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2,13-25
오늘 주일복음은 성전정화입니다.
세 공관복음서에는 물론 요한복음에도 기재된 사화라는 것은 그만큼 복음사가들이 중요하게 여긴 사건, 각인된 사건이라는 말이겠지요.
공관복음은 셋 다 예수님 공생활의 막바지, 예루살렘 입성후에 일어난 일로 배치되어 있어 이로써 미운털이 더 박히게 되는 사건으로 이해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공생활 초기 첫 표징 후에 배치하고 (요한복음에는 일곱가지의 표징을 이야기 합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마지막 최상의 표징(일곱번째)과 연결하여 들려줍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1-22) 라고 말입니다.
성전은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과 만나는 각별한 자리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봉헌물과 제물을 바쳤고 사제들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유로 성전마당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고 부정한 로마화폐는 사용할수 없어 환전상들이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여 부당이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5-16)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기도의 집이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장사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일이 빈번했던 것 같습니다.
양과소를 팔던 이들은 그냥 쫓아내기만 하셨는데 환전상과 비둘기장사들에게는 더 강력한 행동을 취하십니다.
(공관복음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왜 일까요?
비둘기는 가난한이들의 봉헌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성전을 지키는 사제들과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을 향해 있습니다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례로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이 된 우리는 어떠한지요? 우리마음은 무엇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져 있나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얼마나 자리하고 있는지요?
하느님과 만나는 각별한 자리인지요?
혹여 예수님께서 '치워라'라고 말씀하실 것들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순절의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엇에서 죽고 부활해야(무엇을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