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의 한국적 적용
발제: 한상봉(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오 함께 계시는 하느님,
저 혼자서는 더 깊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은 저를 보호하고
지도하는 안내자로서 저를 안아주고
지지해주는 사랑의 동반자로서
도전하면서 위로해 주는 지혜로운 분으로
저와 함께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제가 제 뿌리를 찾으려고
더 깊이 들어가려 할 때,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감싸주십시오.
두려움과 불안정에 직면할 때
제게 힘을 주시고
제 안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숨겨진 보화에 놀라게 해주소서.
-조이스 럽 수녀, '더 깊이 내려가기 위한 기도' 中에서
1.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성스런 작업이다. 이 세상의 온갖 사건과 사고에 대하여 발언해야 하더라도, 여기에 응답하는 음성은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조금은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기 전에 잠시 음악을 들었다. 졸탄 슈피란델리 감독이 만든 <신과 함께 가라 Vaya Con Dios>라는 영화의 O.S.T인 'Brother in arms'란 곡이다. 본래 그레고리안 성가였다는 이 곡은 의식을 천상으로 이끌어 줄 것 같은 섬세한 장엄함이 깃들어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이 대지를 제단으로 삼고 자신의 영혼을 성반과 성작으로 삼아 하느님께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봉헌하였다는데, 글을 쓰는 자에게는 때때로 책상 앞에서 기운을 정리하는 것이 곧 제단을 정결히 하는 사제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피터 모린과 더불어 가톨릭일꾼운동을 개시하였던 도로시 데이 역시 본래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글을 통하여 이 세상의 어둠과 빛을 두루 보고자 하였다. 세상의 불의를 고발할뿐더러 신비롭고 놀라운 사랑의 깊이를 돌이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섯권의 책과 1천 5백편에 이르는 기사, 수필, 비평 등을 썼는데, 글과 행동을 구분짓지 않았다. “글과 행동, 둘 다 실천입니다. 둘 다 세상에 대한 윤리적 반응에서 나온 인간의 응답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헨리 나웬이나 스콧 니어링 같은 이들처럼 도로시 데이 역시 자신의 발랄한 삶 만큼이나 실천적으로 의미 있는 글을 써온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삶과 글을 통하여 갈망한 것은 정작 무엇이었을까?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던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1) 편집자는 도로시 데이의 생애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면 '성인(聖人)'이란 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2)에서 엘스버그는 우리는 보통 성인들이 결점이 없는 사람들이며 오래 전에 기적을 행했고 교회 안에서 생을 보냈으며, 고통받는 기회를 열심히 찾고 일찍 세상을 뜬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이미지를 가진 성인들을 계속 그리고 있는 한 그들의 지혜는 우리가 닿을 수 없고 당혹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의 삶은 단지 성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양상은 다를지라도 일상 속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다. 성인은 그들의 고행과 환시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을 지닌 분들이다.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실상 성인들은 균형과 유머, 연민과 관대함, 장애물과 역경 앞에서 가진 평화와 자유의 정신,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성인들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 그들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내적인 조화가 보통의 인간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며, 아마도 그들의 내적인 빛남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3)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 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성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는 항상 같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학교이며 노동캠프이다. 그곳에는 마음이 넓고 사회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와서 성소를 찾는다. 수개월 혹은 수년을 지낸 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깨닫는다. 어떤 이들은 의료, 간호, 법, 교사, 농사, 저술, 출판계로 간다. 그들은 연민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폭력을 재촉하는 위험한 감정,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운다.” 엘스버그는 도로시 데이의 생애 마지막 5년을 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함께 살았는데, 거기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뿐 아니라 찾던 것을 모두 찾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느낀 가톨릭의 매력은 교의나 교회와 거의 상관이 없었고 성인들의 지혜와 모범, 그리고 영적 고전서가 지닌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도로시 데이로부터 성인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단지 그리스도교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친구와 동료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도로시 데이는 거룩함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기도에 깊이 잠기지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현존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깨어 있지만, 그와 똑같이 아름다움의 징표에 민감하며, 그가 '기쁨의 의무'라고 부르던 것에 늘 깨어 있었다.(4)
부르심
도로시 데이는 1897년 미국 부르클린에서 한 스포츠 자유기고가의 딸로 태어났다. 집에선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나 어린 나이부터 그는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다. 그는 병자들, 절름거리는 사람들,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성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고심한 끝에 그는 종교에 문을 닫고, 당대의 진보적인 정치에 희망을 두게 된다. 그의 친구들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로 그들과 함께 다양한 좌익간행물이나, 반제국주의 연맹 같은 조직에서 일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흥분된 참여에도 불구하고 도로시의 초년 삶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품고 있던 초월성에 대한 열망이 그를 가톨릭교회로 가게 하였다. 그가 회심한 것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의 경험으로 찾아왔다. 