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15,22)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하고 딸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교인인 가나안 여인에게 비유다인을 비하하는 ‘개들’이라는 비속어까지 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마 예수님께서 유다인만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나안 부인을 경멸하고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도적으로 여인의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란 하느님을 붙잡기 위해 지금까지 붙들고 있는 ‘나의 것’을 놓아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인은 자기 삶에 직접 개입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부르심에 꼭 붙들고 있던 ‘나의 것’을 버리고 응답했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우리는 이미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말씀하시며,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방해되는 ‘나의 것’을 포기하거나, 포기하려고 정말 애를 쓴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만큼 점점 커지고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더욱 깨닫게 되고,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원이 누구에게나 저절로 보장되진 않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는 예수님 말씀처럼, 구원은 ‘나의 것’을 포기하려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원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