안주한 테라의 죽음을 영적인 죽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르심(12,7): 계속해서 부르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부각된다. 요나도 베드로도 두 번째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있었다. ‘떠나라.’, ‘가거라.’ 4 천 년 전 고향과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행위였다. 하느님은 가나안이라는 목적지를 알려 주시지 않는다. 이에 아브라함은 어디로, 어떻게, 얼마 동안이나등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비록 방랑자였지만 하느님의 명령에 철저히 의존하여 방랑하는 것이었기에 목적이 없는 방황이라 아니라 순례였다.

*믿음이란 우리의 온 존재를 그분께 내맡기는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어디로 인도되는지 모르지만,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기에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복의 약속(12, 2-3): 하느님이 다섯 번이라 축복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아브라함이 부름 받기 전에 있었던 다섯 번의 저주(, 카인, 노아의 아들, 가나안, )와 대비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면서 이 세상에 저주가 들어왔지만, 이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 세상을 축복을 역사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은 기복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가 되어 하느님의 복이 주변으로, 온 땅으로 펴져 나간다.

*아브람의 떠남(12,4-5): 여기서 즉시라는 의미는 바로란 의미도 있지만 기꺼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우리는 게으름, 나태, 속물적 가치관, 무질서한 애착, 타성이라는 하란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브람의 떠남은 이집트에서의 떠남바빌론 유배에서의 떠남으로 이어지면서, 주님께 끊임없이 향하는 회개의 삶으로, 생명과 자유의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순례 여정의 출발점이 된다.

*아브람의 나이(12,4): 75세는 요즘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수명이다. 이를 감안하면 아브람의 나이는 지금의 30대이다. 성경은 역사서나 연대기가 아니다.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89세가 되기 전까지는 그녀가 늙었다거나 폐경이 되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여성들이 평균 49세에 폐경하니 분명 사라의 나이는 오늘날 방식으로 계산할 수 없다. 또 테라의 족보를 보면 조상들의 수명이 엄청 길다. 이를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나 아마도 설화자는 아담 범죄 이후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수명이 짧아진다는 신학적 표현을 한 것 같다. 셈 족보를 잘 보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수명이 점점 단축되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죄의 결과이다.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12,5):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란에서 영혼의 눈을 뜨게 하여 유일신 하느님을 믿게 만들어 개종시킨 사람들이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12,7): 왜 먼 훗날 이루어질 약속을 지금 아브라함에게 주시는가? 아브라함의 사명이 파종하는 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장소가 아니고, 천국만이 본향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2) 약한 믿음과 두려움(창세 12,10-13,18)

*“하느님은 준비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람을 준비시킨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12,10):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심각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하느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기근이 들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지역이 아닌 약속의 땅 가나안에만 심한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그 땅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 훈련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란 암시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간 근본 이유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쉽게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놓치게 된다. 결국 두려움이 하느님과의 단절을 초래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내려가는 선택을 하게 되고, 이집트로 내려가면서 아내에게 거짓말을 할 것을 부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사라가 파라오의 궁궐에 들어가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7죄종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떤 신자가 두려워한다고 해서 교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적도 없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다른 어떤 말씀 보다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렇게 자주 하셨는가? 365. 그것은 두려움이야말로 하느님이 명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오트버그

*과연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12,14): 사라는 단순한 미인이 아니라 절세미인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파라오에게 최고의 진상품을 상납하듯이 보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파라오의 궁전으로 불려갔다.(12,15): ‘그 여자사라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후궁 중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또 파라오로부터 받은 선물은 혼수예물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호의성 대가이다.

*첫 번째 시험에 실패한 아브라함은 재물을 얻는다. 하란에서 자기 몫의 재물을 축적한 것이다. 또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두 번째 시험 실패이다. 여기서도 많은 재물을 축적한다. 불의를 통해 축적된 재산 때문에 아브라함이 지불한 또 다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조카 롯과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소중한 관계 속의 소원함이다. 하가르는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파라오한테서 받은 여종 들중 하나다. 이 하가르가 임신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갈등이 고조된다.

*하느님의 개입(12,17): 여기서 재앙은 모세가 다른 파라오 앞에서 행했던 열 가지 재앙과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개입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수많은 구원 행위 중 첫 번째로 본다. 파라오는 더 큰 재앙이 두려워 아브라함에게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죄를 지어도 그 순간에 하느님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위기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결국 개입하신다.

*이상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느님의 인격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했다. 설화자는 선조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우지 않고 보존한다. , 선조 개인의 행위를 통해 모든 신앙인 안에 있는 약함과 두려움을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그분은 우리 잘잘못에도 불구하고 동행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

*네겝으로 올라갔다. (13,1): 네겝은 가뭄 앞에서 굶어 죽는 것이 두려워 이집트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장소이다. 네겝을 지난 다음 그는 베텔과 아이 사이에 있는 산악 들판으로 올라간다. 여기는 그가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처음 제단을 바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했던 장소다. 아브라함은 이 장소로 다시 가서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면서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한다.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갈등(13, 2.5-8): 가나안 땅은 척박한 곳이다. 파라오의 준 재산이 화근이 되었다. 결국 땅과 재산 때문에 싸우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나안족과 프리즈족, 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가족 간에 물질 문제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유일신 하느님을 증거할 영적 권위를 잃는다.

*일치를 위한 아브라함의 제안(13,8-9):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그리고 롯의 보호자였던 아브라함은 롯을 상속자로 간주해 제안한다. 그러나 롯은 가나안의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요르단 강 건너편 들판을 택한다.

*탐나는 요르단 평야(13, 10): 롯은 이집트의 화려함과 사치, 감각적 도시 생활을 체험했던 사람이다. 그는 요르단 평야로 나아갔을 때 대뜸 소돔 근처 성읍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유목민이면서도 이집트의 도시 생활을 그리워했다. 또 주님의 동산, 즉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고 타락으로 빠뜨렸듯이 요르단 평야도 롯을 그리할 것이다. 롯은 순례의 삶에서 사치와 환락의 정착 생활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의 하느님한테서도 떨어져 나갔다. 우리도 돈이나 성공을 인간관계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를 하느님과의 교제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서 가나안 땅이 아닌 요르단 평야를 수시로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롯이 떠나자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느님(13, 14-17): ‘부디 눈을 들어, 일어나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힘을 북돋워 주고자 했음을 드러내는 말. 축 처져 있는 아브라함. 의 떠남은 정신적·영적 결별로 충격이 컸을 터, 훗날 자신을 대신해 가문을 이끌고 가고 또 늙었을 때 자신을 돌보아 줄 상속자로 여긴 조카였기 때문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감(13, 18): 헤브론으로 장소를 옮긴 다음 그곳 마므레의 참나무 아래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는다. 이제 무력함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맡긴다는 신앙 행위이다.

 

3) 믿음과 피의 계약(창세 15, 1-17, 27)

*이런 일들이 있은 뒤(15,1): 14장의 사건들. 곧 동방 왕들에게 끌려간 조카 롯을 구해 오고, 소돔 왕으로부터 어떤 전리품도 챙기지 않았으며, 멜키체덱(정의의 임금)에게 십일조를 바친 일들. 특히 십일조를 예루살렘 대사제에게 종교세처럼 바치게 된 것은 바빌론 유배 이후의 일이다. 가나안 사제(엘 엘룐: 지존하신 하느님 섬김)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후대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과 사제직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예루살렘 임금에게 속해야 할 근거 제시. 특히 페르시아 시대 이후 예루살렘의 대사제가 임금처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마련. 히브리서 7장에서 멜키체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제상의 예표. 소돔 왕 전리품에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승전의 참된 주인공이라는 믿음의 표현.

*주님의 말씀이 아브함에게 내렸다.: 이 표현은 아브라함을 예언자로 묘사한 것임.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시간은 어둔 밤, 곧 적들의 보복, 상속자의 부재의 암담한 상황, 그러나 하느님은 방패가 되어주시고 그에게 큰 상을 내리실 것임.(15,1)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부디 하늘을 쳐다보아라.(15,4): 우르의 신과는 다른 자식을 돌보는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하느님. 아브라함은 인격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한다. 어둔 밤 속의 빛나는 수 많은 별들은 따뜻한 위안이 되는 하느님의 음성.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15,6): 믿음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무엇인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를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믿을 때,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되는 것이다.(비교 로마 3,28)

*나는 주님이다.(15,7): 그래,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의 후손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그런 주님이라고 외침.

*사랑의 증표, 피의 계약(15,9-12): 계약을 맺다. 카라트 버리트. 계약을 잘랐다. 고대 쌍무 계약의 흔적. 그러나 일방적 계약. 하느님 홀로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간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잠들게 한다. 이는 하느님 독박이다. 나약한 인간들이 충실히 계약 의무를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느님의 배려.

*아브라함 후손들의 운명(15,13-16): 남의 나라는 이집트,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다 차야 한다는 표현은 가나안 원주민을 칠 때 그 근거가 된다. 거룩한 전쟁은 침략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 정의의 징벌행위이다.

*16장 사라이와 하가르 이야기: 고대 근동지역에서 석녀는 수치 이상의 저주와 징벌의 대상이었다. 사라이의 불순종. 메소포타미아의 풍습에 따라 대리모. 하느님 계획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 신앙적 행동 아님. 아브라함도 하느님 계획에서 벗어나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가 준 여자를 받아들임. 16,2;3,17, 16,3;3,6 사라이가 하가르를 가져다(라카)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었다.(나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라카)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었다.(나탄)

*사라이와 하가르의 갈등(16,4): 육적인 것은 결국 육적 열매를 걷는다. 하가르의 교만-사라이의 분노-아브라함 원망-아브라함 회피-하가르 도망.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16,3): ‘아내라는 말은 둘째 부인또는

*업신여겼다는 표현은 낮춰 보았다로도 번역된다.

*사라이의 원망: 나는 당신 때문에 고향을 떠났어요. 당신 때문에 아버지도 떠났고 모두 이들을 뒤로하고 떠났어요. 그런데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이에요? 이 낯선 땅에서 당신이 아니면 내가 도대체 누구를 의지해 살 수 있단 말이에요? 나는 당신을 따라 이집트까지 갔고, 그곳에서는 당신에게 어떠한 피해가 오지 않도록 당신의 아내가 아닌 척까지 했지요. 내가 몸종 하가르를 당신에게 보냈던 것은 오직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주면 내 아들이 될 것이니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했길래 지금 저 여종이 당신 보는 앞에서 나를 무시하나요? 도대체 누가 그르고 옳은지는 하느님이 판단할 거예요. 하느님이 나의 억울함을 헤아려 줄 거예요.-미드라쉬

*제 주인을 업신였다.:하가르가 임신한 뒤에도 아브라함과 계속 잠자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 대리모 이상으로 여주인 행세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침대 배분의 권리는 정실부인에게 있었다. 따라서 사라이의 분개는 단순히 질투에서 온 것이 아니다. 정실부인으로서의 권리가 침범당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 아브라함에 대한 원망이자 분개이다.