그는 즐거움과 감사의 충동을 너무나 크게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께로 향할 수밖에 없엇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의 회심은 친구들과 '관습에 의한' 남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불가지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은 가톨릭주의를 경멸했고, 그가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도로시는 “하느님인가 사랑인가를 택해야 하는 질문에 봉착했다”고 썼다. 더군다나 가톨릭교회를 향한 그의 결정은 노동계층을 배신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런데 응답은 피터 모린이라는 강한 불어 억양으로 말하는 한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왔다. 1932년 어느날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주머니는 팜플릿과 자료 따위로 불룩해 있었다. 때는 경제공황 시기였고,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실업자행진을 취재하러 갔다가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 가서 “내가 가진 모든 탈렌트를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열리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피터 모린은 55세의 농부 출신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고유한 비전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가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 적임자라고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복음서의 철저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행하는 운동을 구상했다. 단순히 불의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노동의 철학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기초한 새 질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피터 모린은 말했다. 그들은 정부와 교회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의 비전에 따라 지금-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할 것이며, “사람들이 더 선해지기 수월한” 사회를 창조하는 일을 할 것이다. 1933년 5월 1일 성요셉 축일에 '가톨릭일꾼' 신문이 유니온 광장에서 배포된 이래, 이 신문은 미국 전역에 있는 '환대의 집'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가톨릭일꾼공동체는 전통적인 애덕활동뿐 아니라 사회 정의와 평화운동에 결합되어 있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과 만난 뒤 50년 동안 몸담게 된 이 운동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였다. (5)
성소란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그분으로부터 초대받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특정한 생활방식이나 일과 같이 미리 맞춰진 옷을 입는 것과는 다르다. 많은 성인들의 투쟁은 당대에 가능한 선택을 넘어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그들만의 길을 찾았다. 그들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기존의 방법들을 먼저 거부하는 것에서 싹텄다. 무엇인가가 그들로 하여금 다른 길을 찾도록 만든 것이다. 성서에서 부르심은 항상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시고,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단순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순간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와 목표에 대한 삼지가 응답 속에 녹아들어 초월적인 도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부르심에 대하여 전적으로 응답할 의지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6)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의 첫 방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으며, 그의 구상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성소를 알아차렸다. 그럼으로써,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 답변은 도로시 데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러한 성인을 실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소를 발견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일생에 걸친 도전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는 '부르심 안의 부르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끝까지 충실하기 위한 지속적인 식별이 요청되는 것이다.
한편 일단 회심이 일어나면, 수많은 무질서로부터 즐거움이 가득찬 해결책이 그에게 주어진다. 삶이 평범한 짐으로 무거웠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생기와 에너지를 갖게 되어 '천국으로 가는 나의 길'이 열린다.(7)
피터 모린의 푸른혁명(Green Revolution)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은 1877년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23남매의 장남이었고, 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형제회;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서 가톨릭 인민주의를 주장했다. 1909년 아메리카로 건너와 캐나다에서 농장경영에 실패한 뒤에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뉴욕주로 왔다. 그후 20년 동안 미국 동부와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유랑생활을 하며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피터는 그러한 힘겨운 노동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믿고 그러한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성프란치스꼬처럼 '거룩한 가난'을 신부로 받아들여 빈민가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어디서든 잠을 잤다. 그렇게 하여 번 돈으로 책을 사보거나 자기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던 피터 모린은 성경과 성인들의 삶, 그리고 교황회칙 등을 근거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자본주의를 경멸하면서도 역사법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배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념, 이른바 산업주의와 진보에 대한 견해를 불신했다. 오히려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란 폐지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이 기계부속처럼 일하고 모두 공장 굴뚝만 바라보는 산업사회 역시 전부 해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대신에 그 자리에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분산화된 경제체제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견해는 중세시대의 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경신(敬神: Cult), 경문(敬文: Culture), 경작(耕作: Cultivation)의 종합을 이상으로 삼았다.
