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

 

 

 

 

 

QUADRAGESIMO ANNO



 


1931. 5. 15.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
사회 질서의 재건에 관하여
사도좌와 더불어 평화와 일치를 누리는 존경하는 형제들인
총주교, 수석주교, 대주교, 주교, 그 밖의 지역 직권자들에게
가톨릭 세계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회칙


오경환 신부 번역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1.*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을 맞이하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에 대하여 전가톨릭 세계는 그 반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상하며, 그것에 합당하게 성대히 경축하고자 한다.
    사목적 심려를 담은 이 유명한 문헌에 이르는 길은 본인의 선임자의 다른 회칙들에 의하여 어느 정도 준비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인간 사회의 기초인 가정과 혼인성사에 관한 회칙,1) 국가 권력의 기원2)과 교회와 국가 권력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회칙,3)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의무에 관한 회칙,4) 사회주의 오류에 대한 반론,5) 인간 자유의 그릇된 개념에 대한 회칙6) 및 다른 몇 가지는 교황 레오 13세의 정신을 명백하게 드러내준다. 그러나 [새로운 사태]는 이른바 “사회 문제”라고 불리는 인간 사회의 어려운 문제를 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규범을 전인류에게 제시하였고, 또한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때에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새로운 사태]의 발표 이유


    2. 19세기 말엽, 새로운 경제 방식과 새로운 산업의 발전은 많은 국가에서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두 개의 계급으로 분열되는 상황으로 이끌어갔다. 첫째 계급은, 수적으로는 적지만, 실제로는 현대의 발명이 매우 풍부하게 공급하는 모든 편의를 독점하였다. 둘째 계급은, 거대한 노동 대중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궁핍에서 헤어나려고 헛되이 발버둥치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사태를 부유한 자들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그 사태를 경제 법칙의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로 봄으로써 그 불행한 이들을 구제하는 모든 배려를 자선에만 맡겨놓았다. 그들은 입법자들에 의해서 묵인되거나 때로는 허가된 공공연한 정의의 침해를 개선하는 것이 마치 자선의 과제인 듯이 여겼던 것이다. 한편 이 가혹한 상황에서 억압당하는 노동 계급은 극단적인 혐오감을 품은 채 그 상황을 감수하였지만 점점 그 쓰라린 굴레를 감수하지 않으려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부 못된 선동의 대열에 휩쓸린 자들은 전체 사회 질서의 전복을 추구하게까지 되었다. 확고한 그리스도교적 교육으로 이러한 오도된 부절제를 억제하고 있던 사람들도 역시 근본적이고 급속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체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감탄할 만한 사랑으로 노동 계급의 부당한 곤경을 경감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헌신해 왔던 많은 가톨릭 신자들, 즉 사제와 평신도의 의견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현세 재화의 분배에 있어서 너무나 널리 만연되어 있는 부당한 차별이 도저히 전지하신 창조주의 뜻에 합치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에 현존하는 통탄스러운 무질서에 대한 개선책과 앞으로 다가올 더욱 심각한 위험에 대한 견고한 대비책을 성의를 다하여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위험한 혁신가로 내몰리거나,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이견을 가진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가장 명석한 이들이면서도 고통을 당하며, 불확실성에 흔들리면서 그 상황에서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 심각한 의견 대립은 종종 평화적이지 못한 토론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도 그러하였듯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전세계에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는 충만한 진리의 거룩한 보고인 베드로의 사도좌로 집중하였다. 사회 문제의 전문가, 기업가 및 노동자들까지 포함한 전례 없는 수많은 군중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모여들어, 최종적으로 안전한 길이 그들에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간청하였다.
    사려 깊은 교황은 오랫동안 이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숙고하고, 가능한 한 가장 노련한 자문 위원들의 조언을 구하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문제를 신중히 고찰하였다. “사도적 직무”7)가 재촉하고, 또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같이 보이므로,8) 그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교도권에 의거하여 전체 그리스도 교회와 전인류에게 그의 뜻을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891년 5월 15일 오랫동안 바라던 메시지가 발표되었다. 일의 어려움이나 노령의 부담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그 존경하올 교황님은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도를 인류 가족에게 가르쳤다.


[새로운 사태]의 근본 요지


    3.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은 [새로운 사태]를 영구히 기억하게 하는 그 훌륭한 가르침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문헌에서, 인류 대부분이 “부당하게도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최고 목자는 “점차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온 노동자들”9)의 변호를 과감히 떠맡았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편으로부터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사회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찾는 데 있어서 이미 전적으로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한편 사회주의는 치료해야 할 해악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이 될 개선책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사회가 더 큰 위험을 맞이하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그의 명백한 권리를 행사하면서, 그리고 그에게 일차적으로 맡겨진 신앙을 수호하고 신앙에 밀접히 관련된 일들을 올바르게 지도하면서 “신앙과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그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10)는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는 가르침의 토대를 바른 이성과 하느님의 계시에서 나온 불변하는 원칙에 두고, 확신을 가지고 “권위를 가진 자”11)로서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권리와 상호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는 것”12)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교회, 공권력자와 당사자 자신들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지적하였다.
    사도적 목소리는 헛되지 않았다. 교회의 충성스런 신자들뿐만 아니라 진리와 신앙의 일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방황하던 많은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위에 연구를 통해서든 입법을 통해서든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든 이들도 회칙을 진정으로 감탄하면서 듣고 깊이 공감하면서 환영하였다.


