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성탄의 기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대의 합창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대림 시기 참아왔던 대영광송을 우리는 힘차게 불렀습니다. 오늘 성탄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려왔습니까? 2천 년 전에 오셨던 그분이 올해에도 또 다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올해도 역시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고자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의 참화를 겪는 나라들도 있고, 빈곤과 헐벗음으로 겨울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축하하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만큼은 축제의 시간으로 보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한 아기의 탄생으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죄악의 역사였지만, 주님이 오시고 난 다음부터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노래한 그분의 영광은 감쳐줘 있습니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세주가 너무나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복음은 황제의 이름을 알리면서 시작합니다. 그 이름은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황제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그의 권세는 호적 조사로부터 시작됩니다. 호적 조사는 세금 납부와 군대 징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역설적에게도 오늘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머리를 조아립니다. 절대 권력 앞에 성가정은 복종해야 했습니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태 중의 아기는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에 가야 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은 사람이 되기로 하신 것입니다. 메시아 역시도 세속 권력 안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장차 사람이 되신 하느님, 즉 그리스도는 황제를 능가할 것입니다. 왕 중의 왕! 사랑과 평화의 왕이신 그분은 비천하게 오셨지만 그 어떤 황제도 하지 못한 세상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세상은 구세주가 오셨음에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외면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호적 등록 기간 동안 인파가 몰려 숙소를 구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그리스도 탄생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과 외면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의 등장이 화려하고 위풍당당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메시아는 참된 메시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사람이 되기로 한 이상 모든 사람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구유에 누어계셔야 했습니다. 구유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먹이는 가장 큰 밥그릇입니다. 구세주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저 누추한 곳에 요람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긴박했던 상황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구간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그들의 벗이 되기 위해 마구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본 사람들은 들판에서 밤을 새우며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천사가 먼저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 차고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천사가 아무리 알려준다한들 그들이 믿었겠습니까?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의 메시지가 탐욕과 오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먹힐 리가 없지요. 그저 그들에게 성탄은 하나의 축제이고 돈벌이의 수단일 뿐입니다. 혹은 진심이 없는 그저 정치적인 수사이거나 공허한 말 잔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마굿간 세트와 아기 예수님 모형을 보십시오.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동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다릅니다. 사실 구유는 추운 데에 있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묵상하면서 창안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실제 아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가축들의 냄새와 울음소리, 산파도 없이 아기를 받아야 했던 요셉의 속 타는 마음, 훈기도 없이 누추한 마굿간에서 첫 출산을 해야 했던 마리아의 비참함, 위대한 왕의 탄생에 축전을 전할 손님은 고작 가난하고 무식했던 양치기였습니다. 그때 상황을 오감으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런 곳을 선택하실 겁니다. 어쩌면 아기 예수님은 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세상에 오신 것이 맞을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강생의 신비는 고통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찾으셔야 했고,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기 위해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아기는 구유에서 웃고 계신 것입니다. 탄생 자체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유 경배를 했고, 구유 예물과 함께 성경필사와 대림실천표를 봉헌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어떤 선물을 즐겨 받으실까요? 무엇보다 당신처럼 아기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아기는 미약하지만 순수합니다. 아기는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작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도 아기 예수님이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동시에 우리도 작은 아기 예수님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성탄의 메시지를 가정과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오늘 밤 기도하도록 합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우리의 작은 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축제를 즐기면서 용서하고 화해하며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이 우리 삶 안에서도 탄생하시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