*책임회피로 일관한 아브라함(16,6): 당신이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골치 아픈 상황에 대해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 아브라함은 변명도 설득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례에 따라 주인마님 대신 아이를 낳아줌으로써 첩으로 승격된 이전의 몸종이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건방을 떨면, 주인마님은 그녀를 이전의 여종 상태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란 말을 한다. 이 말은 사라가 하가르를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말이다. ‘그리하여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니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하가르의 도망(16,6-8): 수르-광야-이집트. 하가르의 고향. 그러나 목적지가 아님.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름. 자신도 모르게 가장 익숙한 그곳으로 가고 있음. 광야는 생존율 낮음. 처음으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하가르를 물건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이름을 부름.

*이스마엘(16,11-12): 주님의 천사가 수많은 후손의 어머니 만들어 주겠다 약속해도 하지 않다가 뱃속의 아기가 아들이란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바뀐다. 이스마엘은 하느님이 귀를 기울여 들어주신다.’ 또는 하느님이 주목하신다.’의 의미.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16,13): 하느님=엘 로이, 오랫동안 부모, 형제, 친지를 떠나 낮선 땅에서 종의 신분으로 고통 당하며 살아온 이방인 여자. 그러나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한 그녀는 하느님께 이름을 지어 불렀다.

*브에르 라하이 로이(16,14): ‘나를 바라다보신 분, 살아 계신 분에게 속한 우물이라는 뜻. 하가르의 신앙 태도. 신약의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요한 4). 공통점: 샘터에서 하느님 말씀 들음. 이방인 여성. 상처받고 절망 속에서 종살이. 주님이 먼저 다가가심, 주님을 만나서 희망 찾음.

*아브라함의 아들(16,15-16): 태어난 아기를 이스마엘이라고 부른 사람은 사라이가 아니라 아브라함. 보통 몸종이 낳은 자식의 이름을 여주인이 직접 지어 부름(레아와 라헬의 경우). 그러나 사라이의 경우는 다름. 자기 자식임을 인정하지 않고 상속자로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

(그리고 13년이라는 침묵의 세월이 흐름, 과연 이제 어떤 일이 펼쳐질까?)

 

4) 개명과 하느님 백성의 시작(17,1-27)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17,1): 이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에게 정신이 팔려 보낸 세월을 상징한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육의 시간에서 13년을 보냈다. 그러나 13년이 지나 이스마엘의 합법적으로 상속자가 될 나이가 되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약속된 아들 이사악의 탄생을 예고한다.

*흠 없는 이가 되어라(17,1): ‘흠 없는(타밈)’ 이라는 말을 윤리적, 도적적 완벽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나눠지지 않고 진실하고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의 개명(17,5): 아브람은 존귀하신 아버지’(개인) 혹은 아람의 아버지’(종족)에서 신적 사명을 띤 새 이름 아브라함 즉,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다.

*할례와 계약(17,10-14): 8일 할례는 아기가 안식일과 함께한 주간을 무사히 보낸 다음 새롭게 맞이하는 주간의 첫날에 할례를 받도록 하기 위함. 8일은 이렛날에 완성된 창조 행위를 새롭게 구현해가는 삶의 시작. 다른 민족들도 할례를 하지만 그 동기가 다르다. 그들은 일종의 성인식이지만 유대인에게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징이다. 곧 몸에 새긴 하느님 백성의 낙인이다. 희생 제물을 반으로 갈랐다면 이제 자기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할례를 통해 쌍방 계약을 맺는 것이다. 할례를 통하여 몸에 영원한 계약을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면서 계약을 늘 기억하게 하는 장치로 삼았다. 한편 후대로 가면서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몸에 그치지 않고 마음도 포함되며(신명 10,16;30,6; 예레 4,4;9,24), 영적인 할례 및 그리스도의 할례로 변화된다.(필리 3,3;콜로 2,11-13)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새 백성, 즉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사라이의 개명(17,15-16): 사라이는 공주’, 사라는 왕비란 뜻이다. 사라이가 사라로 바뀐 것은 한 족장의 어머니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 나아가 모든 민족의 어머니가 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에 사라만이 하느님께 이름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웃음(17,17): 불신의 웃음이 곧 아기의 이름이 될 것이다. 이사악을 부르면서 아들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쁨과 함께 과거 불신의 웃음을 떠올리고 반성할 것이다. 하느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재차 당신의 약속을 말씀하신다.

 

5) 아브라함과 나그네 환대(18,1-15)

*한창 더운 대낮에(18,1): 아브라함은 또 한 번 하느님의 시험에 든다. 사람으로 둔갑하여 그의 믿음을 떠본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100살 노인이 시중을 든다는 것은 굉장한 환대이다.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18,2): 나그네 세 명 중 한 명은 주님이시고 나머지 두 명은 시중드는 천사이다.(19,1 참조)

*‘이 종’, ‘나리’, ‘부디’: 한번도 본적 없는 나그네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보여준다.

*‘빵도 조금’(18,5): 부담 갖지 말고 받아달라는 표현.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18,6): 급하게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부탁. 그것도 한낮에 불판 앞에 앉아 빵을 굽는 것 쉬운 일 아니다. 세 스아는 열두 되의 많은 양. ?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18,7): 최상급 동물성 메뉴를 내어놓고, 빵은 가면서 비상 식량으로 드시라는 얘기. 섬세한 배려. 송아지 고기는 왕과 같은 V.I.P에게 해당.

*아브람은 즉각적이고 친절하게 직접 종으로 봉사했다. 왜 그랬을까? 동변상련. 자신의 나그네 경험을 통해 연민할 줄 알았다. 하느님을 모신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의 최후 심판 대목하고도 연결된다.(마태 25, 31-46) 또 히브리서 132절을 참조하라.

*사라의 잉태 예고(18,9-10): 천사는 사라이가 아니라 사라라고 불렀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신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낡아버린 나에게(18,10-12): 사라가 노인임을 강조하면서 특히 폐경이 지났음을 언급한다. ‘낡아버린’(발라)이라는 말은 보통 옷이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 없을 때 쓰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소리 내어 불신의 웃음을 지었고, 사라는 자신의 낡은 몸을 보면서 서러움 속에서 허탈한 웃음을 속으로 지었다. 이제 하가르의 아들 이스마엘이 성인식을 치루게 되면 여주인으로서의 지위도 사라에게는 사라질 것이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18,15): 다그치는 말씀이 아니라 사라를 깨우치기 위한 말씀.

 

6) 중재자 아브라함(18,16-19,38)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18,17): 하느님과 친구 사이. 의견을 물으심.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18,18): 아브라함의 존재를 부각시킴. 그는 간절한 중재를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 곧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18,25): 두 번이나 강조함. 그만큼 파멸 방지를 위한 그의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보여줌. 비단 롯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 모두를 위한 것. 역시 많은 민족의 아버지다운 면모이다.

*후대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신관 신정론이 들어가 있다. ,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의인을 죽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소수 의인만 있어도 그들 때문에 다수의 죄인도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사 53,5.10;예레 5,1 참조) 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루카 23,34)

*하느님의 공정(18,25): 하느님의 정의는 권선징악의 정의가 아니라 자비이다. 50> 45> 40> 30> 20 >10. 열 명은 당시 소돔 인구의 1/1000이다. 숫자로 비교할 수 없는 비대칭이지만 하느님은 극소수를 봐서라도 용서하시려 한다.

*왜 아브라함은 6번째 청에서 멈추었을까? 완성수 7은 하느님의 몫이다. 63×2이다. 3은 완성수이라고 이를 두 번 곱했으니 아브라함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10명은 방주에 들어간 가족의 수 8에 가까운 수이고, 그나마 의로운 이들에 포함되는 롯과 그의 가족은 모두 10명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중재 사건에 근거하여 회당을 세우려면 최소 10명이 있어야 하고, 합법적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치르려면 최소한 10명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야훼란 단어만 사용된다. 라삐 전승에 따르면 야훼는 하느님 자비를 강조하고, 엘로힘은 하느님 정의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단죄하고 벌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드러낸다.

*소돔의 타락(19,1-11): 소도미=남색, 수간. 두 나그네를 겁간하려는 소돔인들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의를 상징한다.

*롯의 구출과 소돔의 멸망(19,12-29): 롯의 의로움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어 구출. 아브라함을 통한 구원. 물질문명과 향락 문화에 대한 경고 메시지. 실제 지진으로 인한 파괴 가능성.

*모압족과 암몬족의 기원(19,30-38): 롯과 두 딸은 소돔에서 구원된 유일한 사람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근친상간. 장녀의 아들인 모압(-아비: 나의 아버지에게서)과 차녀의 아들인 암몬(-암미: 내 아버지의 아들). 요르단 동편에 자리 잡은 모압족과 암몬족은 왕정 시기 내내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복을 나누어 받은 세상 종족의 하나로 소개된다. 특히 다윗 가문과 연계하여 그들은 특별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모압인 룻은 이스라엘 사람과 혼인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의 족보에 들게 된다.(마태 1,5) 솔로몬 임금의 부인인 암몬 여자 나아마는 르하브암을 낳아 다윗 왕가를 잇는다. (1열왕 14, 21) 근친상간은 부득이하게 대를 잇기 위해 예외적인 경우이다.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아내 타마르는 남편이 죽자 대를 잇기 위해 시아버지와 동침한다. 이 또한 예수 족보에 나온다.

 

7) 아브라함과 아비멜렉(20,1-18)

*어째서 이런 일을: 카데스와 수르 사이는 오늘날의 가자 지구. 그라그 땅(필리스티아).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사건은 이집트 사건(12,10-20)에도 나옴.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술. 이집트 사건은 야훼계, 그라그 땅에서의 사건은 엘로힘계.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예언자라고 하는데 이를 증명해 줌.

