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정 축일)
참된 가족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면서 동시에 성가정 축일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아기로 오신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TV 드라마는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요즘은 전통적으로 주류였던 대가족 중심의 드라마보다는 미혼모 가정, 이혼 가정, 졸혼 가정, 1가구 1인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그리는 드라마가 갈수록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독신을 고집하면서 강아지하고 사는 세대도 많습니다. 그만큼 시대가 변했고, 가족 개념도 그에 따라 변했다는 이야기겠지요. 이제는 정상적인 가정이 무엇인지 각자의 생각에 따라 기준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가끔 신자들이 들려주는 외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식들의 이혼도 가슴이 아픈데, 노모를 두고 빨리 죽었으면 하는 아들도 있다고 말입니다. 하기야 며칠 전에 어떤 정치인이 "지금 가장 최대 비극은 노인네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거다. 빨리빨리 돌아가셔야"한다고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을 해서 세간의 뭇매를 맞은 것을 보면, 이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대 풍조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제 가톨릭의 가족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말씀은 부모에 대한 효를 신앙으로 연결시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죄와 축복의 원천이 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작금의 우리들에게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요즘 치매와 알츠하이머 환자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병이 예외적으로 일찍 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85세 전후로 초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지각을 잃은 부모를 모시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치매 전문 요양원에 모시면 좀 낫지만, 가정에서 직접 돌보는 자녀들은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그래도 우리 신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효를 다 해야 합니다. 유교 문화권의 옛 조상들은 부모가 죽으면 삼년상을 지내면서 시묘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부모가 나를 낳아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입혀주고 먹여주고 돌보아 준 시간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은덕을 기억하며 시묘살이를 하면서 고행을 했던 것이지요. 이 전통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부모가 늙고 병들고 짐이 되어도 부모의 은덕을 떠올리며 참고 끝까지 효를 다 해야 합니다. 부모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이지 인간 존재가 변질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4계명이 있습니다.
또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는 참된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역설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남편에게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아내에게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녀 차별이 없는 오늘날에는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차별이 없어졌다고 서로 너무 만만하게 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자말로 배우자를 서로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여보는 같을 如에 보배 寶, 당신은 마땅할 當에 몸 身. 여기에는 서로 귀하게 여기고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부부지간의 모든 불화는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상대를 향한 비교, 평가, 지적, 비난, 분노, 공격의 언어가 혼인 서약 때 했던 사랑과 존경과 신의를 깹니다. 입술로 3초 상처 주는 말은 가슴에 박혀 3년을 갑니다. 한편 부부 사랑의 결실이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은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안정을 찾고, 그들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사랑을 줄줄 압니다. 부모의 권위는 힘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조건 없이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하십시오. 조건을 요구하는 순간 가족 간의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조건을 너무 따지고 한 결혼은 사랑이 없으면 어떤 측면에서 사회생활의 연장일 뿐입니다. 필요조건 속의 계약이라는 말입니다. 또 자녀에게 너무 조건을 요구하면 아이는 숨 막히고 정서가 불안정하여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연애할 때 우리는 서로 비교하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존재만으로 충분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설사 무모하게도 희생을 한다 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마냥 좋습니다. 이 보다 아가페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미리 생각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저 태어난 것만으로 기뻐하며 만족합니다. 이목구비 다 있고 손가락 다 붙어 있고 발가락 다 붙어 있는 것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니 장애로 태어나도 내 귀한 자식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고, 기대에 부풀어 타인과 비교하면서 다그칩니까? 자녀의 적성과 능력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그들이 나의 욕망을 채워주기를 바랍니까? 자녀가 또 다른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라는 착각으로 얼마나 함부로 대합니까?
참된 가정의 요건은 성가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외아들 예수로 구성된 성가정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정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가정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아들 예수를 성전에 봉헌합니다. 오늘 봉헌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는 당시 평범한 서민들의 제물이었습니다. 성가정은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성가정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시메온 예언자가 마리아에게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럼에도 그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빛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내합니다. 더 나아가 성가정은 모두가 하느님께 자신들을 봉헌한 가족,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조건을 따지셨다면 우리는 창조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너무나 결함이 많고 부족한 피조물이니까요. 우리 가족들 간의 사랑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 또한 크다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서로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탓하지 말고 고마워하고 인정해주며 이해해 주면서 산다면 가정불화나 부부싸움이 어찌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부지간에 “여보 고마워, 나를 만나서 정말 고생이 많구려. 내가 부족함이 많아. 하지만 당신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소. 그간 정말 욕봤다.” 부모가 자식에게 “정말 잘했다. 대견하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넌 최선을 다 했어.” 자식이 부모에게 “아버지가 정말 존경스럽니다.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열심히 사셨어요. 이제는 저희들 걱정 마시고 편히 쉬세요.” 이상의 말들이 참 이상적인 대화 같아 보이지만 성가정이 그랬듯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넘친다면 아무리 역경과 시련이 찾아와도 더 단단해 질 수 있는 가정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 가정이 성가정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