    4. 교황의 회칙을 열렬히 환영한 이들은 지상의 최고의 권위에 의해서 자기들이 변호되고 보호된다고 느낀 그리스도인 노동자들이었고, 또한 노동자들의 지위 향상을 위하여 오랫동안 노력해 온-그러나 지금까지 일반적인 무관심뿐만 아니라 비우호적인 의심 내지 공개적인 적의까지 겪어오던-모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해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세계적인 기념 축제를 엶으로써 회칙에 돌려야 할 마땅한 존경을 바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넓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적지 않게 불안해 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 레오 13세의 심오하고도 고상한, 그러나 세속적인 귀에는 매우 생소한 가르침이 가톨릭 신자까지 포함한 일부인들의 의심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칙은 자유주의의 우상을 과감하게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완고한 편견을 일소하였으며, 당시의 사조에 너무나 앞섰고 예상 밖이었다. 그 때문에 완고한 자들은 그 새로운 사회 철학을 비웃었고 소심한 자들은 그 높은 이상에 오르기를 두려워하였다. 또한 이 광명의 메시지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그것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다기보다는 희망할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 회칙의 목적


    5.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을 기념하는 엄숙한 식전이 세계 각국 특히 바티칸에서, 각처에서 모여든 가톨릭 노동자들과 함께 성대히 거행되고 있는 이때, 본인은 다음 사항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그 회칙이 가톨릭 교회와 전세계에 가져온 큰 이익을 회상하고, 둘째로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 위대한 교사의 가르침의 어떤 점에 관해서 제기되어 온 일부 의문에 대하여 해명한 후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 현행 경제를 심리하고 사회주의의 죄과를 경청한 후, 현대 사회의 무질서의 근본 원인을 밝혀내고 건전한 개혁을 위한 유일한 길, 즉 도덕의 그리스도교적 혁신을 지적할 것이다. 이상이 이 회칙에서 논의하기 위해 선택된 세 가지 주제이다.



 
I. 「새로운 사태」의 성과


    6. 첫째로 지적한 주제를 시작하면서, 본인은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이 교회와 인간 사회에 가져온 성과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성 암브로시오의 “감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긴급한 의무는 없다”13)는 권고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이 성과들을 대충 열거하려 하여도, 그것은 지난 40년의 전체 사회사를 거의 회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인은 선임자가 그의 위대한 재건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열심히 추구하던 세 방면의 협력에 상응하는, 세 가지 표제하에 그 성과를 편리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가 이룩한 일


    7. 첫째로, 교황 레오 13세는 교회로부터 기대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에 적절한 가르침을 복음으로부터 얻어낸다. 교회는 자신의 가르침으로써 인간 정신을 계몽하고 각 개인의 생활과 습관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노력을 쏟는다. 수많은 유익한 제도들을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상태를 개선시킨다.”14)


교의적 문제에서


    8. 교회는 선을 위한 이 강력한 힘을 무익하게 저장해 두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널리 갈망하던 평화를 위해서 그것을 자유롭게 이끌어내었다. 사회 경제적 문제에 관한 회칙 「새로운 사태」의 가르침은 교황 레오 13세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몇 번이고 말로써나 문서로 선포되고 역설되었고, 그 후계자들은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적응시키고, 특히 가난한 자와 약자의 보호를 위하여 자부적 염려와 항구한 사목을 늦추지 않았다.15) 가톨릭 세계의 수많은 주교들은 교황청의 의도와 지침에 따라 열의와 학식을 다하여 이 가르침을 해석하고 주석하며, 다양한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그것을 적용한다.16)
   그러므로, 많은 박식한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교회의 지도와 인도에 따라 특히 불변하고 변할 수 없는 교회의 가르침이 새로운 발전과 이어질 수 있기를 열망하면서 우리 시대의 발전 추세에 맞추어가며, 사회 경제 과학의 연구에 전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9. 그리하여 교황 레오 13세 회칙의 인도와 빛 안에서 가톨릭의 진정한 사회 교리가 성립되었으며, 본인이 교회의 협력자로 선정한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그 사회 교리는 나날이 촉진되고 풍부해지고 있다. 그들은 사회 교리를 학문의 그늘에 숨겨놓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가톨릭 대학교, 대학, 신학교에서 자주 열리는 풍부한 강좌, 그리고 만족한 성과를 거두면서 종종 개최되는 사회적 집회와 “주간 모임”, 그리고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건전하고도 시의 적절한 출판물들이 사회 교리를 명백히 보여준다.
    회칙에 따른 효과는 이것들만이 아니었다.「새로운 사태」의 가르침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점차 퍼져나갔으며, 그리하여 사회 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원리가 점차 전인류의 공동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본인은 본인의 탁월한 선임자가 힘차게 선포한 영원한 진리가 당시 비가톨릭적 서적이나 신문, 잡지뿐만 아니라 의회의 회의장과 사법부의 법정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변호되는 것을 기뻐한다.