 

8) 이사악과 이스마엘(21,1-21)

*하란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사악을 낳다. 웃음을 주셨구나. 코웃음, 허탈 웃음을 정말 기쁨으로 바꿔주신 하느님.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21,8):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대에 아기가 3년을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은 부모와 가족에게 큰 기쁨.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21,9): 당시 이스마엘은 대략 17세이고 이사악은 3. ‘놀다는 조롱하다, 놀리다, 비웃다, 흉내 내다 등의 뜻이 있다.

*추방(21, 10) ?: 이스마엘이 마치 아브라함의 정식 상속자이 척 행동했기 때문에.

*함께 상속을 받을 수 없어요(21, 10): 추방하라는 말은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스마엘에게 어떤 상속 권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표현. 결코 그녀는 이스마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사라는 인간적 경쟁심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기초가 되는 집안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당연한 요구이다. 단순히 아들 하나를 낳는 것이 아니라 사라는 하느님이 우르와 하란에서 부르셨을 때 자신이 하느님의 백성을 세우는 신적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라는 이 말을 하고 나서 34년 간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이므로 언짢았다.(21,11):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아들이 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이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21,12-13): 하느님께서 하가르와 이스마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합법적 상속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결코 그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해서가 아니다. 나중에 광야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돌봄을 약속하신다.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21, 14): 일부러 야박하게 그랬다.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이 되어서 냉정하게. 다른 해석: 아브라함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이집트를 향하려는 하가르의 본능을 감지한 그는 풍부한 식량과 교통수단을 가지고 이집트 땅으로 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가르는 아들을 이집트 여인과 결혼시킴으로써 아브라함의 신앙과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다. , 아브라함의 아들로 키우지 않고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21,13): 이 약속에 의지해 이스마엘의 미래를 하느님께 맡긴다. 또 그들이 이 약속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도록 단호한 행동을 한다.

*‘아기아이’(21,17-18): 이스마엘은 열일곱 살짜리 아기로 표현됨. ‘아기로 불릴 때에는 그를 낳아준 생모가 부를 때이고, ‘아이로 불릴 때는 하느님이 부를 때다. 엄마가 보았을 때 이스마엘은 늘 아기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하느님이 돌보아 주시기 전까지는 아기로 부르다가 그 돌봄이 있은 다음부터는 아이로 부른다.

*하가르야 어찌된 일이냐?(21,17) 하가르가 그동안 하느님의 약속을 잊고 살았다. 엘 로이. 그러나 하느님은 그럼에도 그녀을 위로하신다.

*눈을 열어주시니, 그가 샘을 보게 되었다.(21,19): 브에르 세바, 일곱 개의 샘 혹은 맹세의 샘. 아무튼 하느님이 그녀의 눈을 밝혀주자 비로소 그중의 하나를 볼 수 있었다.

 

9) 모리야 산으로 가는 길

*이런 일들이 있은 뒤(22,1): 아브라함이 가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상황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를 시험하고자 함.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22,2): 이사악에 대한 지나친 애착. 하느님과의 관계 소원해 짐. 하느님 자신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생각함. 그리고 아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임을 망각함. 그러므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쳐라.’는 말은 네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쳐라.’는 말.

*만일 이 시험에서 아브라함이 실패했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을 철회하셨을까? 아마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시험을 하셨을 것이다.

*제발...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22,2): ‘제발’, ‘부디에 해당되는 ‘na’가 생략되어 번역. 제발 당신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해 줄 것을 바란다. 그래야 믿음의 계약이 완성되기에.

*가거라’: 하란의 가거라는 과거와의 단절, 지금의 가거라는 미래와의 단절. 하느님은 과거를 돌보아 주시고, 미래도 준비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느님은 과거와 미래의 단절을 통해 현재의 삶에 충실히 순명할 것을 원하신다. “불신앙은 그때 저기를 믿는 것이고, 신앙은 지금 여기를 믿는 것이다.”-토저

*이제 아브라함은 마지막 시험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계적으로 마지막 관문 통과에 대비하도록 아브라함을 성장시키셨다.

*2절과 3절 사이 아브라함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 자기와 상관없는 소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중재 노력을 기울였던 그가 왜 자신의 귀한 아들 앞에서 말이 없는가? 이 침묵은 독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브라함은 번민과 고통에 신음했을 것이다. 이를 독자들이 마음껏 헤아리며 그 고통을 느껴 보라는 뜻.

*장작을 팬 뒤(22,3): 장작이야 하인들 시켜 마련하면 되는데, 그들과 함께 직접 그 일을 했는가? 이는 그의 마음이 어수선하고 뒤죽박죽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너무나 힘겨워 주저하다 보니 마지막까지 출발을 미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장작을 쪼개며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른다. 아들의 마지막 길을 아비로써 직접 준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명령을 받은 다음 날 바로 떠난 것은 사실을 알면 충격으로 죽을 수도 있는 사라를 배려한 행동이다. 아마도 사라가 깨어 물으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여 안심시켰을 것이다. ‘우리 아들이 이미 장성했는데도 아직 하느님 섬기는 법을 제데로 배우지 못했으니 좀 가르쳐 줘야겠소. 제사를 드리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제법 먼 곳이오. 내 이사악을 데리고 갔다 오리다.’-미드라쉬 탄후마

*사흘째 되는 날(22,4):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마음을 준비하고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3일이란 시간을 주셨다. 3일을 걸으면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의문을 가졌을까? 아브라함은 맹목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다. 신앙은 오히려 맹목이 아니라 의심과 의문을 통해 성장한다. 이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모리야 산을 바라본다. 그는 3일 동안 괴로워하고 질문하고 헤아려 보는 가운데 마침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내적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치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내적 반성의 시간을 가졌듯이.

*아브라함의 확신은 마치 마취제 없이 아들을 급히 상처를 꿰매야 하는 아버지의 상황과 같다. 아파도 몸부림쳐도 아버지는 아들의 사지를 꽉 잡고 치료를 감행한다. 아브라함도 선하신 하느님을 믿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바치려 했다. 그 명령을 도저히 감내하기 힘들지만 그 명령을 내리신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었던 것이다. 시선이 아들에게만 있었다면 결국 아들을 구할 수는 있어도 아들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유컨대, 배 멀미를 하면 고개를 바닥이 아니라 먼 바다를 봐야 속이 편해진다. 우리 마음이 산란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기보다 문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이 요동을 쳐도 절망하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이 얼마나 심하게 요동을 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보느냐 안 보느냐다.

*나와 이 아이는...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22,5): 아들을 죽이러 가면서 하느님을 경배하러 간다고 한다. 이는 하인들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것을 참 경배로 받아들였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특히 내 아들이 아니라 이 아이로 표현한 것은 더 이상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쳐 질 제물로 여겼고, 부자간의 정을 뗀 것이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22,6): 굳이 그 많은 장작을 아들에게 지운 것일까? 나귀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나누어 지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아들이 장작더미를 힘들지만 번제가 이뤄질 높은 산 정상, 즉 제단까지 직접 지고 오름으로써 완전한 이사악의 희생제사가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아들아, 너는 내 아들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이 너를 번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신다. 비록 너는 재로 태워지겠지만 하느님은 네 영혼을 살릴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아들답게 죽음을 흔연히 받아들여 다오!’

*아버지, 얘야!(22,7): 원문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아!’ 결연했지만 부정을 어찌 막으랴. 아브라함의 눈물? 마지막은 이 아이가 아니라 내 아들로 불렀다.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얘야, 그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22,7-8):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번제물로 바칠 양, 나의 아들아하느님께서 번제물로 바칠 양은 손수 마련하실 터인데, 그것은 바로 너란다. 나의 아들아!’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21)욥의 고백처럼 하느님을 믿었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과연 이사악이 몰랐을까? 몰랐다하더라도 이사악은 아브라함을 믿고 따랐다. 신앙은 되물림되는 것이니까.

*제단 쌓고-장작을 얹어 놓음-아들을 묶음-장작 위에 올려놓음(22,9): 이사악의 희생제사. 이사악은 추정컨대 12세 청소년이다. 그것도 장작더미를 지고 올라갈 만큼 힘도 세었다. 충분히 아버지가 묶으려 할 때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사악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또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하여 순순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이사악의 희생 제사는 곧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예표이다. 외아들, 지고 올라감, 그러나 이사악은 살고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모리야 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추정.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22,12): 마음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봉헌한 것과 같다. 마음속으로 아브라함은 이미 제물로 바친 것이다.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경외는 두려워함이 아니라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든지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제 내가 알았다는 것은 과거에 몰랐던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칭찬이자 공인이다.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22,13): 속죄양. 고대 가나안 인신공양 풍습 근절. 대속적 죽음은 하느님의 어린양, 즉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시련과 시험은 믿음과 순종을 낳고, 믿음과 순종은 감사와 사랑을 낳는다. 그러므로 제사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제사는 하느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합치되는 자리이다.

*야훼 이레(22,14): 8절은 엘로힘 이레. 뜻은 같으나 모리야 산을 오르면서 막연한 믿음이 이사악 사건을 통해 확고해진다. 이제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공적으로 야훼 이레(야훼께서 보이신다/나타나신다/마련하신다)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제물을 결국 예수님이다. 모리야 산의 제단은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제단의 예표이며, 양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귀향 대열에서 이름이 빠진 이사악(22,19): 의도적인 생략. 시험 전에는 아브라함은 아들을 하느님 보다 더 사랑했다. 그러나 시험 후에는 아들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아들은 더 이상 애착과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계약의 표지인 셈이다.

*그리고 야곱 이야기 전까지 이사악의 언급은 거의 없다. 이는 이사악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이나 모리야 산을 정점으로 믿음의 선조로 우뚝 선다.

우리의 나약한 신앙심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저에게 복은 넘치게 주시고, 화는 최대한 멀리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건강한 신앙심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 잘 되어도 당신 뜻이고, 못 되어도 당신 뜻이옵니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도 당신 뜻이고 죽어도 당신 뜻이옵니다. 그러나 당신의 뜻이 항상 선하고 옳은 것임을 믿기에 그저 순순히 따를 뿐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을 제게 주소서.

하느님 한 분으로 저는 족하나이다.

하느님보다 못한 것을 추구한다면

저는 언제나 목마를 것입니다.

제겐 하느님 당신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리치의 줄리안

 

10) 그 이후 이야기(22,20-25,18)

*레베카의 집안 배경(22,20-24): 나호르의 후손. 삼촌 뻘하고 결혼. 족내혼 성행. 이사악의 아들 야곱도 이 집안하고 결혼한다. 라헬과 레아.

