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

 

최후의 심판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세속 달력은 아직 한 달 이상 남았지만, 교회 달력은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해가 바뀝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인간을 구하러 2천 년 전에 이미 세상에 오셨고, 승천 후 아직 재림하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기립니다. 그리스도왕은 세속 군주나 통치자와 달리 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의로운 심판관으로서 인간과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 우리에게 무엇을 질문하실까요? 그 심판의 기준은 오늘 복음에 나오듯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이 복음을 문자 그대로 체험한 성인이 계십니다. 1111일은 마르티노 주교 축일인데, 이 성인은 15세에 예비신자가 되었지만 곧 기병대에 징집되어 군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체험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 성인은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납니다. 당시 군인으로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던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그 절반을 걸인에게 나눠줍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자기가 걸인에 준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도 십자가 성 요한의 말씀을 인용하여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기준 또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주 듣는 말씀이지만,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분명히 그 사람은 천국에 올 줄 알았는데 없어서 놀라고, 둘째는 절대 못 올거라 생각했는데 천국에 와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천국에 와 있음에 놀란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교포 사목 중에 캐나다 토론토 미술관에서 본 상아로 만든 조각품을 소개하겠습니다. 너무 정밀해서 돋보기로 들여다 봐야 그 안의 군상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계란 형태의 상아 조각품인데, 윗부분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고 아랫부분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거지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반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놀랍게도 주교도 있습니다. 주교 모관을 쓴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지옥불 속에 있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고위 성직자의 최후를 경고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목자의 직무는 양들을 잘 돌보고 특히 가련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 직무를 소홀히 하면 받을 벌이 더 큽니다.

 

심판의 기준이 사랑이라면 우리 삶의 기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미사를 왜 드립니까? 또 기도는 왜 바칩니까? 성당에는 왜 다닙니까? 살아서는 축복받고, 죽어서는 천당 가려고 그리하십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적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닮아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그리스도화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바를 모범 삼아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 1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닿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마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 16-1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연중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 달력은 해마다 종말을 반복해서 고합니다. 내년에도 위령성월이 찾아올 것이고, 연중 시기의 마지막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찾아오겠지요. 왜 이렇게 반복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잘나봐야 먼지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반드시 종말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종말이 우리 삶의 찬란히 빛나는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잘 준비해야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과연 가족들을, 교우들을, 그리고 가련한 이웃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잠시 나의 삶을 돌아봅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