    10. 더욱이 세계 대전 후 열강의 통치자들이 사회 상황의 전면 개혁 등 여러 조치로 평화를 재건하고자 하면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규정하는 원칙들을 세울 때, 그 결론들은 대부분 교황 레오 13세의 원칙과 경고에서 바로 이끌어낸 듯이 거기에 너무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 회칙 「새로운 사태」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향하여 깃발을 드시리라”17)는 이사야의 말씀이 걸맞는 참으로 중대한 문헌이 되어왔다.


실제적 적용에서


    11. 한편, 연구와 조사에 의해서 교황 레오 13세의 가르침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이용해보려는 조치들이 취하여졌다. 적극적인 선행의 정신에서 첫째로, 현대 산업 때문에 수적으로 거대하게 증가하였지만 사회에서 그들의 합당한 지위는 아직 확보되지 못하여 결국 방치 상태에 있거나 천대받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온갖 노력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교구와 수도회 성직자들은 그들의 무거운 사목적 의무에 더하여 주교의 지도 아래 즉시 대중 교육과 문화 사업에 착수하여 막대한 영적 효과를 거두었다. 노동자의 마음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불어넣기 위한 이 지속적인 노력은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존엄성을 크게 각성하도록 해주었다. 그들의 지위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분명히 인식시킴으로써, 그것은 그들에게 합법적이고 진정한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동료 중에서 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그때 이래 생활 용품은 더욱 풍부하고 안전하게 공급되었다. 교황의 호소에 부응하여, 선행과 자선 사업이 교회의 지도 아래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흔히 사제의 지도 아래, 새로운 단체들이 계속 증가하였으며, 그 단체들 때문에 노동자, 장인, 농부, 각종 임금 노동자들이 서로 도움과 원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2. 국가가 이룩한 일


    12. 국가 권력에 관해서 교황 레오 13세는 자유주의에 의하여 규정된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서, 국가 권력은 단지 법과 질서의 수호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모든 법과 정치 제도, 그리고 국가의 일반적 성격과 행정을 오로지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복리가 자연스럽게 증진되도록 운영하는 데”18)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서슴지 않고 선포하였다. 또한 행동의 필수적인 자유가 시민 각자와 가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도 진리이지만, 그 자유는 공동선에 대한 마땅한 존중에 부합해야 하고 타인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통치자의 의무는 공동체 전체와 그 각 부분의 보호에 있으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어서는 약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자기 방어 능력이 있으므로, 공적인 보호를 받을 필요가 덜하다. 이와는 반대로 빈곤한 대중은 든든한 재산이 없으므로, 국가의 재산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임금 노동자들이 빈곤한 대중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을 특별한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19)
    물론 본인은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이전에도 일부 통치자들이 노동자 계급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었고 그들에게 자행되는 극악한 불의를 억제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도좌에서 사도의 목소리가 전세계를 향해 울려퍼진 후, 각국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책임을 크게 각성하여 더욱 광범한 사회 정책을 펼 뜻을 굳혔다.
    사실 회칙 「새로운 사태」는 오랫동안 국가가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방해해 왔던 자유주의의 흔들리고 있던 교설을 타파하였다. 회칙은 민족들 스스로 사회 정책을 더욱 강력하고 진실한 길로 발전시키도록 설득하였고, 또한 저명한 가톨릭 신자들을 고무하여 그들이 종종 이 새로운 정책의 선두적인 주창자였던 의회에서와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효과적인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교황 레오 13세의 가르침을 철저히 체득한 성직자들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많은 최근의 법률들이 의회에서 표결에 부쳐지도록 최초로 제안하였고 통과된 후에도 세심한 배려로 그 집행을 촉진하고 장려하였다.
    이러한 한결같은 꾸준한 노력의 성과로 전 시대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법률의 분야가 발생하였는데, 그 목표는 인간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성에서 생겨나는 노동자의 신성한 권리의 효과적인 보호이다. 이 법은 정신, 건강, 체력, 주거, 작업장, 임금, 위험한 일 등 한마디로 말해 임금 노동자의 모든 관심사와 특히 부녀자와 어린이의 배려에 관심을 갖는다. 비록 이 법규들이 모든 세부 조항에서 항상 교황 레오 13세의 권고와 합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규에 담겨 있는 많은 것이「새로운 사태」를 강하게 연상하게 하고,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3. 관계 당사자들의 노력


