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 특강

 

四末의 노래

 

머리말

 

무슨 일을 하든지 너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라”(집회 7,36). 사람은 누구든지 한 번은 죽고, 심판을 받아야 하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말단 문제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형 선고를 받고 나왔다. 이 사형 집행 기일은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육박한다. 여기에 우리의 끔찍한 영원 문제가 달려 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죄를 범할 수 없고, 냉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이것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임종에 가까운 중병 환자가, 자기병이 중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그 심리와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195211월 위령의 날

부산 수정동에서 윤형중 신부

 

1

백년 천년 살드시 팔딱 거리던

청춘이라 믿어서 염려 않던 몸

거기에도 죽음은 갑자기 덤벼

용서 없이 목숨을 끊어 버린다.

 

2

죽음에는 남녀도 노소도 없고

빈부 귀천 차별도 없다 하지만

설마 나도 그러랴 믿고 있더니

이 설마에 결국은 속고 말았네.

 

27

아리따운 자태는 형용도 없이

흥건하게 널 속에 괴어 썩는 것

화장품의 향내는 어디로 가고

코 찌르는 독취만 가득하구나!

 

28

거울 앞에 앉아서 꾸미던 얼굴

구멍 세 개 뚜렷한 해골 바가지

신식 치장 다 차려 모양내던 몸

엉성한 뼈 몇 가락 이게 네 차지.

 

29

굶주리고 헐벗은 가난뱅이는

티끌같이 눈 아래 내려 보더니

잘났다는 제 몸은 얼마 잘나서

먼지 되고 흙 되어 흩어지는가?

 

30

어둔 하늘 유성이 스치고 가면

자취까지 다시는 볼 수 없듯이

번개같이 순식간 살던 내 몸은

이 세상에 영원히 사라졌도다.

 

35

여보시오 벗님네 이 내 말 듣소.

지금 말한 이 죽음 잊지 마시오.

남의 일로 알고서 잊지 마시오.

그대 역시 조만간 당할 것이오.

 

39

우리 죽어 사심판 들어갈 때는

부모 처자 형제도 따를 수 없소.

친한 친구 동지도 따를 수 없소.

혈혈 단신 혼자만 끌려갈게요.

 

42

지공 지엄 주 대전 압령되며는

자손들의 선행도 소용이 없소.

조상들의 공로도 소용이 없소.

자기 자신 소행만 저울질하오.

 

43

지옥 불에 떨어진 저 모든 영혼

가고 싶어 일부러 간 줄 아시오?

하루 이틀 회개를 미루어 가다

삽시간에 뜻밖에 벼락 맞았소.

 

81

털끝만한 위로도 없는 가운데

일초라도 형벌은 쉬지를 않고

실낱 같은 희망도 없는 가운데

생명 끊어 자살도 할 수가 없네.

 

85

지옥벌이 과중타 원망 마시오.

지존 무대 천주의 무한한 사랑

이 사랑을 배척한 배은 망덕엔

무한한 벌 마땅히 있어야 하오.

 

119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나거든

그 하루를 최후로 생각들 하고,

밤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되거든

임종하는 자리로 준비들 하소.

 

<임사 체험자들의 공통 증언>

유체 이탈 또는 몸 밖으로 나감

몸 상태의 변화

터널을 통과함

다른 영적 인간들을 만남

빛의 존재를 만남

지나온 삶을 되돌아봄

평화와 고요를 맛봄

되돌아옴

삶이 변화됨

 

사례:

1) 야음성당 전 회장님 임사체험

2) 소록도 숙이 누나 임사체험

3) 조모 강데레사 할머니 임종 체험

 

임상적으로 사망한 후 너무나 멋진 다른 세상에 갔다가 이 세상으로 되돌아온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표징을 수용하든 거부하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파스칼의 내기)

하느님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다.

실존이라는 배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내가 그분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죽을 때 내가 놓친 모든 것과 맞닥뜨릴 위험이 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어서 내가 지상 생애 내내 그분과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죽음의 순간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내기에서] 진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겠지만,

[내기에서] 이긴가면 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팡세

 

그들은 임사 체험 이후 마치 두 번째 생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생을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보지 않는다. 그들의 영성은 강화되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첫 자리에 두며, 삶의 거룩함을 의식하고, 죽음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호세 마니양갓 신부의 천국, 연옥, 지옥 체험기

 

뇌사는 실제로 죽음과 동일한 것인가? 심장 박동이 정지되어 임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의식이 남아 있거나, 심지어 사람이 실제로 죽어 몸이 차갑게 식을 때에도 의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가?”