*막펠라 동굴-사라의 죽음과 묘지 구입(23,1-20): 헤브론에서 죽음. 헤브론은 후대 다윗의 첫 수도. 오늘날 동굴 무덤은 헤브론의 거대한 석조 건물 안에 들어 있음. 아브라함이 구입한 막펠라 땅은 약속된 가나안 땅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나 하느님 약속이 실현된 첫걸음이다.

*이사악의 혼인(24,1-67): 야훼계 문헌. 나그네에게 최선을 다해 환대함. 아브라함 가문에 적합. 낙타 10마리 물 먹임. 힘 쎄고 건강함. 친절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여자. 오빠 라반이 접대하고 협의하는 것은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뜻. 28절 어머니의 집 식구. 라반은 물질에 관심이 많은 속물. 50절의 브투엘은 후대 삽입. 58가겠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을 닮았다. 63절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는 원문으로 보면 묵상하기 위하여 혹은 기도하기 위하여. 어머니 사라의 천막은 레베카가 사라의 후계자라는 뜻.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와 응답의 과정은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줌. 그 종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김. 그리스도의 삶이 그러했듯.

*아브라함의 죽음(25,1-18): 난데없이 새 아내 맞아들임. 크투라(크치아:42,14)는 계피 향료를 말하고, 아마도 언급되는 지명으로 보아 아라비아 지방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은 아라비아 남부 일대에 거주하던 아랍족.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사악에게 땅과 재산을 물려주고 축복해준다. 그리고 큰 아들 이스마엘과 이사악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떨어져 지내지만 화목하게 지낸다. 테라의 족보에서 시작해 이스마엘의 족보로 끝을 맺는 아브라함가는 죽음과 불임으로 시작하여 12이라는 꽉 찬 수의 자손(25,13-16)을 두는 복된 집안으로 바뀐다. 또 이스마엘의 자손들 이름에는 개인이나 종족 또는 거주 지역의 이름이 섞여 있다. 홍해 주변 하윌라에서 이집트 국경지대인 수르에 이르는 아라비아 남서부. 대부분 기원전 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아랍족의 이름. 왜 아브라함과 아랍족을 혈연관계로 엮었을까? 하나는 아랍족과 이스라엘이 후대에 비록 적대 관계에 놓였지만 근원적으로는 혈연적 유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 가문이 비단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랍족까지 포괄하는 아주 큰 민족을 이루었음을 나타냄으로써 하느님의 약속(12,3)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냄.

*하란을 떠나서 막펠라 동굴에 안장되기까지 아브라함은 100년 동안 순례의 여정을 한다. 175세라는 믿기지 않는 장수가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꽤 오랫동안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단 기간 내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깨닫지 못한다. 여러 과정과 관문을 거쳐 하느님이 진정 선하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시련도 있고 고통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최대 공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믿음으로 후손들에게 본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구역 역사의 파종을 담당한다. 이제 우리 차례다. 순례를 떠나자. 떠난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다. 어쩌면 떠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야곱의 하느님

*야곱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가장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족장. 우리는 야곱의 인간적 허물과 한계를 지녔음에도 하느님 은총으로 끊임없이 변화 성숙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가진다.

*부모의 편애-애착 관계-이성에 대한 지고한 사랑-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의 과정을 보여준다.

*야곱의 이야기는 가족 수직 관계 아닌 야곱과 에사우, 야곱과 라반, 레아와 라헬 등 수평 관계도 있다.

*아브라함과 반대로 야곱은 가나안-하란-가나안-이집트-가나안 여정. 귀환의 의미는 지리적인 데 그치지 않고 그 땅을 주시며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으로의 회귀이다.

*쌍둥이의 출생(25,19-28): 이사악은 아버지와 달리 주님께 아이를 청하는 중재기도를 올린다. 20년을 기도한 결과 60세에 아이를 얻는다. 이사악, 야곱, 요셉, 사무엘 모두 돌계집 어미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복덩어리이다.

*에사우: ‘살갗이 붉다는 말과 붉은 adomoni’ 지역이란 뜻의 에돔Edom, 또는 을 가리키는 세아르sear와 에돔족의 땅 세이르Seir 산악지대(36,8.9)를 연관시킨다. 즉 에사우는 에돔과 세이르를 합친 말이다.

*야곱은 형의 발뒤꿈치’(아겝)를 잡고 나왔다. ‘속이다. 남을 밀쳐내고 자리를 빼앗다.’라는 뜻의 아캅과 연관. 빛이 없는 어두운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싸울 만큼 숙명적 형제관계.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25,23): 너의 태에는 두 아이가 들어 있다고 하지 않음. , 계약의 하느님 백성과 관련된 표현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는 편애가 아니라 선택이다. 하느님은 에사오를 버리지 않았다.

*장자권이란? 애초 이사악이 장남에게 주려 한 축복은 철저히 배타적인 축복이었다.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장남은 재산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도 독차지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이 에사우오의 발목을 잡고 태어난 것은 장남 중심의 사회에서 차남으로 절대 태어날 수 없다는 집념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성격의 형제들

남성

여성

들사람, 사냥꾼(아버지의 세계)

눈 발달(감각적)

목표 지향적

천막생활(어머니의 세계)

귀 발달(공감적)

관계 지향적

*이사악은 왜 에사우를 편애했을까?

이사악은 모리야 산 사건을 계기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고 갈등을 피하는 인물인 반면, 에사우는 적극적이고 거칠며 피와 살상을 즐기는 인물이다. 이사악은 자기 안에서 개발되지 않는 야성의 세계를 외향적인 에사우에게 투영하면서 대리 만족을 즐기고 있었다.

*편애는 질투를 불러오고 질투는 갈등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편애는 되물림 된다.(야곱의 요셉 사랑)

*레베카(=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성격과 닮았다. 그러나 레베카의 적극적인 심성이 이사악의 소극적인 심성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사이는 멀어진다. 게다가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이 두려워 자신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이사악이 나이가 들수록 먹는 것만 밝히는 속물적 근성 때문에 대화 단절이 심화된다. 또 유언이라는 중대사로 아내와 상의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이 부부의 대화는 27,46에 딱 한번 등장할 뿐이다. 결혼생활이 식으면 그 사랑은 자식에 더욱 쏠리게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둘째에게 더 애정을 쏟았을 것이다. 하느님 구원 역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여인이다.

*불콩죽 이야기(25,27-34): 아버지의 편애, 이사악은 고기 맛을 즐기기에 입맛에 따라 사랑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 연상. ‘저 붉은 것에사우는 눈앞의 것, 물질을 중시하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눈에 보이지 않는 권리를 소홀히 했다. ‘삼킨다는 거칠고 동물적인 탐욕을 드러냄.

*이러한 급한 형의 성격을 지혜롭게 이용함.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장자권을 노린 수. 에사오는 경솔한 사람. 또 그는 본능적 욕망에 사로잡혀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헷족 여자를 둘이나 아내로 맞아들임.

*에사우의 혼인과 야곱의 도망(26, 34-28,9): 에사우는 아버지의 바램과 달리 이방인 여인과 결혼한다. 역사적으로 유배 이후에 대두된 이방 여인과의 혼인 금지 규례가 반영된 듯. 다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면 유일신 신앙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짐으로써 계약 공동체의 순수성이 흐려질까 두려워 한 배경이 깔려 있음.

*레베카 감독, 야곱 주연의 속임수 드라마(27,8-17): 레베카는 25,23의 신탁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20년을 살았다. 남편을 속인 여자라기 보다 자기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결단력 있게 행동한 여자. 거룩한 속임수. 그녀는 성미가 급하고 속물근성이 있으며 이방인 여자와 결혼한 에사우와 달리 야곱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난 순서가 은총의 순서는 될 수 없다. 레베카는 자기희생을 감수한다. 남편에게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고, 큰 아들 에사우에게 구박받으며, 이방인 며느리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고통까지도. 레베카의 이름 28,5에서 끝나고 35,8장에 다시 등장. 그녀는 사랑하는 야곱을 보지도 못하고 묻혔다. 하지만 레베카가 죽었을 때 이사악은 애도하지 않았다.

*에사우는 야곱을 속이는(아캅)’이로, 자기의 맏아들 권리(베코라)’축복(베라카)’을 가로채는 자로 지칭한다. 상속권은 집안의 부와 재물 상속, 축복은 집안의 영적 유산 상속. 오히려 물적 축복은 에사오의 것. 야곱은 축복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고통 속에서 산다.

*성경 본문이 의도하는 핵심은 야곱이 계략과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문제가 있는 가정, 화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된 가정, 한마디로 비신앙적 가정에도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점

*속임수 집안: 아브라함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이사악도 마찬가지), 야곱의 장인 라반의 거짓말,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의 거짓말, 세겜 학살 등 오히려 에사우가 정직함. 그러나 축복은 야곱에게 간다. 하느님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는 무상선물이다.

*‘그러나 네가 뿌리칠 때’(27,40): 도대체 무엇을 뿌리친다는 것인지 목적어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멍에 자체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다. 외부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에사우는 20년 만에 동생과 재회하여 그를 용서하며 화해함으로써 그가 멍에를 뿌리치게될 것이다.

*레베카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야곱은 에사우를 피해 도망가는 신세가 아니라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면서 신부감을 찾아 나서는 자가 된다.(28,1-2)

*팔레스타인 북부-시리아-메소포타미아-하란(837Km): 죄의식, 회한, 불안, 막막함, 낭패, 좌절의 순간 인간은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야곱의 꿈과 하느님 체험(28,10-22): 일종의 환시다. 땅에 세워져 있는 층계는 베델의 계단식 지형 또는 바빌론의 계단식 신전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소통한다는 뜻. 날개 없는 사람 같은 천사,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천사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배경일 뿐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당신의 이름 소개, 땅과 후손 약속, 복을 주며 그와 함께 있겠다.(immak=immanuel) 야곱이 받은 축복은 현세적 축복이 아니다. 영적 축복이요 남을 위한 축복이다.(28,13-15) 모든 종족이 너의 덕을 입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자신이 아무런 의식 없이 잠잤던 그곳이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임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성역을 침입한 자는 죽는다. 따라서 야곱은 베개로 썼던 돌을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는다. (고대인들의 주술적 돌 숭배 행위 영향) 하느님elohim의 집bet이라 하여 베텔이라 명명한다. 야곱의 서원과 함께 베텔은 주님의 성소가 된다.

*야곱이 머물렀던 자리는 비참하고 불안한 자리였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 삶에 놓여진 짙은 어두움은 비록 우리 부족함과 허물 때문에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것을 은총의 통로로 이용하신다.

