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마르 1,12-13)을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고 ‘사십일’ 동안 그곳에서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으셨다고 짧게 알려줍니다. 마태오 복음(4,1-11)과 루카(4,1-13) 복음은 이 주제에 관해 대조적으로 길게 표현하면서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는 그 ‘유혹’의 내용을 3가지로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은 이 장면에 대한 언급은 없고 광야의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부하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파하며 힘들어하면서도 조금씩 받아들이며 순명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사막)로, 필요하다면 더 혹독한 광야 한가운데로 내보내신다는 것을! 그래서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 힘든 숙제가 주님께서 광야로 내보내신, 아니 광야의 삶 속에 놓이게 하신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광야(사막)는 시험을 받는 자리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고, 황폐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을 하게 만들고, 결국 점점 의지는 약화되고 어떤 궁극적 구원(생존) 가능성에 매달리게 됩니다.
막연함이 아닌 현존 상태 그대로의 광야(사막)에 여행이라도 하루, 이틀 머물러 본 적 있으신지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또한 광야의 가장 깊숙한 모습을 닮은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마지막 숨을 내뱉듯 겨우 숨 쉬며 살아가는 듯한 현장(삶)을 목격하면 나의 광야는 관광지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광야에 머무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언하는 모든 사명은 그곳에서 준비되고 갈무리되어야 했을 겁니다. 늘 죽음이 가까이 와 있는 그곳에서 살려는 의지와 정화된 신앙과 친교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도록 우리를 촉구하시기 위함일 겁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 각자의 절절한 ‘광야 체험’ 안에서 ‘인생의 노력’을 경주하는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