    13. 마지막으로, 현명한 교황은 “고용주와 노동자 당사자가 가난한 이들을 적절히 도와주고 두 계층을 서로 접근시킬 수 있는 단체들을 통하여”20) 본인이 다루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그중에서 노동자끼리거나 노동자와 사용자가 함께 구성한 단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이 단체들을 설명하고 권장하기 위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그 본질, 결성 동기와 기회, 권리, 의무, 법규에 대해서 놀라운 예지로써 상술하였다.
    그 가르침은 시의 적절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적지 않은 국가의 정부는 매우 자유 방임적이었으며, 공공연한 적의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노동자들의 단체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다른 계급의 비슷한 단체들은 기꺼이 인정하고 보호하면서도, 그들은 부끄럽게도 강자의 압제에 대항하여 자기 방어가 가장 필요한 이들에 대해서는 단체를 결성할 천부적인 권리를 거부하였다. 가톨릭 신자들 중에도 그러한 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 계급의 노력을, 마치 사회주의와 혁명적 정신을 반영한 것처럼, 의심의 눈길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노동 조합


    14. 그러므로 교황 레오 13세가 그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같은 의혹을 일소시킨 방침을 권위 있게 선포한 것은 크게 찬사를 받을 만하다. 더욱더 찬사를 받아야 할 점은 그리스도인 노동자들이 다양한 직종에 따라 조합을 결성하도록 격려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친 점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층민과 억압받는 자의 유일한 옹호자며 투사라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적 조직의 강력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바른길로 갈 결의를 굳히게 하였다.
    이러한 조합들이 결성될 때에 그들은 “조합원 각자가 가능한 한 최상의 신체적 경제적 도덕적 조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의 달성에 더욱 적합하고 용이한 방편들을 마련할 수 있도록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새로운 사태」는 적절하게 선언하였다. 그 위에, 회칙은 이 조직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관심이 그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하며 또 사회 단체의 모든 규율이 그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21)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왜냐하면 “사회 단체의 규약들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 구성원들의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과 경제적 안녕을 위하여 그들 상호간의 결속을 다지는 길이 열리기”22) 때문이다.
    교황 레오 13세의 의도를 철저하게 수행하려는 열성을 가진 성직자와 많은 평신도들이 그러한 단체의 창립을 위하여 도처에서 놀라운 열성으로 헌신하였으며, 그 단체들은 그 나름대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노동자들의 집단을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다행히 자기 직종에서의 성공적 역할과 깊은 종교적 확신을 잘 결합시켰다. 즉, 그들은 현세적 권리와 이익을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수호하면서 동시에 정의에 대한 마땅한 존중과 다른 계급과 협력하기 위한 성실한 열망을 갖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체적인 사회적 삶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쇄신할 길을 준비하였다.
    교황 레오 13세의 이 권고들은 지역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한 단체가 교황이 제안한 모든 목표를 포괄하였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상황의 요청에 따라 기능의 분화가 이루어져서 여러 단체가 나타났다. 이 단체들 중 일부는 노동 시장에서 회원들의 권리와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는 일을 맡았고, 다른 것은 그들의 목표를 경제 문제에 대한 상호 부조의 제공에 두었으며, 한편 어떤 단체는 종교와 도덕적 임무 및 그와 비슷한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후자의 방식은 국법, 주어진 경제적 상황,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의견과 감정의 통탄스러운 분열, 성장하는 혁명 세력과 대결하기 위하여 단결된 힘의 필요성 등으로 가톨릭 신자끼리의 가톨릭 조합이 결성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곳에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신자들은 중립적인 노동 조합에 가입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조합들은 정의와 공정성을 존중해야 하며, 가톨릭 조합원들에게는 양심의 명령에 따르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가톨릭 노동자들이 이러한 조합에 가입할 것인지를 허용하는 것은 주교의 권한으로서, 주교들은 사정상 필요하고 종교에 대한 위험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 본인의 선임 교황 비오 10세께서 권고한 원칙과 주의 사항을 준수하면서 허용하여야 한다.23)
    이 주의 사항 중에서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노동 조합과 병행하여 회원들에게 철저히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훈련을 제공하는 단체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들이 속하는 노동 조합에 그들의 활동을 지도할 바른 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조합들은 회원의 범위를 넘어서 좋은 영향을 발휘할 것이다.
    오늘날 도처에서 이런 노동 조합들이 번창하고 유감스럽게도 아직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보다 수적으로 열세이지만, 그 조합들이 이미 임금 노동자들의 당당한 집단을 형성하여 국가적, 국제적 집회에서 가톨릭 노동자들의 권리와 정당한 요구를 성공적으로 주장할 수 있고, 그리스도교적 사회의 토대가 되는 구원의 원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회칙의 공헌으로 돌려져야 한다.


다른 계급의 조직


    15. 나아가 교황 레오 13세가 그처럼 현명하게 전개하고 그처럼 과감하게 옹호한 조합을 결성할 천부적 권리에 관한 가르침은 노동자들의 단체를 넘어서 다른 계급의 단체에도 재빨리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회칙은 농부들과 중산 계층의 단체들이 크게 증가하고 퍼져나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훌륭한 조직들은 비슷한 다른 조직과 더불어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목적을 잘 결합시키고 있다.