피터 모린은 강제가 없는 협동하는 사회, 공예가와 장인들이 스스로 조그만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다. 농경공동체에서 학자와 노동자가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생각하는 '노동자-학자의 융합'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평만 하고 고발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낡은 사회의 껍질 안쪽'에 만들 수 있는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객관적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계명이 우리 앞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살을 붙이고 복음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뭇 사람들을 끌어당기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터 모린이 제안한 3단계 프로그램은 ① 사고의 정화를 위한 원탁 토론 ② 애덕 실천을 위한 환대의 집 운영 ③ 노동자가 학자도 될 수 있고 학자도 노동자가 될 수 있는 농경공동체의 건립이다.(8)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선전하는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을 만들자고 하였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가톨릭일꾼' 신문
피터가 처음에 제안한 신문의 이름은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다. 겉치레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뿌리까지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편집자의 태도를 나타내기보다 독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톨릭일꾼(Workers 노동자)>이라는 이름을 택했다.(9) 두 사람은 모두 신앙을 당시의 사회문제와 결부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유사한 성향의 공동협조자로 보기엔 힘들다. 피터와 도로시는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사람이었다. 피터의 뿌리는 땅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피터는 중세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그러나 그보다 스무살이나 어렸던 도로시는 도시 출신으로 노동조합, 대단위 정치운동, 계급투쟁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다. 그러한 두 사람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도로시의 부엌을 편집실 삼아 시작하였다.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할 때,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이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신문뿐 아니라 가톨릭일꾼운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규정도 없고 재단도 이사회도 없다. 불안전함 가운데,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탁)을 가능케 한다. <가톨릭일꾼>은 누구나 사 볼 수 있도록 1페니에 팔고 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1페니에 팔린다. 이 신문은 1933년 5월 1일에 2천 5백부가 유니언 광장에서 공산주의 집회 때에 뿌려졌다. 그런데 2년도 안 되어 발행부수가 15만부로 껑충 뛰었다. 가톨릭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신문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불어났다. 그 지역의 신학교와 교회에서도 수십 부를 주문했다. 열성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가 신문을 팔았다. 독자들은 다른 종교, 정치 계통의 신문에서 볼 수 없는, 특별히 가깝고 가정적인 느낌의 <가톨릭일꾼> 신문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원칙이 있고 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끼리 편지라도 교환하듯이 쓴 글이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신문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특정한 동네 그리고 지역의 냄새와 소리와 작은 사건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1952년 4월 <가톨릭일꾼>신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만드는 세계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특별히 리지외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의 영성'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데레사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작은 행동이 지닌 의미! 우리가 실행하지 못한 작은 것들의 의미! 우리가 하지 못한 항의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준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명을 선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형제애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 소수인들,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불의에 저항하여 외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통에 대항하여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일이 없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말해야 하고 써야 한다.”고 천명한다.