*야곱은 발걸음을 옮겨 동방인들의 땅으로 들어갔다.(29,1): 표면상으로 동족 아내를 얻기 위한 여정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이 맡기신 거룩한 소명을 위한 발걸음이기에 힘찼다.

*야곱답지 않는 태도(29,7-10): 들 떠 있음. 라헬과 단 둘이 있어 싶었다. 재촉함. 물이 귀해 양떼가 다 와야 우물의 뚜껑을 열수 있음. 자신이 직접 돌 뚜껑을 들 만큼 흥분.

*외숙 3번 반복(29,10): 직역 그의 어머니의 오빠, 우물에서 이뤄진 어머니의 운명 상기.

*라헬과의 운명적 만남(29,11): 가나안에서 하란까지 837킬로미터 걸어온 야곱, 라헬이 온다는 소리에 들뜨고, 그녀를 보자 흥분, 감격의 입맞춤. 있을 수 없는 일. 안도와 기쁨의 눈물.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쁜 처녀(29,17): 예외적인 설화자의 직설적 표현.

*사랑(29,18;20): 이사악이 레베카를 사랑했다는 표현 나오지만 이는 장가든 후에 나오는 표현. 그러나 야곱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고, 이는 성경에서 예외적인 표현이다.

*라반의 이중적 태도(29, 13-14): 탐욕스런 라반, 내 골육이라는 표현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버지와 형을 속인 너도 나와 같은 사기꾼이다. 다른 하나는 안도감을 주어 외숙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하려는 고도의 심리적 표현.

*그 아이(29,19): 라헬이라고 명시하지 않음. 본심을 감추는 막연한 표현.

*7년이 며칠(29,20): 라반은 순정을 이용하여 착취. 조카가 아니라 종으로 대우. 그러나 야곱은 사랑으로 버팀. 빅터 프랭크린 박사 사랑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최후의 것이며 최고의 것이다. 비록 이 지상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더라고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마음을 바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제 아내(29,21): 약혼 기간 동안 법적으로 부부나 마찬가지. 같이 살겠습니다.저는 그녀와 함께 눕고 싶습니다. (직역) 아무튼 7년 동안 순결을 지킴.

*야곱의 두 번 혼인(29,25): 형을 속이는 자가 외숙에게 속다. 야곱은 두 형제 가운데 맏이의 권리를 누리려고 애썼건만, 이제 두 자매 중 맏이의 권리에 의해 좌절을 맛본다. 눈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따낸 그가 어두운 방과 신부의 너울로 인해 이제 눈먼 자가 되어 속다. 형제의 순서가 바뀌듯 자매의 순서가 바뀐다.

*7년 전에 준비된 말(29,27): 우리 고장이라는 말을 통해 하객들의 지지를 끌어 냄. 풍습을 빌미로 지속적인 착취. 사팔뜨기 언니도 결혼시키고 혼인 경비도 줄이고 일타 쌍피.

*자식들의 이름을 보면 여인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레아의 시기 질투는 대물림.

*죽어 버리겠어요.(30,1): 직역하면 저는 죽어 있어요. 자식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결혼 후 13년 동안 11명의 자식을 낳다.

*야곱의 자녀들(29,31-30,24): 12지파의 근원

질파(레아 몸종)

레아(남국 시조모)

라헬(북국 시조모)

빌하(라헬 몸종)

가드,

아세르

르우벤,시메온,레위

유다,이사카르,즈불룬

디나()

요셉,(므나쎄),(에프라임),벤야민

,

납탈리

남편의 사랑이냐? 남편의 자식이냐? 합환채 사건(임신 촉진제)과 출산 경쟁 속의 시기와 질투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로 가족은 번성한다. 라헬은 자귀 나무 사건 이후 3년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다. 미신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낳게 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30,23) 12지파를 탄생시킨 라헬과 레아는 탁월한 사람들 아니다. 갈등, 분노, 질투, 경쟁.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문제에 항상 하느님을 끌어 들이고, 항상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다.

*대단한 부자가 된 야곱(30,25-43): 라반의 계속된 사기와 착취 속에서 야곱은 꾀를 발휘하여 재산을 축척한다. 야곱은 (레바노트) 줄무늬 껍질” “가지의 하얀(할라반) 부분을 이용하여 라반(=희다)을 상대로 재산을 늘린다. 그의 특이한 방법으로 6년 만에 라반의 부를 따라 잡게 된다. 라헬이 요셉을 낳자(25) 고향을 생각함. 요셉은 그에게 장자나 다름없음.

*라반과 헤어진 야곱(31,1-32,1): 라반의 달라진 태도, 딸들도 아버지를 배척.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틈을 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도망침. 양털 깎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며칠 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야곱과 그 가족들은 여기에 끼지 못한 것은 라반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때 라헬은 집안의 수호신을 몰래 훔쳐 나온다. 여기서 창세기 저자는 수호신상이 달거리하는 여인이 앉아 있는 낙타 안장 속에 들어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이방 신상의 무력함을 희화적으로 보여준다.(34)

*라반의 불의에 항의하는 야곱, 결국 라반이 계약을 맺고 평화를 약속하지만 딸들을 보호한다면 명분 외에는 아직도 야곱의 재산과 가족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고, 딸들과 손자들과는 달리 야곱에게는 입 맞추면서 헤어지지 않는다.

*야곱의 귀향을 다루는 32-33장은 다음과 같이 대칭을 이룬다.

하느님의 천사 만남(32,2-3)/ 에사우 만날 준비(32,4-9)

하느님께 기도(32,10-13)/ 에사우 만날 준비(32,14-22)

하느님 만남(32,23-33)/ 에사우 만남(33,1-16)

*애절한 야곱의 기도(10-13):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지만 장차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될 야훼를 미리 부른다. 혈혈단신에서 두 진영으로 번창하게 된 것은 주님의 자비(헤세드, 꾸준한 사랑)와 신의(에메트, 충실함) 덕분임을 고백.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다(32,23-33): 에사우에게 선물을 보낸 후 밤에 가족을 데리고 야뽁강을 건넘. (생의 전환점) 홀로 강가에 남음(고독 속에서 자심을 바라봄) 선제 공격을 당한 야곱(yaaqob)은 야뽁(yabboq)에서 그와 함께 씨름한다.(yeadeq) 이 이야기의 바탕은 고대의 민간 설화이다. 새벽이 오거나 닭이 울면 모든 힘을 잃고 사라지며 자기를 불러낼까 봐 이름을 결코 알려 주지 않는 모습에서 민담에 나오는 귀신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런데 야훼계 저자는 이 이야기를 확대 변형하여 하느님을 보는 이는 죽으므로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 해가 뜨기 전에 씨름을 끝내려하는 천사로 소개한다. 라삐들은 야곱이 실제로 에사우의 수호 천사와 싸웠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요즘은 야곱 내면의 투쟁으로 이해한다. 즉 야곱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부딪혔던 에사우와 라반 같은 사람들과 갈등했던 관계와 하느님을 성찰하면서 그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에사우적 측면과 싸웠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과 미움, 열등감과 시기심 등 내면의 에사우와 함께 뒹굴면서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하느님의 치유를 받았다는 설명이다. 혹은 형처럼 강력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부족한 자신으로 충분함을 깨닫고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해석도 있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에사오이사악 하느님(통합된 자아) 아무튼 야곱은 야뽁강을 건너면서 과거의 야곱을 내려놓고 지금의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난다.

*야곱이 받은 복은 부와 자손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복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느님이 다스리신다. 혹은 너는 하느님과 겨루었다. 야곱의 복은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흘러나온 변형의 복이다. 야곱은 하느님과 겨룸으로써 자신을 짓누르던 불안과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20년간 그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속임수와 교활함, 모든 거짓말과 불경한 행위들을 버려야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내적 투쟁. 대결을 피하지 않았기에 강해졌다. 자신을 응시하였기에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싸움은 승패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와 구원을 위한 투쟁이다.

*프니엘=하느님의 얼굴, 신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곳.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33,1-20):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 신하가 임금께 예를 올리던 의식. 나는 당신의 종이다. 야뽁강 체험 후에도 야곱의 이름은 계속 반복. 33장 이후부터 50장까지 야곱 45, 이스라엘은 23. 한 번의 영적 체험이 갑자기 사람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영성은 조금씩 성장하는 법.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칭호 앞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이사 41,14 참조할 것) 계산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야곱과 달리 파격적으로 용서하고 끌어 않는 형. 하느님은 야곱의 기우와 달리 미리 에사우의 마음을 풀어 놓았다.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 하느님에 대한 확신.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 신앙과 인간적 계산이 따로 노는 미성숙한 모습,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다. 화해의 드라마.

*선물(33,10): 선물로 번역되는 베라카는 축복을 가리킴. , 가로챈 장자권을 원 주인에게 돌려 준다는 표현.

*베텔이 아니라 수콧을 경유하여 스켐에 장착하고 제단을 쌓음. 스켐은 상업적으로 발전한 도시, 주변에 목초지 많음. 세속의 자리. 거기서 비극이 일어남.

*디나와 스켐인 학살 사건(34,1-31): 비록 속임수에 놀아나 할례를 받기는 하지만 진정한 할례는 아니었다. 스켐은 할례를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하모르는 경제적 이득을 계산한다.

*야곱은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생존에 대현 현실적 염려와 레아가 낳아준 딸이랏 그런지 디나의 처지에 무관심함. 이에 형제들은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우리 누이라고 부름.

*야곱의 침묵에 레아의 아들들은 분개한다. 어쩌면 그동안 받아왔던 홀대와 소외가 폭발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나안 땅에서 주변 민족들과 통혼을 엄격히 금지한 때는 바빌론 유배 이후 이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들이 현지인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야곱은 살인 행위를 한 시므온과 레위는 심하게 꾸짖으면서 시체에서 전리품을 뜯어온 다른 아들들은 꾸짖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안위이지 도덕과 정의가 아니다.

*이후 디나는 침묵한다. 그녀에게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는 여성 차별이며, 다만 가문의 명예만 중요할 뿐이다.

*스켐-베텔로 내려감(35,1-20): 벤야민=오른쪽의 아들(벤 오니=고통의 아들) 출산, 라헬 죽음. 에프라타 길가에 묻힘.(예례 31, 15; 마태2,18). 에프랏 근처(48,7) 1,700년 뒤 여기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태어난다.

