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4주일 강론)
악의 이중성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회당에서 주님을 향해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겉으로는 바른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은 주님의 길을 방해하는 사탄의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은 곧 예수님께서 단순히 예언자가 아니라 메시아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훼방하는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는데 사탄이 미리 천기를 누설하면서 주님의 길을 망치려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의 이중성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공생활 전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십니다. 이때 악마가 슬그머니 굶주린 주님께 접근하지요.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주님을 데리고 가서 한 가지 달콤한 제안을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악은 선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사탄은 주님의 공명심을 자극하는데, 그 수단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교묘하게도 사탄은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주님께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니 당신의 신성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라고 유혹합니다. 지금의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부분 인용이나 끼워맞추기 식의 해석을 통해 성경의 전통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신천지는 선을 가장한 사탄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오늘 회당에서 주님의 정체를 폭로한 더러운 영을 향해 주님께서 외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십자가를 향하여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며 침묵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비단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오늘날 악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십자가 없는 권력, 돈, 명예, 성공, 쾌락, 무관심, 이기심 등이 모습만 바꾼 채 악의 전령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율법학자의 얼굴을 하고 접근하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이 왜 권위가 없었겠습니까? 언행일치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율법은 다 꿰고 있었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혹 행하더라도 진심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과 거짓으로 행했습니다. 그렇게 악은 율법학자들에게 쉽게 침투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 지식이 영적 교만을 낳았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부는 특권층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부당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종교를 가장한 사적 이익의 수단으로써 그들은 율법주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고 우상화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사탄도 굴복할 만큼 진실했으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빛 앞에서는 어둠이 힘을 발휘 못 하듯 진리와 사랑 앞에서는 악도 뒷걸음치기 마련입니다.
악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이 뿔 달리고 흉측한 마귀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악은 우리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용합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파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세속적인 즐거움과 편안함으로 유혹합니다. “주일성수는 선택이다. 신앙생활은 필요할 때만 하면 충분하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 봉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없다. 나만 잘 먹고 잘 산면 된다. 행복은 물질에 대한 소유에서 비롯된다. 나에게 시련과 고통만 주시는 걸 보면 하느님은 없다.”
그리고 악은 언어를 통해서 활동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역시도 언어를 통해서 주님의 복음 선포를 방해합니다. 우리의 속마음은 반드시 언어를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교우들 간의 이간질과 비방, 그리고 대립과 분열은 어디에서 옵니까? 다 그놈의 말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오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겠습니까? 말에는 씨가 있습니다. 씨가 자라면 싹이 트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말이 가진 파급력과 파괴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선한 말은 한없이 하십시오. 그러나 악한 말은 삼가야 합니다. 아니 침묵하십시오. 내가 하는 말이 다 진리이고 정의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서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언어를 모방하십시오. 그분의 언어는 진실과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주님처럼 권위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