고용주들의 단체


    본인의 선임자가 간절히 원하던 고용주와 경영자들의 단체는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수도 적다.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성의의 부족에 있다고 할 수는 결코 없고 오히려 다른 곳에 훨씬 더 심각한 장애가 있으며, 본인은 그 장애의 본성과 중대함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장애들이 머지않아 극복될 것이라는 믿을 만한 희망이 있다. 본인은 이 점에 관해서 이루어진 무시할 수 없는 몇몇 시도들의 장래에 대해서 마음속 깊이 기쁨으로 환영한다.24)


[새로운 사태]는 사회 질서의 대헌장


    16.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본인이 이제까지 해설하였다기보다는 시사하는 데 그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의 그 유익한 결과들은 너무나 많고도 엄청난 것이어서 이 불멸의 문헌이 인간 사회의 아름다운 이상향 그 이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본인의 탁월한 선임자께서는 인간 가족을 분열시키는 치명적인 내부적 투쟁을 비록 즉시 종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당히 완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살아 있으며 생명을 주는 원천인 복음에서 끌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40년 전에 후한 손길로 뿌려진 좋은 씨의 일부가 기름진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전인류가 거두어들인 풍성한 추수가 밝혀주고 있다. 오랫동안 유용하게 쓰여온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이 사회 문제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교적 활동의 궁극적 기반이 되는 대헌장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부인들은 「새로운 사태」와 이 기념 축제를 거의 중시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교리를 비방하거나, 그 가르침을 모르고 있지 않다면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들은 의롭지 못하고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회칙의 일부 구절이나 그 추론의 바른 해석에 관하여 의문이 일어났고, 그 의문들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일게 하였으며, 그 논쟁은 항상 평화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편 우리 시대의 새로운 필요와 사회 상황의 변화는 교황 레오 13세의 가르침의 좀더 정확한 적용과 보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인은 힘이 닿는 한 그 의문을 풀어주고 오늘날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이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을 본인은 모든 이들을 돌봐야 하는 본인의 사도적 직분에 따라 수행하고자 한다.25)



 
II.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한 교회의 권위


    17. 그러나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교황 레오 13세께서 일찍부터 명확하게 설정한 원칙, 즉 사회 경제적 문제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교황의 권리와 의무라는 원칙을 본인은 주장한다.26) 물론 교회가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일시적이고 썩기 쉬운 행복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사실 “교회는 그러한 현세사에 정당한 이유 없이 간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믿고 있다.”27) 그러나 교회는 능력도 없고 사명도 받지 않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도덕적 행위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권위로 간섭해야 할 하느님이 주신 임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본인에게 맡기신 진리의 보고와 온전한 도덕 법칙을 형편이 좋건 나쁘건 선포하고 해석하고 재촉해야 하는 본인의 중대한 직분은 사회 경제적 문제도, 그것이 도덕적 문제인 한, 본인의 최고 관할권에 편입되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과 도덕률은 그 고유의 영역에서 각기 자체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경제 질서와 도덕 질서가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것이어서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지상 사물의 본성과 인간의 몸과 마음의 속성에서 파생되는 이른바 경제 법칙이라는 것은 경제 문제에 있어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와 도달할 수 없는 목표, 그리고 그때에 필요한 수단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과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특성으로부터 무엇이 창조주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전체 경제 질서의 목적과 대상인지를 추론하는 것은 이성 자체이다.
    도덕적 법칙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최고 최종 목적을 찾도록 명하고,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에 있어서는 특수 목적을 일반 목적에 제대로 종속시키면서, 자연법 또는 대자연의 창조주께서 설정하신 그 목적을 똑바로 추구하라고 명한다. 만일 이 법칙이 충실히 준수된다면, 결국 개인들의 것이거나 사회의 것이거나, 특수한 경제적 목표는 보편 목적론적 질서와 밀접하게 결합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만물의 최종 목적, 즉 최고 불멸의 선이신 하느님께까지 점진적 과정을 거쳐 도달할 것이다.


1. 사유 재산권


    18. 이제 세부 사항을 논의함에 있어서 본인은 먼저 소유권, 또는 사유 재산권에 대해서 시작하고자 한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은 기쁘게 추모되는 선임 교황이 사유 재산의 폐지는 노동 계급에 대하여 이익이 되기는 커녕 극심한 해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대하여 사유 재산권을 얼마나 열심히 옹호하였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교회가 그때나 지금이나 무산자에 반하여 부유층을 편든다고 그릇되고 부당하게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교황 레오 13세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본인은 이 문제에 대한 교황 레오 13세의 가르침이자 또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모함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릇된 해석에 반대하여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유 재산권의 개인적 사회적 성격