*믹달 에데르 건너편 천막(35,21-22): 라헬 죽은 후 아버지의 소실을 범함. 즉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말. 레아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미워했다. 르우벤은 어머니를 다시금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아버지를 모욕하기 위해 범죄. 이로 인해 르우벤 장자권 박탈.(1역대 5,1-12)

*마므레/헤브론 도착(35,27-29): 할아버지와 아버지 살다 죽은 곳. 100살부터 눈멀었던 아버지 20년 만에 다시 만나고도 180까지 장수. 야곱과 에사오가 함께 아버지를 막펠라 동굴에 안장.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즉 라헬의 두 손자를 자기 아들 지위에 승격시킴으로써 라헬의 자식을 둘에서 넷으로 늘려 줌. 그녀에 대한 최대의 보상.(48)

*라헬과의 추억(49,22-26):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벤 포라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아들), 젖가슴과 태는 바로 라헬을 상징.

*집념의 인간, 집념의 하느님: 야곱은 베텔과 야뽁강 체험을 하고서도 비신앙적 모습, 옛 사람의 모습을 보였지만 하느님은 변함없이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다. 야곱의 구원은 개인의 집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해 이뤄진다.

 

3. 요셉의 하느님

요셉 이야기에서 우리는 용서와 화해로 회복되는 형제애, 이상적 지도자상, 악에서 선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등을 배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요셉은 기구한 반전과 불확실한 운명 속에서도 하느님의 돌보심을 굳게 믿으며 충실하게 살아간 인물이다. , 한 번도 하느님은 선조들과 달리 요셉 앞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하느님의 계시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요셉처럼 유배의 삶을 살고 있다. 실패와 좌절, 상처와 이별 등. 그러나 신앙인 요셉이 유배자의 삶을 순례자의 삶으로 승화시켰듯이 우리 또한 그를 본받음으로써 의미 있는 순례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계보(37,2):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갔음을 알리는 표현. 요셉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하여 낳은 야곱의 맏아들이다. 그는 장자의 권한으로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린다.(46,4) 르우벤은 아버지 소실을 범한 탓으로 장자권을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겨준다.(1역대 5,1-12)

*요셉은 열일곱 살이 되어: 세월을 뛰어넘어 17살부터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유는 그가 꾼 중요한 꿈 때문이다. 그 꿈은 하느님의 신적 소명이 담겨 있는 특별한 꿈이다.

*아버지에게 그들에 대한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37,2): 형들을 고자질하거나 자기만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부름에 성실히 임하기 위하여 순수한 마음에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나 너무 철이 없었다.

*장신구를 단 옷(37,3): 아버지의 편애를 드러냄. 당시 화려한 옷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표시. , 상속과 관련되어 있다. 아무튼 야곱은 라헬을 빼어 닮은 요셉을 편애했고, 그의 성실성과 덕성까지도 사랑하고 있었다.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37,4): 인사조차 나누지 않을 만큼 미워했다.

*형들은 그 꿈 이야기를 듣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37,8): 375절에 이어 매번 이야기 함. 질투, 분노,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모르고 요셉은 미성숙한 모습으로 형들에게 자랑함. 372절은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청년이 아니라 17살 소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 말로 나아르’, 즉 소년은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아직 요셉은 나이에 비해 유치하고, 분별력이 없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미숙아이다. 이 점은 그가 멀리 떨어진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던 형들을 찾아 갈 때에도 장신구가 달린 화려한 옷을 입고 갔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늘 그 옷을 입고 다니면서 형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임을 과시했던 것이다.(37,23)

*형들을 찾아 나서다(37,12-18): 세겜은 수년 전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행 당하고, 그 형제들이 복수의 칼을 들었던 비극의 장소. 특히 세겜은 풀과 물이 많아 양치기에 최적의 장소. 그러나 요셉은 여기서 버림받아 22년 동안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게 된다.

*, 제가 여기 있습니다.(37, 13):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꼬박 이틀을 걸어 형을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형들을 만나지 못하자 도탄까지 다시 하룻길을 간다.(헤브론-세겜 80Km, 세겜-도탄 32Km)

*형들의 음모(37,18-28): 화려한 옷을 입은 요셉을 멀리서도 알아봄(37,18). 그 옷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요셉을 구덩이 처넣기 전에 옷부터 찢음(37,23).

*꿈쟁이가 오는구나.(37,19): 고자질쟁이,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놈이라고 하지 않고 꿈쟁이라고 한 것은 장신구 달린 옷보다 더 격하게 살의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처넣었다.(37,23): 야슐리크는 적어도 깊이가 10M 이상 되는 곳으로 던져 넣을 때 사용되는 말.

*잔인한 형들(37,25): 요셉을 사지에 몰아넣고도 천연덕스럽게 동생이 사흘 길을 걸어서 가지고 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모습에서 소름이 끼친다.

*노예로 파는 형들(37,25-27):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유다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팔아 넘기자는 그의 제안도 사형감이다.(신명 24,7) 그러나 담합하여 노예상에게 팔아먹고 아버지를 속이면 후일 벌을 피하면서 요셉에게 넘어갈 상속 재산을 챙기길 수 있는 최상책이다.

*그들은 염소 한 마리를 죽이고 요셉의 옷을...(37,31): 야곱이 쌍둥이 형 에사오의 옷을 입고 염소고기 요리를 들고 눈먼 아버지 이사악 앞에 섰다면, 지금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의 옷에다 염소의 피를 발라 편애에 눈이 먼 야곱 앞에 서 있다. 속임수를 쓴 사람이 결국 속임수로 당한다는 역설.

*이것이 당신 아들의 옷인지 아닌지(37,32): 당신 아들이라는 표현은 요셉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냄. 그가 너무나 미워 형들은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야곱은 옷을 찢고...울기만 했다.(37,34): 야곱이 울었다는 얘기는 두 차례 나온다. 라헬을 우물가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 요셉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때. 야곱의 눈물은 결국 라헬을 생각한 눈물이다. 야곱은 이날 이후로 넋을 잃는다. 제정신이 돌아온 것은 요셉이 이집트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이다.(45,27) 들은 요셉을 제거했지만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빼앗지 못하였다.

*세상의 경륜가가 되기 위한 13년의 훈련과정: 요셉의 시련과 고난이 필연적 과정 (집회 2).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그는 이집트인의 생활과 문화를 익히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함께 갇힌 파라오의 고관들을 통해 이집트 귀족들의 생활과 궁정 문화를 익히게 된다. 또한 그는 경호대장 보디발의 청기기로서 한 집안의 살림을 주관함으로써 훗날 재상이 되었을 때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험적 지식들을 미리 익히게 된다.

*만사형통과 승승장구의 노예(39,1-4): 노예-집안일-심복-청기기 4단계로 신분 상승. 이 과정 속에서 요셉은 증오, 복수, 비탄,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돌보심을 굳게 믿고, 그분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았다.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하느님께 불평했다는 말이 없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위대한 신앙의 선조이다. “나는 상처를 싸맸고 하느님은 그 상처를 낫게 하셨다.”는 말처럼 요셉은 하느님의 동행을 믿고 성실히 노력하였다.

*모든 재산을 요셉의 손에 내맡기고... 자기가 먹는 음식밖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39,6): 그가 먹는 음식은 그의 아내를 가리키는 수사학적 표현. 부부관계를 표현할 때 유다인들은 음식과 연결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관습이 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39,7): 성적 매력이 넘치는 청년이라는 이집트식 표현.

*나와 함께 눕자(직역): 명령형. 성적 초조감과 흥분의 상태. 과연 그녀는 음란녀일까? 코란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줄라이카’, 굳이 어우동 같았으면 이름을 줄 리가 없다. 회교들에게 그녀는 음탕한 계집이 아니라 외로운 여자였다. 남편은 왕의 경호 대장으로 늘 바빴으니까.

*요셉의 단호한 거절(39,8-9): 간적으로 요셉은 주인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고, 신앙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를 수 없었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요셉이 하느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이집트 신상을 천으로 덮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이집트의 신은 못 보는지 몰라도 우리 히브리인들의 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눈은 결코 가릴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빛과 어둠이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응수한다.

*그 여자는 날마다(39,10): ‘누가 불을 품에 안고 다니는데 옷을 태우지 않을 수 있겠느냐?’(잠언 6,27) 요셉의 나이 27. 미끼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최후는 비참하다. 악마가 즐겨쓰는 전략은 타협이다. 유혹, 아첨, 감언이설, 지적 논리 등 온갖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한순간 넘어가면 다 내어 주어야 한다.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곁에 눕지도 그와 함께 있지도 않았다.(39,10): 유혹 앞에서는 단호해야 한다. 불에 가까이 가면 덴다. 36계 줄행랑이 최상책이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튼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성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그 성욕이 우리를 지배하여 간음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밖으로 도망쳐나왔다.(39,11-12): 다른 유혹들은 저항해야 하지만 성적 유혹은 도망쳐야 한다. 성적 유혹 앞에서는 기도하기보다 도망쳐야 한다. 이길 수 없다.

*아내의 복수: 손에 잡힌 옷으로 증거 삼아 올가미를 씌운다. 그녀의 수치심과 굴욕분노와 증오심(니까짓게 뭔데 나를 무시해!)

*우리를 희롱하라고 주인께서...(39,14): 남편을 책망하는 표현. 동시에 우리라는 말로 요셉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다. 의도적으로 종들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하여 요셉을 이라고 표현하지 않음.

*저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39,17): 의도적으로 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노예 신분으로 주인마님을 겁탈하려 했다고 중죄를 물음.

*포티파르의 반응(39,19-20): 경호실장의 아내를 성추행. 고문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취조 과정 생략하고 감옥에 집어넣는다. 포티파르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화를 낸 이유가 믿었던 요셉에 대한 분노보다도 아내의 거짓말로 인해 성실한 청지기를 잃게 된 데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포티파르는 자신의 명예와 아내로 인해 자식들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음으로 어쩔 수 없이 요셉을 희생시켜야 했다.

*요셉은 감옥에서 3년 동안 단련 받는다. 어쩌면 포티파르의 처의 유혹에 넘어갔으면 더 비참한 감옥에 갇혔을지도 모른다. 감옥에 갇혀 있어도 양심이 자유로우면 감옥이 감옥이 아니다.

