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서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이라는 말은 공적으로 드러내다는 말입니다. , 동방박사의 알현으로써 주님께서 만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유다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선사된다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마구간 안의 짐승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해 집니다. 먼저 소는 유다인들을 상징합니다. 소는 번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나귀는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유다인들의 눈에 당나귀는 말의 짝퉁입니다. 이방인들을 홀대할 때 빗대는 짐승이지요. 아무튼 구유 곁에는 소와 당나귀가 함께 있었습니다. 유다인, 이방인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 역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까지 찾아와서 경배 예물을 바치니 이로써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동방박사가 몇 명인지 성경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동방박사가 세 명이었다는 것은 후대에 덧붙여진 전설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바친 예물이 황금, 유향, 몰약 세 가지였기 때문에 세 명이라고 추정한 듯합니다. 우선 명칭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동방은 오리엔트 지역, 다시 말해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반도, 멀리 인도까지 포함합니다. 박사는 영어로 Magi라고 쓰는데, 이는 점성술사 혹은 천문학자를 뜻하지요. 별의 인도에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다는 것을 보면 분명 그들은 별을 연구하던 이방의 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동방박사의 이름은 멜키오르, 발타사르, 카스파르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 60장에 근거하여 이들은 왕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멜키오르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 하얀 수염을 길렀고 페르시아 임금으로서 황금을 바쳤습니다. 발타사르는 거무스레한 얼굴에 몰약을 선물한 아라비아 임금입니다. 카스파르는 젊고 수염이 없으며 얼굴이 붉은 인도 임금으로 유향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또 교부들의 풀이에 따르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바친 선물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황금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하고, 유향은 성전에서 초월적 존재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러시아에는 세 임금과 함께 길을 떠난 넷째 임금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넷째 임금은 아기 예수께 드릴 선물로 빛나는 보석 세 개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는 마음이 여리고 고왔다. 그가 길을 떠나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나 찾아보니 한 아이가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먼지구덩이에 누워 있었다. 그 젊은 임금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아이를 안고 방금 떠나온 마을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유모를 구하고 가지고 있던 보석 하나를 주며 그 아이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다음 길을 재촉했다. 별이 갈 길을 일러주었다. 그 가엾은 아이 생각에 그는 세상 고난이 다 자기 것인 듯 느껴졌다.

 

어느 고을을 지나다가 이번에는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 죽은 이는 그 집 가장이었는데 장례가 끝나는 대로 가족들은 노예로 팔려가야할 형편이었다. 그가 보석 하나를 그들에게 주고는 길을 떠나는데 인도하던 별이 보이지 않았다. 행여 소명에 불성실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괴로워할 때 홀연히 그 별이 다시 나타나 비추었다. 그는 별의 인도를 받아 전쟁이 한창인 낯선 마을에 다다랐다. 병사들이 그 마을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한데 모으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보석을 몸값으로 주고 그들을 구했다. 그 순간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지꼴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핍박받는 사람들을 도왔다. 어느 항구에서는 빚을 갚기 위해 갤리선의 노예로 끌려가는 한 남자를 대신해 오랜 세월 동안 노예로 일했다. 그때 그의 영혼에 사라졌던 별이 떴다. 그 내면의 빛은 이내 그를 넘치게 채웠고,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잔잔한 확신이 마음 가득 밀려왔다. 동료 노예들과 선원들은 그에게 어리는 신비한 빛을 보았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꿈속에서 다시 그 별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다. “서둘러라! 서둘러!” 한밤중에 일어나니 빛나는 별 하나가 그를 큰 도시의 성문으로 인도했다.

 

군중에 휩쓸려 도달한 곳은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는 언덕이었다. 그의 별이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린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지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다 겪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눈길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못에 뚫린 손은 고통에 구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고문당한 그 손에서 갑자기 한줄기 빛이 번쩍였다. 그 순간 깨달음이 번개처럼 넷째 임금에게 다가왔다. “여기가 내가 평생 순례해 온 그 목적지구나. 이분이 나를 그리움에 병들게 했던, 인간들의 임금, 세상의 구세주시구나. 이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통해 나를 만나주셨구나.”

 

넷째 임금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때 그의 손바닥에는 보석보다 빛나는 핏방울 세 개가 떨어졌다. 예수님이 울부짖으며 돌아가실 때 이 임금도 따라 죽었다. 그의 얼굴은 주님을 향해 있었고, 별빛 같은 한줄기 빛이 그 얼굴에 어려 있었다.

 

참 먼 길을 돌고 돌아 주님을 알현한 네 번째 동방박사의 이름은 알타반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창작해 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기 예수님을 위한 참된 경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 경배 예물을 드리기 위해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여정을 어떤 별빛을 따라 걷고 있는지요?

 

오늘 미사 중에 바치는 예물 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이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라, 그 예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고 받아 모시오니,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소서.” 미사 성제에 바치는 참된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나의 삶을 봉헌합니다. 집과 성당 간의 거리가 멀지만 항상 늦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성당이 멀어서 힘드시지요?’하고 물으면 아니요. 성당이 먼 것이 아니라 집이 성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뿐입니다.’하고 답하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는 그리스도의 빛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빛은 나의 마음속에 있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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