    19. 먼저 교황 레오 13세는 물론, 교회의 지도와 지침에 따라 가르치는 신학자들도 소유권의 이중적 성격, 즉 개인을 존중하느냐 공동선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서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 되는 이중성을 거부한 적도 의심한 적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사유권이란 자연에 의해서, 또는 오히려 창조주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이나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주께서 인류를 위해서 마련해 준 재화가 그 목적에 진정으로 봉사하기 위함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 목적은 몇 가지 결정적이고 안정된 질서가 유지되지 않고는 보장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야 할 이중의 위험이 있다. 한 가지는 만일 소유권의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측면이 부인되거나 최소화된다면, 이른바 “개인주의”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소유권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거부하거나 축소시킨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형태의 “집산주의”로 이끌릴 것이라는 점이다. 이 위험들을 무시하는 것은, 본인이 교황 재위 초기에 발표한 회칙에서 단죄했던, 도덕적 법적 사회적 근대주의의 위험한 사태로 무모하게 돌진하는 짓일 것이다.28) 교회가 이단적 소유권 개념이 신학자들의 가르침으로 스며들도록 방관하였고 그것은 놀라운 무지 탓으로 이른바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다른 개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회에 대한 가증스러운 모함을 퍼붓는 신기함을 쫓는 자들은 특히 이 점에 주목할 것이다.


소유권에 따른 의무


    20. 소유권과 거기에 따르는 의무에 관하여 일어난 논쟁을 일정한 한계 내에 유지하기 위하여, 본인은 먼저 소유권이란 그 사용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29)는 교황 레오 13세가 주장한 근본적인 원칙을 재확언한다. 타인의 소유를 온전히 존중해 주고 자신의 소유권의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른바 교환 정의(commutative justice)에 속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소유를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은 교환 정의에 속하지 않고 다른 덕목에 속하므로 “법률로 그 실천을 강요할 수 없다.”30) 그러므로 소유권과 그 정당한 사용이 동일한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소유권의 오용이나 비사용으로 소유권 자체가 상실되거나 몰수된다는 것도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유익하고 크게 칭찬받을 노력은 화합의 정신과 교회의 전통에 대한 마땅한 존경심을 갖고 이들 의무의 엄밀한 본질을 규정짓고 소유권이나 사용권에 대하여 사회 생활의 요청이 부과하는 한계를 규정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반대로 소유권의 개인적 성격을 약화시킴으로써 실은 소유권을 파괴하는 자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국가의 권위


    21. 본인이 개인적 성격과 사회적 성격이라고 부른 소유권의 이중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인간이 소유권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동선도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 의무들을 상세히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긴 하나 자연법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국가의 직무이다. 자연법과 신법이 지켜진다는 조건하에, 국가는 공동선을 고려하여 재산 소유자의 재산 사용에 대하여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더욱 정확하게 구체화할 수 있다. 더구나 교황 레오 13세는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노력과 각 민족들의 제도에 따라 사적 소유의 규정이 허용되게 하셨다”31)고 현명하게 가르쳤다. 역사는 소유권도 사회 생활의 다른 요소처럼 절대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본인은 이 점을 이전에 다음과 같이 밝혔었다. “소유권은 얼마나 다양한 형태를 취하였는가! 먼저 문명화되지 않은 미개한 사람들 사이에 사용되던 원시적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어떤 지방에서는 존재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가부장적 시대의 소유권 형태, 이어서 각종 전제적 형태가 따랐고(본인은 이 말을 고전적 의미로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봉건적이고 군주적인 체제에서 근대의 다양한 형태로 내려왔다.”32) 국가가 이 의무를 임의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재산을 소유하고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에 대한 인간의 자연권은 불가침의 권리며 국가도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보다 먼저 인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33) 더구나 “가족 사회는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가에 선행한다.”34) 현명한 교황은 국가가 가혹한 세금으로 개인의 재산을 갈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이미 선언하였다.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법이 아니라 자연법에서 나온 것이므로 국가는 그것을 폐지할 수 없으며, 다만 재산의 사용을 규제하고 또 공동선과 융화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을 뿐이다.”35) 그러나 공권력이 공동선의 요구에 합치시키기 위하여 소유권을 조정하는 것은 적으로서가 아니라 사유권자의 친구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국가는 인간 생활의 유지를 위해서 자연의 창조주께서 예지로 의도하신 바, 사유 재산의 소유가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어 끝내는 그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유 재산의 폐지가 아니라 보호이며, 사유 재산권의 약화가 아니라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다.


잉여 소득에 대한 의무


    22. 아울러 인간의 잉여 소득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 재량에 맡겨져 있지 않다. 본인은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사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을 넘어서는 수입 부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오히려 반대로 부자들에게는 자선, 선행, 관용의 큰 의무가 지워져 있음을 성서와 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고용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 잉여 소득을 투자하는 것은, 그 노동이 참으로 유익한 재화를 생산하는 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원칙36)에 따라서, 어떠한 도덕적 결함이나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이 시대의 필요에 완전히 부합하는 훌륭하고도 중요한 행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소유권 획득의 권리


    23. 소유권이 원래 주인이 없는 물건의 점유나 산업 및 노동, 또는 이른바 분업에 의해 획득된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전통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선임자인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아무도 권리 주장을 하지 않는 재화의 점유는 사실상 어떠한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업을 경영하여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창출하고 가치 증대를 추구할 때, 그 결실은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2. 자본과 노동