*감옥에서도 하느님의 돌보심은 계속된다.(39,20-23):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시고 모든 일을 일임함. 하느님은 요셉을 사랑하시지만 그의 인생에 방어벽을 마련해주시지 않았다. 다만 곤경 중에도 하느님은 함께 해 주셨다. 요셉은 그 3년 동안 영혼이 파괴되거나 병들지 않고 더 단단해 지고 성숙해진다. 요셉은 끝까지 하느님을 떠나지 않았다.(베트남의 반 투앙 추기경님 투옥사)

*파라오의 두 시종장(40,1-3): 술잔을 드리는 시종장은 연회 전반을 책임지는 시종장,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은 음식 전반을 책임지는 시종장. 여기서 시종장은 곧 장관급(느헤 1,11;2,1)

*경호대장은 요셉을 지명하여 그 시종들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40,4): 두 죄수의 전직이 최고 각료들이었던지라 잘 대접할 필요 있음.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40,8): 영적으로 성장한 모습, 꿈쟁이 요셉은 어린 시절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와 다르다.

*상반된 꿈 해몽(40, 18-19): 흉몽도 직설적으로 풀이함. 만약 요셉이 제빵 시종장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었더라면 시종장은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이나 간곡히 청했지만(40,14) 시종장은 잊어버린다. 그로부터 세월이 이 년이나 흐른 뒤(41,1): 시종장의 입장에서는 겨우 파라오의 재신임을 얻어 일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사적인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히브리 죄수 석방을. 게다가 꿈 이야기가 어쩌면 파라오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러나 그 2년 동안 요셉은 더 단단해지고 굳세어진다. 그는 감옥에서 구원은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라오의 재촉(41,14): 2년 전에 요셉의 꿈 해몽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파라오는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렇게 하느님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행동하는 분이시다. 2년의 투옥 시간은 인간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표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파라오의 꿈(41,1-36): 첫 번째 꿈은 목축과 관련, 두 번째 꿈은 농업과 관련.

*연회 책임자가 요셉을 기억한다.(41,9.12): 망각도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만, 하느님께서...(41,16): 꿈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선언. 하느님만이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유일한 신. 요셉은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 요셉은 많이 성숙해졌다.

*이집트 재상이 되다.(41,37-45): 현명한 파라오는 한눈에 요셉의 충성심과 겸손을 알아봄. 이집트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차프낫파네아(=세상의 구주)’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그리고 상류층 출신의 처녀와 결혼도 주선한다.(41,45) 부와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선 것.

*이집트 통치자가 되었을 때 요셉의 나이는 서른(42,46):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왕위에 오른 다윗, 레위인들이 실제로 성막에서 봉사하는 나이는 다 서른이다.

*청렴하고 공정하며 실력 있는 정치인 요셉: 개인적 도덕성공적 도덕성, 전국 순회 민정 파악(41,46), 대기근 때 공정하게 대처(41, 56;47,14)

*요셉의 두 아들(41,50-52): 므나쎄와 에브라임, 그가 이집트로 건너가 그곳의 언어와 풍물을 배운지 20년이 넘었고, 지난 7년은 이집트 태양신을 섬기는 사제 집안의 처녀와 결혼해서 이집트 종교에 노출되어 살아왔다. 그런데도 두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과 연관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지어 불렀다. 므나쎄(잊게 해 주는 이) 이름은 더 이상 한을 품지 않는다는 것. 상처 극복의 표현.

*7년 대기근 정책(41,53-54;47,13-26): -가축-토지를 담보로 잡게 한다.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7년 동안 제도적 개혁을 단행. 백성의 땅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백성들을 파라오의 농노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수확의 80%는 백성들에게 돌려줌.

*1/5 도조, 나머지는 정확한 내역을 제시하면서 이집트 백성의 미래를 위해서 사용. 요셉의 지혜와 덕 칭송.

*어째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느냐? 그냥 죽을 수 없지 않느냐?(42, 1-2): 본래 기근이 잦는데 대기근이 닥쳤으니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감. 결국 요셉의 자리를 대신하는 막내 벤야민만 남겨 두고 10명의 아들들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감. 500Km 예전에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던 길.

*그에게 절하였다.(42,6):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짐.

*틀림없이 간첩이다.(42,9;14-15;16): 세 번이나 반복해서 염탐꾼이라 몰아세운다. 이미 용서한 그가 왜 그랬을까? 요셉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가혹하게 대했던 것은 형들이 자기들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진정으로 통회하고, 용서를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회개 없이는 용서를 체험할 수 없다.

*본디 열두 형제입니다.(42,13):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 ? 간첩들은 무리를 지어서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몰살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막내는 지금 저희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한 아우는 없어졌습니다.(42,13): 왜 이렇게 자세히 털어 놓았을까? 요셉이 낱낱이 말하도록 형들을 다그쳤기 때문이다.(43,7)

*아우를 데려오너라.(42,16): 형들을 간첩으로 몰면서 다그쳤던 것은 아버지의 생존과 막내 동생의 안위에 대한 불안한 궁금증 때문이다. 행여 형들이 자신에게 했듯이 베냐민을 해쳤을까봐.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42,17): 성경에서 3일은 위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상태로 바뀌는 시점을 뜻하거나, 과거의 약속이 완성되는 때를 말한다.(호세 6,2; 에스 5,1; 마르 16,1-11, 루카 24,1-12; 요한 20,1-10) 감옥으로 끌려 간 그들은 요셉의 구덩이 체험을 동일하게 겪음으로써 회개할 수 있는 계기 맞음.

*볼모의 숫자 변화: 42,16에서는 10명 중 한 사람만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면서 감옥에 가두었는데 42,19에서는 10명 중 한 사람만 남고 다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한다. 왜 입장을 바꾸었을까? 첫째는 늙으신 아버지가 충격으로 돌아가실까 봐. 둘째는 한 명으로는 식솔들을 먹일 식량을 500Km, 3주 동안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 셋째는 볼모가 될 한 명을 놓고 서로들 난감한 얼굴로 서로 눈치만 보고 있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42,21)

*물러 나와 울었다.(42,24): 필요 없는 통역관을 놓고 이집트를 구사하며 형들을 속이는 요셉, 이러한 철저함 이면에 인간적인 동정심이 흘러넘친다. 이 눈물은 자식을 꾸짖고 나서 뒤로 돌아서 눈물 짓는 어머니의 눈물과 같다.

*시메온을 불러내어 묶었다.(42,24): 맏형 르우벤은 자기를 살리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다음 서열인 시메온은 세겜인들을 몰살할 만큼 잔학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42,28): 깊어지는 형들의 고민. 뒤에 언급하는 요셉의 관리인이 말하듯이(43,23) 요셉은 올가미를 씌우려고 돈을 넣은 것이 아니라 보물을 넣은 것이다. 보물이라는 표현은 호의성 선물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형들은 은전 20냥에 요셉을 팔아넘긴 옛일을 떠올리며 회개한다. , ‘하느님이 우리가 요셉에게 한 일 때문에 벌하시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참된 화해는 피해자 요셉과 가해자인 형들이 모두 하느님에게 시선을 돌릴 때 이뤄진다.

*아들들의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한 형제의 식량 자루에서 돈을 발견했고 무척 놀랐다는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42,28) 또 시메온이 인질로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지 않고 이집트 재상이 그의 손님으로 남도록 해 달라고 해서 그곳에 남게 된 것처럼 말한다.(42,33) 게다가 벤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는 요셉의 위협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이집트 땅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약속한 것처럼 보고한다.(42,34) 왜 그랬을까?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고 나중에 벤냐민을 이집트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42,35을 보면 돈주머니를 발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아버지는 더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된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갈 수 없다.(42,38): 르우벤의 비상식적 제안을 거절하며 라헬에게서 얻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에 대한 편애를 보인다. “나의 아들, 다른 아들은 자식이 아니라는 소리다.

*제가 그 아이를 맡겠습니다.(43,9): 자신을 담보로 하여 청하는 유다. 만일 벤냐민을 다시 데려 오지 못하면 유다는 가족에게서 쫓겨나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는 벌을 스스로 받겠다는 것.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말하였다.(43,11): 야곱은 그가 하느님과 관계없이 인간적 의지와 집념만을 내세우면서 살아갈 때 사용하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그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해서 살아갈 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너의 아우를 데리고(43,13): 나의 아들에서 너희 동생이라고 칭하는 것은 다른 아들들에게 형제로서 책임을 지게 하려는 뜻.

*전능하신 하느님께서...자식을 잃어야 한다면(43,14): 이스라엘로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께 의탁한다는 뜻.

*하느님께서...보물을 넣어 주신 것(43,23): 돈이란 말 대신 보화, 그 단어를 하느님과 연결한 것은 그들에게 부과된 일련의 시험들이 모두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숨겨진 뜻임을 암시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안부를 먼저 묻는 요셉(43,27): 하느님 공경 계명 다음에 나오는 부모 공경 계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잘 공경해야 부모도 잘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얘야(43,29): 내 아들아! 베냐민 나이 서른 넘은 젊은이. 나이 차가 많지 않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감격을 주체할 수 없지만 일부러 윗사람이 아끼는 아랫사람에게 흔히 쓰던 호칭을 사용.

*애정이 솟구쳐 올라(43,30): 연민이 솟구쳐 오르다. ‘카마르는 하느님이 길을 잃고 헤매는 이스라엘에 대해 가졌던 안타까운 심정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호세 11,8 참조)

*나이 순서로 앉게 되자(43,33): 남이라 여겼던 그가 형제 서열대로 자리를 잡게 하자 모두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벤야민의 몫 5(43,34): 순전히 의도적이었다. 특별대우에 형들이 22년 전 자기에게 했듯이 질투심을 느끼는지 확인하기 위한 수이다.

*요셉의 마지막 시험(44,1-17): 왜 그랬을까? 첫째는 벤냐민에 대한 형들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 편애받는 막내를 피 안 묻히고 죽일 수 있는 기회이니.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형들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과연 아버지의 심장을 옛날처럼 또 찢어 놓을지.

*자기들의 옷을 찢고...되돌아갔다.(44,13): 형제적 유대 관계 보여줌. 이제 요셉의 형제들은 더 이상 옛날의 그들이 아니다. 베냐민이 죽으면 유산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얼마나 상심할까 걱정하는 모습.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러(44,14): 주도권이 르우벤에게 있지 않고 넷째 아들 유다에게 있음을 알리는 표현. 유다가 형제들을 대신해서 탄원을 드린다.

*‘무어라세 번(44,16): 형제들의 깊은 통회 드러냄.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44,16): 여기서 죄는 요셉을 미워하고 노예로 팔아넘긴 죄.

*이제 저희가 나리의 종입니다.(44,16): 공동 책임.

