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

 

깨어 있어라!

 

(대림 교리 후)

 

세상은 성탄 축제와 성탄 특수로 들떠 있다. 우리는 이미 성탄의 상품화 시대에 살고 있다. 성탄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교회가 세상을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속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아기 예수님이 바라시는 성탄은 지금의 성탄과 완전히 다르다. 성탄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를 죽이는 행위이고,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다. 그분은 우리를 영적으로 부유하게 하시려고 당신은 가난하게 이 세상에 오셨다. 따라서 성탄을 기다리면서 내적 기쁨을 간직해야 하지만, 대림시기에는 좀 차분하고 절제 있게 생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 제1주일 복음은 깨어 있어라!”고 한다. 위령성월과 그리스도왕 대축일 전후로 자주 듣는 말씀을 또 다시 들려준다. 깨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먹고 마시고 쉴새 없이 세속적인 쾌락을 찾고 있는 상태에서 어찌 고요히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자선은커녕 과소비와 사치를 즐기는 상태에서 어찌 가난한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아기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축제와 송년회 등으로 기도할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어찌 성탄을 기뻐하는 천사들의 대영광송을 들을 수 있겠는가?

 

깨어 있다는 말은 주님께 대한 영적인 자각과 집중을 말한다. 그분이 내 삶의 중심이 아닌데, 또 그분의 말씀이 내 삶의 원동력이 아닌데 어찌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근본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을 때 그 본질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잠든 상태에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하며, 본당 봉사 및 신심 단체 활동을 할 수 있다. 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잠자고 있으면 그 미사는 허례허식이고, 그 영성체는 요식행위이며, 각종 봉사와 신심 활동은 인간적인 만족과 친교를 위한 세속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겉으로는 신심 깊고 착한 신자인척하지만 속으로는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 찬 내 자신을 보라. 위선과 허위, 교활한 입술과 비겁한 자기방어는 본당 신부와 타인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속이지 못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참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가 모시는 영성체는 신성모독임에도 성체를 분배하는 신부는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그에 응당한 벌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말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과 같다. 냉담자가 달리 냉담자인가? 주일 미사 참례하고 교무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저 신앙을 사회생활의 한 방편 정도로 여기고 성당에서조차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진정 냉담자 아닌가? 그리고 몸은 어쩔 수 없이 성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이 진정 냉담자가 아닌가?

 

각자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잠자고 있거나 식어 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