    24. 그러나 타인에게 고용된 사람의 노동과 타인의 자본을 바탕으로 행한 노동은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국가의 부가 생산된다”37)는 교황 레오 13세의 말이 적절히 적용된다. 인간의 부를 이루는 거대한 재화는 효율을 놀랍게 증대시키는 기계와 연장의 도움을 받거나 맨손으로 수고한 노동자의 손에서 생겨나고 흘러나온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보편적인 경험은 어느 나라도 노동자와 고용주인 모든 시민의 끊임없는 노력 없이 곤궁과 가난으로부터 일어나서 더 낫고 높은 처지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먼저 풍부한 자연 자원과 그 보배와 동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끊임없는 노동은 쓸모 없었을 것이며 도대체 시도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노동이란 인간의 힘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람의 정신과 신체의 힘을 이 자연의 선물에 적용하는 것 이외에 그 무엇인가? 그런데 자연법은, 아니 그보다 자연법을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뜻은, 자연의 자원이 인간의 필요에 적용될 때에는 올바른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며, 이 질서는 모든 것에는 정당한 소유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소유물에 대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수고와 이웃의 재산 사이에는 협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 사람은 타인 없이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황 레오 13세가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38)고 할 때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과 노동의 협력으로 얻어진 것을 어느 한편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며, 또한 어느 한편이 다른 편의 노력을 무시하고 모든 이익을 독점한다는 것은 정의에 크게 어긋난다.


자본의 부당한 요구


    25. 그러나 자본은 오랫동안 과대한 이익을 착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생산물과 이윤을 차지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겨우 노동력을 회복하고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최소한만을 남겨주었다. 냉혹한 경제 법칙 때문에 모든 부는 부자들 수중으로 축적될 수밖에 없고, 노동자들은 영원히 빈곤에 머물거나 최소한의 생존만을 유지하면 된다고 주장되었다. 물론 현실적인 상황이 항상 어디에서나 이른바 맨체스터 학파(Manchester School)의 자유주의 학설이 결론지었던 것만큼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추세의 확고한 동향이 이 방향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 그릇된 견해와 그럴싸한 원리는, 예상되던 대로, 그 원칙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타고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맹렬히 공격받았다.


노동의 부당한 요구


    26. 그래서 이른바 “지식인”들은 괴로움을 겪고 있던 노동자의 항의를 대변하였으나 그 허구적인 법칙에 반대되는 다른 똑같은 그릇된 도덕 원칙을 내세웠다. 그것은 투자된 자본을 보상하고 돌려주는 데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생산물과 이윤이 모두 노동자의 권리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오류는 모든 생산 수단이 국유화 또는 그들의 용어대로 “사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오류보다 더욱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며, 방심하는 사람들을 속이기 쉽다. 그것은 공공연한 사회주의에는 속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신 달콤한 독약이다.


공정한 분배의 지침


    27. 이와 같은 그릇된 이론으로 정의와 평화에의 길이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양 견해의 지지자들은 본인의 선임자의 현명한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였다. “토지가 비록 각 개인 소유로 분배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이들에게 공동 이익과 편의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39) 본인이 앞에서 사유의 결과로 나타난 재화의 분배는 자연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나, 그 목적은 창조된 사물이 질서 있고 안정된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에 본인은 선임자의 가르침을 재확인한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이 원칙을 언제나 명심하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부와 재산을 분배하는 모든 방식이 하느님께서 뜻하신 목적에 충분히, 더구나 적합하게,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회 경제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는 재화는, 교황 레오 13세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의 공동선의 증진을 위하여 다수의 개인과 사회 계급들에게 분배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전체 사회의 복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 정의에 관한 이러한 원칙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이윤의 분배에서 배제하는 것을 금한다. 이 법칙은 무책임한 부유층 때문에 어겨지는데, 그들은 자신의 행운 때문에 자신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노동자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 정당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무산 계급이 또한 정의가 무시되어서 격분하고 그들에게 잘 알려진 한 가지 권리를 부당하게 옹호하기에 급급하여, 생산 결실 전체를 요구할 때도 이 법을 어기게 된다. 그들이 이 사유제를 공격하고 그 폐지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인간 사회에 있어서 이윤의 성격과 의미가 어떠하든 노동 이외의 원천에서 나오는 모든 이윤을, 노고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40)는 사도의 말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전혀 부적절하고 근거가 없다. 여기에서 사도는 일할 수 있고 또 일을 해야 함에도, 일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사도는 우리가 시간과 몸과 마음의 힘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스스로 자활할 수 있는 한,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결코 사도는 노동이 생계와 이윤에 대한 권리를 주는 유일한 근거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41)


    28. 그러므로 각 계급은 그의 마땅한 몫을 받아야 하며, 창조된 재화의 분배는 공동선과 사회 정의의 요청에 합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실한 관찰자는 누구나 지나친 부를 소유한 소수와 궁핍하게 사는 다수 사이의 큰 차이가 현대 사회에서 심각한 해악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3. 무산자의 향상