*유다의 탄원(44,18-34): 유다가 이 긴 호소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벤냐민의 무죄가 아니라 이집트 재상의 자비이다. 아버지란 단어가 무려 14번 들어감. 22년 전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요셉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그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데 앞장섰던 그가 이제는 막내를 위해 대신 노예가 되겠다니, 이는 동생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효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마도 유다는 자식을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참조 38,7-11)

*여기서 유다를 보고 있는 벤냐민의 심정은 어땠을까? 감동했을 것이고 감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훗날 벤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에게 충성을 다한다. 벤냐민 지파의 요나단이 유다 지파의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해 주고 지켜준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도 벤냐민 지파만이 유다 지파 곁에 남은 유일한 지파가 된다. 그리고 벤냐민 지파의 바오로는 유다 지파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한다. 덕은 또 다른 덕을 부른다.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45,5): 요셉이 형들의 범죄 사실을 언급한 것은 그 비극적 사건 뒤에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형들을 용서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네 번이나 말한다.(45,5; 45, 7;45, 8;50, 20) 형들을 용서하고 하느님께는 원망보다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의 용서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삶 안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신앙으로 응답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선으로 나갈 수 있다.(참조 로마 8,28)

*그제야 형들은 그와 이야기하였다.(45,15): 단순히 이야기했다는 것이 아니라 22년 전의 묵은 감정을 다 해소하고 진정으로 소통하였다는 뜻이다. 이 같은 눈물 어린 화해가 있을까? 그러나 쌍방이 노력하는 화해가 어렵다하더라도 용서는 할 수 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의지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고, 내 마음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화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회개치 않는 상대의 죄를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복수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내적 평화를 위해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길에서 너무 흥분하지들 마십시오.(45,24): 서로 탓하지 말라고 당부. 과거 르우벤은 요셉을 팔아먹은 일을 가지고 형제들을 질타한다.(42,22) 그때 요셉은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 야곱은 정신이 들었다.(45,28): 아들의 잃고 넋 나갔다가 이제 돌아옴.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46,4): 하느님은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이 그의 후손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임을 알려준다.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46,4): 하느님이 단순히 한 지역에 국한되어 계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백성이 있는 어디나 계시는 분임을 말한다.

*야곱의 이집트 이주(46,1-30): 눈물겨운 이산가족 상봉. 지리적 배경이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고센 이방으로 바뀐다. 그럼으로써 선조 이야기와 탈출기를 연계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요셉이 하고 있다.

*야곱의 자손 명단(46,8-27): 직계 가족 66명에 야곱,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하여 이집트에 70명이 거주. 707×10이므로 보편성을 상징하여, 한 가족이 부족으로 커졌음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면 모두 역겨워하기 때문입니다.(46,34): 근거 없는 소리. 47,6을 보면 파라오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이 나온다. 요셉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요셉은 처음부터 가족을 고센에 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 고센은 양과 소를 방목할 수 있는 좋은 목초기가 있었다. 고센은 이집트 국경에 접해 있기 때문에 언젠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집트인과 섞여 살면서 그들의 혈통의 고유성이 흐려지는 막기 위해서, 즉 우상숭배의 유혹을 사전에 차단. 친인척의 정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

*요셉의 가족과 파라오의 만남(47,2-10): 파라오 앞에서 당신의 종이라고 조아린 것과 달리 야곱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요셉은 아마도 비록 나그네 신세이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아버지가 파라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이상으로 엎드려 경배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되려 야곱은 파라오에게 축복을 내린다.(47,7-9): 두 번이나 파라오에게 축복. 세상의 모든 종족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12,3) 야곱을 통해 그 약속의 일부가 성취되었다.

*대기근을 왕권강화에 활용하는 요셉(47,13-26): 식량 값-돈 고갈-가축-농지-. 그러나 5분의 1만 세금으로 바치게 하고 나머지는 백성에게 돌려 줌. 중앙집권제라는 실리와 민생 안정이라는 명분 둘 다 얻음.

*야곱은 17년을 살았다.(47,28): 아버지 밑에서 사랑받던 17년을 어른이 되어서 갚는다. 의도적으로 17년을 대칭시킴. 부모의 한량없는 은혜에 맞갖게 자식도 노부모를 극진히 섬겨야 한다는 뜻.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축복(47,28-48,22): 유다인은 모계 혈통을 따르기 때문에 이집트 여인에게서 난 요셉의 두 아들은 법적으로 유다인이 아니다. 그러나 야곱은 의도적으로 두 손자를 양자로 입양하면서 계속해서 라헬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므나쎄와 에프라임의 어머니가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지, 이집트 사제의 딸인 아스낫이 아니라는 뜻이다.

*축복의 순서가 바뀌다(48,13-14): 야곱은 두 손자를 실제로 축복하는 분은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분명히 한다. 실제 역사적으로 처음에는 므나쎄 지파가 에프라임 지파보다 더 우세했으나 곧 에프라임 지파가 더 강력하게 되어 북이스라엘 왕국의 중심 세력이 된다. 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민수 13,8), 예언자 사무엘(1사무 1,1), 예로보암 1(1열왕 11,26) 모두 에프라임 지파 출신이다. Tip: 12지파 명단에 요셉과 레위가 들어 있는 예가 있는가 하면(신명 27,12-13), 레위가 빠지고 요셉이 므나쎄와 에프라임으로 나뉜 예가 있다.(민수 1,5-15) 아마도 중부 산악 지대에 정착했던 요셉 가문이 므나쎄와 에프라임 두 지파로 나눠진 때는 판관 시대 초기로 짐작된다.(여호 17,17;18,5; 판관 1,23.35)

*요셉은 아이들을 아버지 무릎에서 물러나게 하고: 20살 청년 손자, 무릎에 앉힌다는 표현은 입양을 상징.

*이스라엘은 손을 엇갈리게 내밀어: 하느님의 뜻일 때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쓴다.

*열두 아들에 대한 축복(49,1-28): 드보라의 노래(판관 시대 말기나 왕정 시대 초기)보다 늦게 편집된 야곱의 축복은 각 지파의 특징을 동물 또는 식물의 특성과 비교하여 서술하면서 히브리어 특유의 말놀이를 많이 활용한다. 특히 다른 지파에 비해 유다와 요셉 지파를 길게 언급한 것은 이들 지파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후기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다윗 왕권과 관련하여 유다를 찬양하는 것에서 형성 시기를 다윗 왕조 시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맏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소실을 탐한 탓으로 더 이상 장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 실제 역사 안 서 르우벤 지파는 점점 더 흔적이 사라지며, 모세의 축복에서도 르우벤은 작은 지파로 소개된다.(신명 33,6) 시메온과 레위는 한 쌍으로 나오는데(34,30) 포악한 행위로 비난을 받는다. 결국 폭력을 행사한 두 지파는 저주를 받아 갈라지고 흩어지는데, 나중에 시메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흡수되고(여호 19,1-9) 레위 지파는 땅을 가지지 못하는 사제 집단이 된다.(신명 18,1-2) 하지만 탈출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모세와 아론은 모두 레위 지파이다. 라헬이 아들 요셉에 대한 축복은 가장 길고 복잡하다. 아마 북이스라엘의 지배 세력인 에프라임을 강조하기 위한 편집 구성 같다.

*야곱의 죽음과 장례(49,29-50,14): 유다의 숫자 신학 아브라함 175=7×5×5, 이사악 180=5×6×6, 야곱 147=3×7×7, 여기서 ×+로 바꾸면 모두 17이 나온다. 1710+7이다. 이 뜻은 모든 족장이 하느님 섭리로 충만한 인생을 살다 죽었다는 것이다. 야곱이 147세에 죽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계획에 의한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시신을 미라로 만든 것은 야곱과 요셉뿐이다. 금지된 장례 풍습이지만 장거리 시신 운반을 위해 부패방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이집트의 국상 기간은 미라 염습 40일과 공적 애도 기간 30일을 더하여 70일이다. 물론 파라오는 72일을 장례 지낸다. 따라서 야곱의 장례는 이집트인들이 요셉의 아버지에 대해 몹시 정중한 조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구원자 요셉에게 드리는 감사의 표이다. 일반인의 애곡 기간은 7일이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분부하셨네(50,16): 17년이 지나도 불안한 형. 다분히 의도적으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표현과 함께 아버지의 유언을 꼭 따라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는 목적이다. 사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요셉에게 직접 하지 않고 형들에게만 따로 전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다. 창세기 어디에도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의 소행을 야곱이 알았다는 암시는 없다. 그러니 형들이 전한 아버지의 유언은 그들이 공포심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50,20):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말은 원수 갚은 일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보복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월권행위이다.(로마 12,19-20 참조) 요셉의 눈물과 보살핌은 44년 동안 갇혀 있던 원한의 감옥에서의 해방이다. 문제) 창세기에서 요셉은 총 몇 번 울었을까? 7.

*요셉은 백 십년을 살았다.(50,22): 110년은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이상적인 수명을 나타내는 상징수(110=10×10+10). 여기서 103+7의 합으로 완벽함과 완전을 뜻한다.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50,24): 성조사와 탈출기를 한층 구체적으로 연결.

*관에 넣어 모셨다.(50,26): 그의 유골이 담긴 관은 훗날 탈출 때의 운반을 예상한 표현이다. 그 뒤 모세(탈출 13,19)와 여호수아와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을 그대로 실행하였다.(여호 24,32)

*요셉과 야곱 이야기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둘 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들의 배신을 다루고 있다. 고향을 떠나 20년 타향살이. 20년 후 형제들과의 상봉. 주인공의 미래는 하느님이 결정.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전향시킬 꿈을 꾼다. 형제들과의 갈등. 주인공들은 타지에서 어려움을 겪고, 타지 여성과 결혼한다. 그리고 타지에서 부와 권력을 차지한다.
차이점: 요셉은 아버지보다 더 많은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았지만 아버지처럼 축복을 움켜쥐려 애쓰지 않았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겼다. 그는 이 세상의 악과 불의 속에서도 하느님이 당신 선의로 이끌어 주신다고 굳게 믿었다.

요셉은 오직 하느님 중심적인 삶이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나온다.(40,8; 41,16; 45,5; 45,9; 4 8,8-9; 50,24) 모두 신앙을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아마도 요셉이 감옥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골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요셉의 신앙은 한마디로 ‘~일지라도의 신앙이다. 요셉은 조건을 달지 않고 믿었다. ‘~이라면의 태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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