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친교의 실현
우세민 윤일 요한
가톨릭신문 기자
한때 ‘응답하라 1988’이라는 TV드라마가 인기 있었습니다. 1988년 서울 쌍문동이라는 가상 공간을 설정하고, 한 골목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가족 드라마였습니다. 드라마의 인기 요인으로 저는 ‘공동체성’을 꼽습니다.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을 살면서, 그래도 사람 냄새 났던 당시 모습을 돌아보며 어느새 잃어버린 듯한 공동체 감수성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흔히 ‘친교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공동체성이 갈수록 결여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잘 지내던 본당 형제자매들도 갈등 상황이 불거지면 그만 관계가 흔들리고 맙니다. 잠깐 그러다 다시 화해한다면야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간혹 공동체가 흔들리는 반목 상황이 간간이 보입니다. 고통받는 이가 편히 쉴 곳이 교회여야 하는데, 그런 모습조차 예전 같지 못한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열심히 활동하던 한 형제가 사업이 실패하면서 다니던 본당을 떠나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다. 사람들의 뒷담화에 오르내리는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분은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친교’(親交)라는 말을 하지만, 단순히 친근한 인간관계를 뜻하는 ‘사교’(社交, 私交)와는 분명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친교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르 12,28-31 참조)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친교는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으로 확장돼야 할 관계입니다.
친교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닐까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관계는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의 씨앗이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성삼위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완성해 갈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를 위해 양보하고,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는 삶. 그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친교를 실현하는 덕목이며 영성이 아닐까요. 복음적 친교를 실현하고 있는 수도공동체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친교를 실현할 수 있다면, 가톨릭교회 안의 공동체성도 회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