자비의 실천, 환대의 집
피터 모린은 5세기의 교회 공의회가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마다 '환대의 집'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기뻐했다. '환대의 집'은 가난한 이,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그밖의 여러 종류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내가 낯선 사람이었을 때 네가 받아들였다”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피터가 보기에 '환대의 집'은 따뜻한 안식처 노릇을 할 수 있으며, 독서실과 직업훈련을 제공할 수 있고 기도와 토론과 공부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교구에서 그런 집을 후원해야 하고 교구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친구만을 환영하고, 낯선 이를 돌보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대하였다. 사랑과 자비의 일은 모두가 해야 할 일이며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 어느 집이나 하느님의 대사를 받아들일 '그리스도의 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10)
'환대의 집'을 요청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집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신문에 실린 집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도로시는 즉시 아파트를 빌렸고 얼마 안 가 아파트가 더 필요하게 되자 찰스가에 건물을 갖게 되었다. 급식행렬도 마찬가지여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환대의 집에는 항상 따뜻한 커피와 수프와 빵이 준비되어 있어 누구든지 들어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1936년엔 수백 명의 사람이 도로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다른 많은 단체들과 달리 '가톨릭일꾼의 집'에선 아무도 설교를 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다. 다만 벽에 걸린 십자고상만이 유일한 직원들의 신앙의 표시였다. 자원 봉사자인 직원들은 숙식과 가끔 용돈 정도만 제공받고 월급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점차 다른 지역에도 이런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10년만에 30채 이상으로 불어났는데, 각각의 집들은 뉴욕 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신문을 통해 함께 준수해야할 원칙을 천명하면서, 환경과 필요에 따라서 나름의 조직과 방식을 채택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일꾼의 집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담배 피는 조, 이탈리아 사람 마이크, 미친 폴 등이다. 그 사람들은 일꾼의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여 잡일을 돕기도 하고 항상 똑같은 의자나 구석에 앉기도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일꾼의 집은 무정부적 경향이 있어서 단속과 제한, 규칙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온갖 배경을 갖고 있는 개인들에 대한 너그러운 특징을 가진다. 이 공동체에선 구성원의 개인적, 이념적 대립을 세심하게 감싸안으며 그들에게 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한 식구로 맞아들였다. 언젠가 사회사업가 한 사람이 도로시 데이에게 밑바닥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이 집에 머물 수 있는지 물었다. “영원히요. 우리와 살고 우리와 죽고, 우리는 가톨릭식 장례를 지내줍니다. 죽은 후에 필요한 비용도 대줍니다. 일단 들어오면 가족의 일원이 되지요. 아니면 과거에 가족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되고요.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11)
학자-노동자 융합, 농경공동체
피터 모린이 제안했던 다른 중요한 프로그램은 시골에 농경공동체-농경대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훨씬 도시적이었으나 농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피터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뉴욕 가톨릭일꾼운동은 1936년 펜실바니아주의 이스톤에 22에이커의 땅을 샀다. 이 농장에 사는 사람들은 학자들, 노동자, 집 없는 사람, 대학생, 엄마와 아이들이었는데, 작물을 키우고, 주말엔 원탁토론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주제를 공부하기 위해 여름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역시 머무는 동안 농장일을 도울 것이었다. 이 때는 공황의 시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사회에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들에 해답을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었으며 땅에 되돌아가는 것을 그 해답으로 보았다.(12)
피터 모린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공동체는 공황시기에 머물 곳과 음식을 마련해 주어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으며, 산업경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순환적인 실업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농경공동체는 농작법과 수공제조법을 도시거주자들에게 훈련시킬 것이며, 이러한 훈련과 양성은 또한 점차적으로 땅과 마을공동체 생활방식에로 되돌아갈 길을 마련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농작과 손노동으로 이윤보다는 실용적 필요에 따라 생산하도록 이끌고, 나아가 협동의 가치관과 영적 차원을 다시 발견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피터 모린이 보기에, 농촌과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땅에서 사는 것은 협력과 필요한 정도만큼의 경제를 장려한다. 도시의 인위적인 세계보다 땅에서 살적에 인생철학은 기계적이기보다 유기적이 되며, 개인적이기보다 가족 중심적이 된다. 아이들이 환영받으며 노인네들은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농작과 수공업 문명속에서 책임감이 회복되고 노동의 전체성(통합성)이 살아나면 자기존중의 의식과 존엄성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구성원들사이의 인격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공동체에 중요한 봉사를 하겠다는 책임감을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 초기에, 이 농경공동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싹을 틔웠다. 공동체들은 다양한 크기였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가까운 도시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과 연결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스톤에 있는 농장에는 1938년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트밀, 옥수수, 감자, 복숭아와 사과나무, 그리고 각종 과일나무들을 키웠다. 