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 17)

 

(신자 사칭 보이스 피싱 이야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신자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 타일러야 하고, 또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 당국에 알리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형제로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옳고 그름을 다툴 여지가 없는 명백한 범죄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신자 간의 사기, 상해, 횡령, 갈취, 성폭행, 무고죄 같은 범죄 말입니다. 이 경우 오늘 복음에 따르면 교회는 결국 세속 법정으로 가서 신자 간에 끝장을 보기 전에 가급적 죄지은 자의 진심 어린 회개와 사죄, 그리고 합의와 보속으로 화해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이방인이나 세리 취급하라고 한 것은 파문하여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논리를 신자 간의 모든 갈등과 대립 관계에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실정법을 어긴 명백한 범죄가 아니라 신자 간의 오해와 알력으로 인해서 생긴 갈등과 상처인데, 그것을 자기 딴에는 정의라고 생각하고 신자 개인이 찾아가서 지적하고, 아니면 몇몇이 집단으로 단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오늘 복음 말씀을 곡해한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가 있으면 처음에는 혼자, 두 번째에는 다른 한 명 혹은 두 명을 더 데리고, 세 번째는 교회 당국에 알리고 그럼에도 듣지 않으면 파문시켜 버리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자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우리 신자끼리 상호 이해가 부족하거나 자신의 편견과 아집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인간적인 부족함과 한계 때문에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와 모멸감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불쾌하다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거나 심지어는 본당 신부에게 찾아와 공식적으로 고발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의 판단으로 서로를 단죄하기보다 상호 간의 이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는 신자 간의 세대 차이와 성향 차이가 큽니다. 전후 세대, 근대화 세대, 디지털 세대, 그리고 MZ 세대. 모두 생각하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러나 저마다 머물러 있는 시대 정신이 다르다고 너는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 공동체 안에는 본당 설립 50년 역사 안에서 터줏대감들과 새내기 신자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서로 입장과 생각이 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노파심을 버리고 후배를 믿고 맡겨주어야 하고, 또한 후배는 자만심을 버리고 선배의 경험을 인정하고 자문을 구해야 합니다. 아니 노소와 선후를 가릴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갈등과 충돌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어쩌면 서로가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져 주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동물의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게 생겼습니다. 얼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격도 취향도 기질도 다 다릅니다.

 

우리 안에는 여우 같은 사람도 있고(언니 봉사하지마, 누군가 하겠지. 스트레스 받으면서 왜 봉사해? 봉사는 기피하고 봉사만 받으려는 사람), 토끼 같은 사람도 있고(소심하여 누가 뭐라 지적하면 잠을 못 이루는 사람), 곰 같은 사람도 있고(손해 보면서도 희생하는 우직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하는 사람), 고슴도치 같은 사람도 있고(상대를 가리지 않고 마구 가시를 세우는 사람), 라쿤(남들에게 관심 없고, 자기 하고 싶은 것만 추구하는 사람)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모든 부품과 기능이 동일한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저마다 머릿속으로 저이는 저 동물이다하고 있지요?) 여러분, 다 다르게 창조되었기에 유일하고 귀한 것입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르다고 비난합니다. 어찌 거북이로 태어난 사람이 토끼처럼 빨리 뛸 수 있겠습니까? 또 어찌 코끼리로 태어난 사람이 쥐처럼 조금만 먹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존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한 울타리 안의 형제자매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형제자매이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는 그저 세속적인 필요에 따라 만나고 흩어지는 사교 집단이나 이익단체에 불과합니다.

 

이사야서 11장은 메시아가 가져오는 평화의 시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우리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