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강론)
빛으로 오시는 주님
성탄 축하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서로 인사 나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2천 년 전에 오셨던 그분께서 오늘 다시 우리 본당 공동체에, 우리 가정에, 각자의 마음속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기에 여전히 부족하고 흠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성탄을 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빛이신 당신이 어둠인 저에게 오시고, 생명이신 당신이 죽음인 저에게 오시고, 의사이신 당신이 병자인 저에게 오셨습니다. 영원한 순결이신 당신이 수많은 죄의 진흙인 저에게 오시고, 무한이신 당신이 유한인 저에게 오시고, 영지이신 당신이 무지인 저에게 오셨습니다.”
성탄의 의미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어둠이고 죽음이며, 병자이고 죄인이며, 유한하고 무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런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것의 주인이신 분, 감히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시고 영원하신 분, 또 창조주이시고 심판자이신 그분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이 선택하신 것은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무력함, 무지함, 가난함, 비천함, 유한함, 비참함, 나약함, 신이 겪게 되는 수모와 수치였습니다. 당신은 신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철저하게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처지의 인간이 되어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굳이 왜 인간으로 오셨는가가 성탄의 묵상거리입니다.
사랑이 극에 달하면 무엇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최고조에 달하면 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려는 것은 인간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아지시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프면 대신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녀의 고통이 그대로 자신들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부부관계에서는 한쪽이 먼저 떠나면 꽤 오랜 시간 상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형제관계는 어떻습니까? 동생이 어디서 맞고 돌아오면 형은 막 화가 나서 못 참습니다. 동생의 상처와 수모가 자신의 상처와 수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또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아버지는 자신보다 어린 상사에게 수모를 겪고 욕을 먹어도 꾹 참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는 굶어도 배고프지 않습니다. 자식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신의 권위가 추락당해도, 피조물인 인간에게 외면당해도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죽음조차도 감내하셨습니다.
한편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습니다. 강생의 신비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최고 표현입니다. ‘영원’이 시간 안에 들어오셨고, ‘전능’이 무력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무 힘도 없는 아기로 태어나시고, 무한히 부유하신 하느님께서 말구유 안에 누우시고, 영광의 하느님께서 추위에 떨며 배고픔으로 울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생명, 살, 피, 정신 그리고 마음은 다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기 위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과 같은 신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이 세상에 뛰어드셨습니다.
우리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미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마구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가 우리를 보고 방긋 웃고 있다는 상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자신의 무한한 힘과 영광을 버리고 아기의 무력함과 가냘픔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실제 마구간의 아기는 추위에 떨며 배고픔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기에게 이미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배고픔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과 절망을 잘 아십니다. 측은지심은 내가 상대방의 고통에 동참했을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가련한 이를 보면 애간장이 타는 마음을 주님께서는 잘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닮으시려고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그분의 은총을 체험한 죄 많은 우리는 거꾸로 하느님을 닮으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최고의 경배 예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아기 예수님을 닮으려고 했을 때 세상은 더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