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일 월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강론을 준비할 때에는 언제나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게 된다. 그렇다고, 사제관에 타임머신 기계가 있지는 않다. 강론을 하게 될 시간은 이 강론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분명히 미래의 시간이다. 미래의 시간을 미리 현재에로 앞당겨서 생각해보고, 그 생각한 바를 글로 적어간다는 것은 흘러가버리고 마는 시간을 종이에다가 붙잡아 둘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는 것과 같아서, 강론 준비할 때마다 타임머신을 탄다고 말씀 드린 것이다.
태초에 시간과 공간이 무에서 창조되면서부터 시작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 흘러가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가 않다. 인간에게는 시간을 재는 단위라는 것이 있어서, 초, 분, 시, 일, 월, 년, 세기, 등으로 시간의 양을 잰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단위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식물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동식물들도 날의 변화, 달의 변화, 해의 변화에 따른 날씨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그에 따라 반응을 하기는 하지만, 사람만큼 그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 강론을 썼던 시간은 어제 그러니까 2023년 12월 31일 오후였고, 그렇게 쓴 강론을 하게 된 날은 2024년 1월 1일이니,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시간은 거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시간의 주인이신 분께 되돌려 드려야만 되는 것 또한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을 마치 자기가 돈이라도 주고 산 것처럼, 자기만을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대로,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생명이라는 기간 동안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요, 기회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 하느님에 의해 은혜롭게 베풀어진 것이라는 것, 내가 살아 있음이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움을 나누는 실천, 곧 사랑과 봉사를 통해 우리의 이웃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사실 행복이라는 것이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베푸셔서 존재하게 된 것이 우리들의 삶이요,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사람이다. 그 은혜로우심에 대한 자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또 우리를 스스로에게나 이웃에게 관대하게 하고, 마침내는 우리들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베풀어주시는 2024년 한 해를 오늘 우리는 새롭게 시작한다. 새롭다는 것은 때로는 우리에게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는 부정적인 느낌들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느낌을 저 멀리 한 켠에 물려 놓아도 좋을 만큼, 새롭다는 것은 우리에게 마음 설레는 기대와 희망을 던져 준다. 새로움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고, 다시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 새로움은 우리가 미리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고, 당연한 권리로 내어 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새로움은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받은 것,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고, 거저 공짜로 받은 것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시간은 그래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해 첫날, 2024년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래본다. 평화를 이루는 일,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해야 할 일이다.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은 참으로 많다. 궁핍과 소외와 고립, 그리고 불의에 맞서야 하고, 불평등, 차별, 억압에 맞서야 하며, 환경 파괴에 맞서야 하고, 전쟁 논리에, 안보의 논리에, 이윤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경제 논리와 노동착취의 논리에, 갖은 중상모략의 논리에, 비인간화의 논리에 맞서야 한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법도 용인하는 식의 악, 마귀들의 짓거리에도 맞서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느껴질수록, 두렵다고 느껴질수록, 우리 모두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이 말씀을 다시, 또다시 우리 마음에, 우리의 뼈에 새기며 올 한 해를 지내보자 : «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히브리 12,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