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9. 1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의 순교

 

저는 개인적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조상입니다. 본관이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데, 족보상으로 김대건 신부님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저희 직계 조상들은 숙종 때 당파 싸움의 희생양으로 유배를 당해 지금의 강원도 영월 고성리에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고, 종갓집 대대로 하느님을 모르고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를 만나면서 세례를 받았고 성가정을 이루면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제 작년이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었는데, 역사는 돌고 돌아 천주교 불모지인 우리 집안에서 첫 사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비록 제가 김대건 신부님의 후손이지만 그분의 희생과 열정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과거 박해 시대에 비하면 지금의 사제생활은 너무나 안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자유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순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대에는 더 이상 적색 순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대보다도 세속의 박해는 심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박해라고 느끼지 못할 뿐이지요.

 

우리는 갈수록 신앙생활하기 힘든 사회적 구조와 풍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첫째, 가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출산, 1인 가정, 비혼, 졸혼, 이혼, 불륜이 넘쳐납니다. 혹시 자녀가 있어도 다 따로 생활합니다. 다들 바쁩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함께 밥 먹고 대화할 시간이 없습니다. 생계와 사교육을 위해서 맞벌이는 기본이고, 조부모들이 손주 돌보기를 해 주지지 않으면 집 장만하기 힘든 세상이 왔습니다. 신앙은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되물림되는 것인데, 신앙을 전수할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부모는 신앙은 선택이라면서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자녀가 성장하면 선택에 맡기겠다고 합니다. 건강과 학업에 관련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로 시키면서 신앙만큼은 마치 자격증 따는 것처럼 필요하면 그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신앙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어찌 생명을 선택하겠습니까? 정녕 자녀를 사랑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제 부모가 저를 신앙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사회가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타협과 양보 없는 좌우 진영 논리로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상호 비방과 집단 공격으로 극단적인 대립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국가 정책에 반대하면 빨갱이이고, 찬성하면 매국노입니다. 또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고 묻지마 범죄와 영아 살해 및 낙태가 판을 칩니다. 또 어른들을 모방하는 청소년들은 어떻습니까? 가출과 비행 청소년들이 늘어가고, 탈선과 학교 폭력, 성매매와 마약이 도처에 즐비합니다. 초등학교들이 쓰는 사이버 언어들을 보십시오. 온갖 욕설과 비방, 협박과 포르노가 죄인 줄도 모르고 마구 퍼 나릅니다. 함께 따돌리고 욕하지 않으면 친구를 사귈 수 없다고 하지요. 겉모습은 천진난만한 아이인데 쓰는 말은 어른들을 그대로 흉내 냅니다.

 

셋째, 소비하지 않으면 루저(=열등한 사람)가 됩니다. 무한 경쟁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며 소비하는 것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생태환경과 빈민구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영적인 휴식도 없이 과도한 여가 즐기기에 빠져 삽니다. 무절제한 소비생활 안에는 하느님도 이웃도 자연도 없습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종교조차도 소비 상품이 되어 버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종교도 마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소비합니다. 본당 신부가 나와 맞으면 나오고 맞지 않으면 냉담합니다. 신앙조차도 내가 기준입니다. 또 세속화의 영향으로 교회 전통인 순명과 희생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개인의 권리주장과 끼리끼리 문화가 공동선보다 우선입니다. 또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기복신앙이 성행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거래가 되어버렸습니다. 기도의 대가로 세속적인 복을 청합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고,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 신자 중에 일이 안 풀리면 점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끝으로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공동체에 소속되기를 거부합니다. 혼자서 조용히 미사만 드리고 그 어떤 모임도 활동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시류를 비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성실히 가톨릭 전통을 지켜며 사는 신자들이 더 많습니다. 이제 현대의 순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세상의 가치와 싸우고 비신앙적인 풍조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과거 순교자들은 당시 잘못된 사회 제도와 풍습에 맞섰습니다. 노비를 해방시켰고, 첩을 청산했으며, 신분제를 뛰어넘어 차별 없이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교우촌에서의 형제적 사랑과 나눔은 그 당시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조상제사를 문제 삼았지만, 그것은 표피적인 명분이고 실제로 유교 통치 이념 위에 세워진 계급사회에 대한 도전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어지럽히는 혹세무민자로 낙인찍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의 순교는 어쩌면 성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지향하며, 절제 있는 소비와 영성 추구의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순교자는 없지만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 후손들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항상 세상의 유혹과 타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거스르는 우리를 바보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원조 바보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 바보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잠시 오늘날의 순교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