 

할머니의 임종을 보면서 분명한 것은 숨이 멎은 후에도 인간 의식은 어느 정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임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서 계속되는 이 의식 상태는 과학에 중요한 도전을 제기한다. 의학계에 따르면, 오직 뇌만이 생각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것이 입증된 적은 없다! 이 이론을 옹호하는 이들은 임사 체험의 실재에 반대한다. 뇌 기능이 죽었는데도 임사 체험이 존재한다면 의식의 기원이 다른 곳에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사 체험 옹호론자들은 임사 체험은 의식이 육체에서 분리되었다는 사실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의식은 뇌와 독립적임을 시사했다. 그러므로 뇌는 라디오처럼 송수신기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라디오가 고장 나면 아무리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한다 해도 그 소리를 내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임사체험이 보여주는 사후 세계는 실재하는가? 심리학자들은 임사체험을 일종의 환상으로 치부한다. 아무도 완전히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다. 임사체험은 어쩌면 의학적으로 죽었지만 아직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체험하는 환시일지 모르겠다. 환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상징언어이지 물리적인 형벌이 아니다.

 

지옥, 부활, 천국, 영원한 생명 같은 저세상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지옥은 물리적인 불도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를 벌하기 위해 준비하신 고문 장소도 아니다. 지옥은 하느님 사랑을 거부하는 고독의 상태를 말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사랑이 죽음의 고독을 부수고 우리 삶의 장소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제 가톨릭 교리서가 말하고 있는 천국, 연옥, 지옥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심판

 

각 사람은 죽자마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기준을 판결하는 사심판을 통해서 죽지 않는 그 영혼은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대가는 정화를 거치거나, 즉시 하늘나라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즉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천국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는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참 모습을”(1요한 3, 2) 맞대고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함께하는 이 완전한 삶, 삼위일체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하는 삼위일체의 생활과 사랑의 이 친교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지고하고 결정적인 행복의 상태이다.

 

연옥-마지막 정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교회의 전승은 성서의 어떤 대목들을 참고(1코린 3,15; 1베드 1,7)로 해서 정화하는 불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강한 빛에 대한 적응기? 영성생활의 3단계 정화-조명-일치, 정화의 단계 역시도 하느님 품 안이다.

 

지옥

질문: 성경이 말하는 그런 지옥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런 지옥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렇다면 그 하느님을 우리는 과연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과 결합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중한 죄를 짓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3,15)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형제들인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을 도와주기를 소홀히 한다면 당신과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마태 25, 31-46) 사죄(死罪)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을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분들과 이루는 친교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믿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마태 5,22.29; 13, 42.50; 마르 9,43-48 참조) “지옥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 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 (마태 10, 28;13,41-42; 25,41)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사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후 즉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 곳에서 지옥의 고통,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있다.

 

지옥의 유황불이나 구더기등은 이승에서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상징이다. 3차원의 공간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4차원 이상인 저 세상을 짐작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분명한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상징 언어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발다살 인간 스스로 선택하고 자처한 절대고독”.

 

죄는 사랑의 결핍, 지옥은 하느님 사랑 0%가 아니라 의 상태. 하느님이 하나도 없는 순도 100%짜리 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지옥에 해당하는 사람끼리만 모아놓으면, 거기가 아비규환이 되는 것이다. 이 상태개념이 지옥이다. 사죄 속에서 죽으면 그 상태로 영혼이 지속된다. 스스로 회개와 개선의 여지가 없다.

 

종말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우리의 재산을 훔치러 오는 도둑’(마태 24, 39-44)처럼 맞을 것인가?

신부를 구하러 오는 신랑’(마태 25, 1-13)처럼 맞을 것인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살 것인가, 펼치고 살 것인가?

 

언제고 제 영혼이 이 몸을 떠나겠지요. 그게 언제일까요? 겨울입니까? 아니면 여름입니까? 도시? 아니면 시골? 낮에? 아니면 밤에? 갑자기? 아니면 천천히? 병으로? 아니면 사고로? 제 죄를 고백할 기회는 가지게 될까요? 죽어가는 저를 도와줄 사제는 있을까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도 제가 바라는 것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올 하느님, 그 중요한 날에 저를 당신 품으로 안아주십시오. 그날이 저에게 행복한 날이 될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날이 슬픈 날이어도 좋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몸이 떨립니다만, 그래도 당신 홀로 저를 구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하늘 나라에 대한 당신의 약속에 고정시켜 주십시오. 주님, 제 발걸음을 이끌어, 영생을 향해서 곧장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가지 못하게 등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게 하소서.”-성 프란치스코 드 살

 

종부성사의 중요성

병자도유, 고해성사, 노자성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