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참으로 높은 사람
(천국 간 본당 회장님 이야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종교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자의식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스승이고 선생님이다. 다시 말해 너희들은 다 내 밑이다.”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겁고 힘겨운 짐이란 율법 규정 전체 613가지 조항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일반백성들이 지키기 어려운 율법 조항을 해석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본인들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대포장된 성구 갑과 옷자락 술을 지적하시는데, 이 또한 종교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구갑은 율법의 핵심이 되는 말씀을 적은 양피지를 넣은 조그마한 가죽 상자로써 유다인들은 늘 또는 기도할 때 이것을 이마와 왼쪽 위팔에 매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 5)는 구절을 양피지에 써서 성구 갑에 넣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또 옷자락 술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상기시키는 구실을 했습니다. 민수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말하여,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여라. 그리하여 너희가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고, 너희 마음이나 눈이 쏠리는 것, 곧 너희를 배신으로 이끄는 것에 끌리지 않도록 하는 술이 되게 하여라.”(민수 15, 38-40)
‘성구 갑’과 ‘옷자락 술’의 원래 취지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백성들로부터 찬미 받기 위해 종교적 허영의 도구로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한편 오늘 예수님께서는 “스승”, “아버지”, “선생님”이라고 불리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사실 “스승”, “아버지”, “선생”은 모두 율법 학자들을 일컫는 명예 호칭입니다. 그 가운데 “스승”과 “선생(=랍비)”은 현재 활동 중인 율법 교사를 말하며, “아버지”는 과거에 특히 존경받던 스승을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당시 최고의 명예를 드러내는 호칭 안에는 존경과 권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호칭을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그 호칭을 받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외아들 그리스도 한 분뿐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호칭 안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호칭을 자주 듣고 싶어 하는 순간 나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영적 교만과 종교적 허영심에 빠지고 맙니다. 즉, 내가 가르치는 율법이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가르치는 율법이 나를 향해 있고, 나를 찬양하게 하니 함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두고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은 실제로 내가 영적인 아버지의 자질을 갖추고 있어서 들어야 하는 호칭이라기보다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달라는 신자들의 희망과 기대를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가 되기 전에 저도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였습니다. 서품을 받고 갑자기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서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 역할이 바뀐 것입니다. 만일 존재가 바뀐 것이라만 그것은 서품받는 순간부터 그리스도께서 더 특별한 방식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여전히 하느님 앞에서 사제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뽑아 세우셨기에 천부당만부당하지만 겸허히 사제직을 수행할 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은 권위와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콘클라베에서 비밀투표로 뽑히는 교황님은 추기경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과분하다고 여기지 본인이 잘나서 당선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자신의 모든 공식 문서에 서명하기 전에 그 위에 먼저 라틴어로 ‘Servus servorum’ 이라고 씁니다. ‘종들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종들은 각 지역 교회의 주교들을 말합니다. 즉, 교황은 각 지역 주교들의 머슴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본당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봉사자들은 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자로 어른 장(長)자를 써서 회장, 부회장, 분과장, 단장, 제단체장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교회 정신에 따르면 그 장들은 그저 역할과 직책이 다른 봉사자일뿐 동등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전포성당도 섬김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