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복음 9,2-10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7)
오늘 복음 앞장(8)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대표해서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 예고를 하시는데 이에 반박하는 베드로에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며 심지어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8,27-33)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그가 이렇게 질책당하는 것은 어느쪽을 향해 귀를 열어놓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하느님 몸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비결, 하느님 편에 서는 일을 알려주십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듣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1100번 신약에서 450번이나 성경반복되는 단어이며 이스라엘인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천년간 하루에 적어도 세번 외우는 쉐마기도(신명기 6장)의 첫 단어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관계맺음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듣지 않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을수 없듯이 하느님과의 관계도 들음으로 깊어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수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던 제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귄고입니다. 그러니까 수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수난, 고통의 길을 걸으시겠다는 것은 고통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시려 오셨지요. 그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빵을 많게 하시며 목자없는 양떼 같은 군중을 측은히 여기셔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굳이 수난의 길을 가시겠다 함은 왜 일까요?
하느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살기 위해, 죄가 빚어낸 고통을 없애려 고통을 끌어 안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길로 몰아세우는 인간의 악행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것이 사랑의 길, 곧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고통을 요구하더라도, 목숨까지 요구하더라도 그 사랑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이 목숨을 내놓는 선택은 매일, 매순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오신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 사랑의 길을 먼저 걸으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걷기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각자를 향한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라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 그다음 예수님께서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셨는지」, 나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의 이 경우에 어떻게 하면 그분처럼 사랑을 살수 있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핵심입니다.
매일의 우리 기도가 하느님 사랑을 먹고 형제를 통해 하느님께 사랑드리는 법을 배우는 기도가 되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