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레지오 마리애 훈화
어느 날, 한 고관 나리가 어떤 곳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무장한 병졸이 엄숙한 얼굴로 지키고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처는 허허벌판일 뿐 중요하다고 생각될 만한 건물은커녕, 물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리는 파수병한테 물었습니다. “자네, 무엇을 지키고 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파수병은 부동자세로 “예, 저는 오로지 상관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고관 나리는 상관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관 역시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나리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는 높은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오로지 빈 명령만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바뀌어 옛날 먼 옛날에 큰 성이 있었고, 그 성안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어 여러 가지 화려한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꽃을 좋아하는 왕이 꽃밭 사이를 산책하다가 후미진 곳에 핀 아주 작은 낯선 꽃을 발견하였습니다. 왕은 이 가련한 꽃이 마음에 들어 혹시나 짓밟힐까 염려하여 파수병을 세워 이 꽃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습니다. 옛 성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꽃밭은 허허벌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빈 명령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복음에 나타나는 주님의 명령이 ‘옛날 옛적의 이야기’처럼 빈 명령으로 되풀이되는 오늘의 현실이지만, 나의 마지막 날에 주님의 이 명령은 나의 영원한 삶을 심판하는 살아 움직이고 심판하는 명령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마감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 “오른쪽으로 갈래, 왼쪽으로 갈래?”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상처 주고 소외시킨 사람들을 한 사람씩 떠올리며, 또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마음으로 주의 기도 한 번씩이라도 바치며 지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 왕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