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일)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전례독서는 오랜 세월 교회가 고심해서 만든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최고의 걸작입니다. 큰 원칙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3독서, 둘째는 3년 주기, 셋째는 조화와 준연속의 원칙입니다. 하나씩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3독서는 주일이나 대축일에 항상 세 독서를 봉독합니다. 제1독서는 구약성서를, 제2독서는 신약의 편지를, 그리고 제3독서는 항상 복음을 봉독합니다. 이로써 구약의 약속과 예표가 신약에서 실현되고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됨을 체계적으로 들려줍니다. 두 번째 원칙은 3년 주기인데, 공관복음의 순서에 따라 가해는 마태오 복음, 나해는 마르코 복음, 다해는 루카 복음으로 구성되며, 요한복음은 사순시기 중반부터 부활시기 동안 봉독됩니다. 올해는 마태오 복음 차례입니다. 끝으로 조화와 준연속의 원칙인데, 먼저 조화는 제1독서, 화답송, 복음의 내용이나 주제가 서로 연결됨을 말하며, 준연속이란 제2독서와 복음은 성경 본문의 순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특별시기나 축일 외에는 제2독서는 제1독서와 복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늘 전례독서를 예로 들어 봅시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포도밭의 주인에 비유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자롭고 자비로워 누구에게나 정당한 몫을 주시는 관대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밭 주인은 이른 아침과 오전 아홉 시, 정오와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들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쳐줍니다. 그러자 먼저 온 이들이 부당하다고 항의합니다.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먼저 온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은 기존 합의에 따른 정당한 일당이고, 맨 나중에 온 이들에게 일당을 똑같이 주고 말고는 자기 소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시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관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를 말합니다. 이미 이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켜 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은 맨 마지막에 온 일꾼들입니다. 이들은 죄를 짓긴 하였지만, 여전히 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구원의 대상입니다. 사실 오후 다섯 시쯤에 온 이들은 게을러서 늦게 온 것이 아니라 하루종일 일감을 찾아 나섰지만 아무도 고용하는 이가 없어 밖에서 서성이던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세리와 창녀들로 대변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율법을 어기고 살았지만 뒤늦게 회개하여 결국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꼴찌들을 구원받아야 할 첫째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인간은 경제적 계산을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에 근거한 계산을 하십니다. 따라서 포도밭에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는 용서와 자비가 넘치는 나라이고, 꼴찌도 첫째가 될 수 있는 희망과 기회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렇게 넓고 깊습니다.
이 메시지를 제1독서인 이사야서가 예표가 되어 이렇게 언급합니다.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어떻습니까? 제1독서와 복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제1독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화답송은 어떻습니까? 시편 145편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역시 복음과 일맥상통하지요. 이것을 노래로 바치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전례 독서의 원칙을 알고 말씀을 읽으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이것은 개신교에는 없는 것이지요.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어떤 목사님이 천주교의 전례독서책을 구하더라구요. 자신들한테는 없는 것인데 설교할 때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전례 독서의 원리를 알았으니 매일 미사책을 읽을 때마다 제가 일러준 대로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 삶으로 돌아옵시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의 일상 안에서 적용해 봅시다. 인간의 계산법과 하느님의 계산법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인간의 계산법에 따라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같은 신자끼리도 작은 흠집만 봐도 마구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해심과 관대함이 없는 이는 결국 첫째가 꼴찌가 됩니다. 하느님의 계산법은 부족함이 있는 자도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그가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관대함입니다. 우리 안에 일찍 입교하여 수계생활을 오래 하신 분도 있고, 늦게 입교하여 경력이 짧은 초보 신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눈에는 다 같이 사랑받아야 할 자녀들입니다. 또 미사를 집전하다 보면 무슨 연유에서인지 늦게 입당하여 바로 성체를 모시는 신자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말씀의 전례 전까지 입당하지 않은 지각자들에게 성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옹졸한 분이 아니십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면 성체를 모셔도 됩니다. 어찌 부모가 자식이 밥때를 못 맞추었다 하여 밥을 굶기겠습니까? “성체는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영약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지요. 다만 사정이 있어 늦게 입당한 신자는 영성체 후 전례 독서를 읽고 묵상하여 거룩한 신비를 보충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잘못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빠르고 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처럼 후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됩시다. 그래야 완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잠시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아멘.
노동력이 부족한 이도 끌어안아 주시는 주님에 대한 생각, 소외된 이도 우리 이웃이라는 생각으로 묵상했었는데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