그들은 마당에 빵 굽는 오븐을 걸어두려고 했고 신발을 수선하고 옷을 깁고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경당도 세울 계획이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특별한 것은 이른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농부와 목수, 전기 기술자들, 하수도 기술자 등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이다. 이 전문가들은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사람들, 혹은 도시의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친구들이기도 하였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삶에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1949년 피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도로시 데이는 이 농경공동체를 '땅에 있는 환대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골에 마련했던 농장들이 정통성 시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자,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가족들이 평화롭게 모이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장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도로시는 배가 고파서 줄을 섰다가 가톨릭일꾼운동을 알게 되어 거처를 시골로 옮겨 오게 된 사람들을 위한 '환대의 집'으로 농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피터의 구상이 너무 높은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시에 농장은 집단이나 개인이 피정의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가톨릭 평화주의
한편 도로시 데이는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톨릭일꾼의 집을 방문하고, 대공황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록하고, 집회에서 강연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연좌농성에서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도로시는 노동문제가 발생하거나 부당한 조건에 항거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았다. 이러한 가톨릭일꾼운동의 활동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본당 차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제 세상만사가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인간체험의 중심에 있는 정의와 자유와 양심,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불거진 문제는 '평화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다.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이 세상의 군인이 되지 않겠소. 나는 그리스도의 군인이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며 순교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제국과 합세하면서 달라졌고, 교황은 군대를 지휘하며 성전(聖戰)을 선포하곤 했다. 복음 앞에서 '거룩한' 전쟁이란 없다. 그리고 전쟁은 애국심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신앙을 위한 것으로 선전되고 왜곡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도로시 데이의 평화주의는 시험을 받았다. 거의 모든 미국 주교들과 가톨릭계 언론이 반공적이고 친가톨릭적이라고 하여 프랑코를 지지했다. 도로시 데이는 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에서 무서운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에는 반대한다.” 교회의 순교자가 된 신부, 수녀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쓰기를 거부했던 무기를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잡음으로써 그 사람들을 명예롭게 할 것인가? 묻는다. 그것은 순교를 허사로 돌리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묻는다. “오늘날 전 세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다. 우리 모두는 그 와중에 살고 있다. 솔직하게 우리는 성인을 찾고 있다.” 도로시는 우리 하나하나도 스페인의 신부, 수녀처럼 무장을 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악을 이겨낼 힘이 생긴다.(13)
도로시 데이의 철저한 평화주의 때문에, <가톨릭일꾼> 신문은 많은 독자를 잃었다. 몇몇 교구에선 주교들이 교구 안에 있는 모든 교회와 교구학교에서 신문구독을 금지시켰다. 결국 스페인 전쟁은 1939년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2년 후 참전하였다.
----------------------------------------------------------------------------------------
[각주]
(1)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도로시 데이, 바오로 딸, 1995
(2)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로버트 엘스버그, 참사람되어, 2005
(3) 엘스버그, 같은 책 5쪽
(4) 엘스버그, 같은 책 8쪽
(5) 엘스버그, 같은 책, 48-51쪽 참조
(6) 엘스버그, 같은 책, 45-48쪽 참조
(7)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보고 어느 언론인이 물었다. “나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더 데데사가 말했다. “저도 그래요.” 같은 일이더라도 부르심에 대한 깨달음 뒤에는 전혀 다른 현실이 된다.(엘스버그, 같은 책, 52쪽 참조)
(8)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28쪽 참조
(9) <잣대는 사랑>, 짐 포리스트, 분도출판사, 93쪽 참조
(10) <잣대는 사랑>, 101-102쪽 참조
(11) <잣대는 사랑>, 105쪽
(12) 농장을 운영하면서 도로시 데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보다 먹으려는 사람이 많았고, 들일을 하려는 사람보다 신학이나 정치토론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계란 하나를 두고도 몸싸움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후 피터 모린은 여름내 계란과 우유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도로시는 “정의가 먼저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 것을 챙기는 데 열심이었고, 극기를 실천하는 데는 꼴찌였다”고 술회한다.(<잣대는 사랑> 107쪽 참조)
(13) <잣대는 사랑> 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