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죄인들의 교회

 

우리가 주일미사와 묵주기도 할 때 마다 외우는 사도신경 중에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듯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룩하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정말 거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 구성원들을 떠 올려 보십시오. 과연 그 말이 나오는지. 교회 구성원들은 허물이 많고 오점 투성이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결코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인간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세상 끝날까지 머무시면서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성령께서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이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셨는데 오늘 복음도 그 연장선에서 포도밭 주인의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벌써 눈치채셨겠지만 큰아들은 세리와 창녀가 대변하는 죄인들이고, 작은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대변하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회개하는 죄인들이고, 작은아들은 회개하지 않는 의인들입니다. 또 큰아들은 몸으로 회개를 실천하는 죄인들이고, 작은아들은 말로만 회개를 부르짖는 의인들입니다. 이 두 아들의 결말은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가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 18, 26-27)

 

교회 안에서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합니다. 우리 안에는 의인도 있고 죄인도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식물의 세계에서는 밀이 나중에 자라서 가라지가 되는 일도, 거꾸로 가라지가 나중에 자라서 밀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종자의 유전자는 정해져 있다는 말이지요. 마치 사자가 풀을 뜯어 먹는다고 소가 되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는 유전자 변형이 가능합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 있고,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있습니다. , 가라지 같은 인간이 회개하면 천사가 되고, 밀 같은 인간이 타락하면 악마가 됩니다. 따라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시는 것은 마지막까지 죄인들의 회개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가톨릭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이렇게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자비의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눈에 죄인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다 같은 죄인입니다. 교회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위대한 성인들도 대부분 한 때 죄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 성 아우구스티노,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등. 사도 바오로의 전과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6계명을 밥 먹듯이 어긴 방탕아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체험하기 전에 그는 부유한 상인의 상속자로서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성 이냐시오의 전직이 무엇입니까? 외교인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군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하느님 앞에서 감히 자신이 의인이요 선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근원적으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죄인이 죄인을 단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의 대상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과 용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죄인에서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죄인까지도 품을 수 있는 관용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