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할 수 없는 것
탁은수 베드로
광안성당 · 언론인
fogtak@naver.com
인사말을 자주 써야 하는 한 지인이 요즘 챗-GPT로 글을 쓴다고 털어놨습니다. 단어 몇 개만 컴퓨터에 입력하면 이내 훌륭한 연설문이 출력된다고 합니다. 기계가 써준 글로 소통하는 게 쉬운 일이 됐습니다. 인공지능이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세상. 사람보다 기계와의 대화가 더 익숙한 세상. 이렇게 과학기술이 세상을 휘감으면 인간은 행복해질까요?
전기를 쓰기 위해 인간은 강물의 길을 바꾸고 산기슭 곳곳에 기둥을 박았습니다. 휴대폰의 편한 기능은 하루 종일 나를 의존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과학기술은 세상의 공간과 시간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가 되었다니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퇴직을 앞둔 친구들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돈을 모으고 억지로 운동을 합니다. 자격증이라도 따야 한다며 머리를 싸매기도 합니다. 그동안도 열심히 살았는데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한 답이 될까요? 50년도 더 전에 하이데거는 현대기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떼어놓고 닦달하게 될 것이라며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죽어서의 행복은 당연히 천국에 가는 것일 겁니다. 그러면 살아서의 행복은요? 좋은 차, 넓은 집이 답은 아닐 겁니다. 살아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은 없을 겁니다. 신앙인이란 살아서 하느님과 소통하고 하느님이 내신 것들을 사랑하다 죽어서 하느님 뵙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인생은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이 아니라 천상행복을 향한 순례자의 길입니다.
과학문명은 편리함은 주겠지만 궁극의 행복을 주지는 못 합니다. 인간과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을 느끼고 만나는 데 있습니다. “생각하다”라는 뜻의 영단어 CONTEMPERATE는 “하느님과 함께”라는 어원 (CON+TEMPLE)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나 같은 불량신자가 하느님을 뵙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성체마다 내게 오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성경 말씀 속에도 하느님은 계십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인간과 자연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느님의 숨결이 담긴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문명의 이기를 잠시 닫고 새소리, 바람의 느낌, 풀잎의 싱그러움에 집중한다면 하느님의 숨결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