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지난 주일 강론 때에, 3부작 강론을 준비한다고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물음 3개로 3주간의 강론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지난 주일엔 « 학사님도 엑소시스트 할 줄 아세요 ? »였다. 이번주는 제2부, « 신부님, 도대체 복음이 뭐요 ? »다.
벌써 23년 전, 2001년 2월 1일 사제서품을 받고, 새 신부로 부산 가야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때의 일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주일 저녁미사였다.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려고 원고를 꺼내는 찰라, 한 청년이 성전 맨 뒤에서 뚜벅뚜벅 강론대를 향해서 걸어오더니, 제단 바로 앞에까지 와서는 « 신부님, 도대체 복음이 뭐요?»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벌겋게 얼굴이 상기되어 있던 그 청년을 다른 청년들 네 다섯이 성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멀뚱멀뚱, 그 장면을 강론대 위에서 보고만 있던 나는 그날 강론 원고를 덮어 버리고, 그 청년이 물었던 그 물음에 대해 강론을 했다.
복음, 도대체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기쁜 소식이 복음인데, 세상에는 복음이라는 게 참 많다. 로또 당첨이 복음이 될 수도 있고, 장가나 시집 못간 자녀가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는 것도 복음이 될 수 있다. 첫눈에 반한 사람이 복음이 될 수도 있고, 오랜 기간 준비해왔던 일이 성공했다는 소식도 복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복음이 무엇일까 ? 복음서가 복음일까? 복음서는 복음을 담지한 그릇이지, 복음서 그 자체가 복음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다행히 마르코 복음서가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서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준다.
마르코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그런데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시작 ». 그렇다. 복음이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신 후, 갈릴래아로 가셔서,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는 복음이라는 것이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 »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장소나 지역, 혹은 국가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저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그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뜻이요, 때가 찼다는 것은 이제 새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오셨다는 것이 왜 복음일까 ? 오늘 복음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후,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나 있었다. 왜 열병이 나 있었을까 ? 복음서는 이에 대해서 한 마디의 이유도 달지 않는다. 하지만, 짐작컨대,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난 것은 사위인 시몬이 고기 잡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라는 작자를 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기 잡아 판 돈으로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겨우겨우 먹고 살만 했을 어부 집안에서 사위가 그물을 버렸다는 것에 열불이 터졌을 것이다. 이런 시몬의 장모의 마음을 예수님은 분명 잘 헤아리고 계셨을 것이고, «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입을까 ? 걱정마시오 »라는 무언無言의 제스쳐로 시몬의 장모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안수로 시름을 덜게 되었고, 열이 가시게 된 시몬의 장모는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줄거리다.
오늘 복음은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을 자기네 스승에게서 보았고, 하느님을 자기네 스승에게서 발견했다고 증언한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 바로 하느님의 현실이 자기네 스승임을 체현(體現)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담지한 그릇이 바로 복음서다. 그래서, 복음서를 읽는다는 것은 그저 책 한 권 읽는 일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복음서가 담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낸다는 것이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길을 걷고, 그분을 닮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또 하나의 예수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라는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때가 차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길을 예수께서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가르치셨다. 하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알려 주셨고, 그 길을 몸소 걸으셨고, 그 길을 걷는 방법을 온몸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여주셨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이 오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경천애인의 삶이 요구된다.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선교이다. 천주교 신자 하나 둘 늘리는 것이 선교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다 보면,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하느님께로 이끌린다. 신앙인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길을 배우며,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듯이,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신앙인은 바로 이 미사에 참례 중인 우리들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 갑시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파견을 받아 온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먼저 스스로 선교의 모범을 보이셨다. 다른 이웃 고을에 가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일, 이 일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해야 할 일이다.
신앙인들끼리, 우리끼리만 모여서, 우리끼리만 행복하면 다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한 그만큼 우리 주변의 불행한 생명들도 행복해야 한다. 그들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 가는 일이다. 이 일을 두고, 사회학적인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바로 교회의 사회 참여이다. 교회의 사회 참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 사항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사명이다. 오늘 강론을 마무리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좌 권고, « 복음의 기쁨 » 182항과 183항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고 싶다. 한 귀로 듣고 다른 한귀로 흘려 보내지 말고, 가슴에 아니 뼈에 새기기를 바란다.
«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지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82항)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캘커타의 데레사 복자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도록 이를 성당 안에 가두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으며,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해 주신 이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슬픔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인함과 나약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류 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확실히 «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 »이라면, 교회는 «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 (복음의 기쁨 18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