    29. 무산자의 향상은 본인의 선임자께서 우리 노력의 필수적인 대상이라고 강조한 목표이다. 선임 교황의 이 유익한 권고가, 실행 가능하고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흔히 잊혀지거나, 일부러 무시되거나,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무산자의 향상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고 더욱 강렬하게 반복하는 것이 요구된다. 교황 레오 13세 시대의 참혹한 대중적 “빈곤”이 오늘날은 줄어들고 있다고 하여도, 오늘날 그 가르침이 그 힘이나 슬기를 잃은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처지는 참으로 개선되었고 많은 점에서 더욱 공평해졌으며, 특히 크고 발전된 국가에서는 이제는 노동자 계급이 보편적으로 비참과 곤궁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근대적 기계와 산업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일반화되었어도, 새로운 식민지 국가와 극동의 옛 문명국에서는 재산을 빼앗긴 노동 대중이 대단히 많이 증가하였고 그들의 울부짖음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고 있다. 더구나 거대한 농촌 임금 노동자들이 있으며, 그들의 처지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고 또한 그들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장만할 수 있는”42)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다. 효과적인 개선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들도 무산자의 처지에서 영구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빈민과 무산자의 신분은 형식상으로는 차이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편에 수많은 재산 없는 임금 노동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 운좋은 소수의 초호화판 부자가 있다는 것은 “산업 시대”라는 이 시대에 그렇게 풍부하게 산출되는 지상의 산물이 여러 계급 사이에 도무지 바르고 공정하게 분배되지 못하였다는 반박할 수 없는 논거가 되고 있다.


노동자의 소유권과 무산자의 처지 극복


    그러므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적어도 앞으로는 생산된 재화의 공정한 몫만이 자본가의 수중에 축적되게 하고 충분한 몫이 노동자에게 지급되도록 해야 한다. 새가 날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므로, 그 공정 분배의 목적은 노동자들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절약으로 재산을 늘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관리하여, 무산자의 숙명 같은 호구지책의 위협에서 해방되고 한층 더 안락하고 안정되게 가족에 대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생의 변화 무쌍한 운명에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유족에게 어느 정도의 유산이 남겨진다는 희망으로 마음 든든할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본인의 선임자에 의하여 단지 암시된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공공연하게 언명되었다. 본인은 이 회칙에서 새롭게 힘을 주어 그것을 강조한다. 만일 그것들이 실천되도록 전력을 다하여 지체함이 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의 공공 질서와 평화와 안녕이 혁명을 선동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4. 공정한 임금


    그러나 이 계획은, 본인이 이미 본인의 선임자의 선례를 좇아서 밝힌 바와 같다. 만일 재산이 없는 임금 노동자가 근면과 절약으로 어느 정도의 재산을 획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면 실현될 수가 없다. 그러나 노동 이외에는 의식주나 생활 필수품을 얻을 길이 전연 없는 이가 그의 임금으로 검소하게 살지 않고는 어떻게 돈을 저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본인은 교황 레오 13세가 “지극히 중요한 문제”43)로 다룬 임금의 문제를 다루고, 필요하다면 그 원칙과 가르침을 밝히고 설명하고자 한다.


임금 계약은 본래 정당한 것


    30. 먼저 임금 계약은 본질적으로 부당하며, 그 대신에 동업 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확실히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회칙에서 이 계약을 용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의의 원칙에 맞는 계약 체결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인 선임 교황에게 심한 모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현 상태에서는, 이미 임금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상당한 이득을 주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미 시도되고 있는 것처럼, 가능하다면 임금 계약이 어느 정도 동업 계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와 관리직 종사자들이 소유나 경영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어떻게든 이윤의 분배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적정 임금을 선정하는 데에는 한 가지 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레오 13세의 현명한 말씀에 따라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정의에 따라 임금을 결정해 주어야 한다.”44)
    이렇게 하여 그는 이 중대한 문제를 단 하나의 원칙, 그것도 바르지도 못한 원칙을 적용하여 쉽사리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저자들의 무책임한 견해를 반박하였다.
    오늘날 널리 유포되었으면서 전적으로 그릇된 원리는 노동의 가치, 곧 노동에 대한 보수는 부가 가치 전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임금 노동자는 그의 노고로 이루어진 모든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그릇된 견해인가는 본인이 앞에서 자본과 노동에 관하여 밝힌 점에서 드러난다.


노동의 개인적 사회적 성격


    31. 소유권과 마찬가지로 노동, 특히 임금 노동에 관해서는 개인적 성격과 아울러 사회적 성격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다. 만일 인간 사회가 진정 사회적이고 유기적인 조직체가 되지 못하고, 노동이 사회적이고 법적인 질서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다면, 또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인간 노력의 다양한 형태가 상호 보완과 조화 가운데 결합되지 않는다면, 특히 지식과 자본과 노동이 공동 보조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수고는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 노동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이 간과된다면, 노동은 정의에 따라 평가될 수 없고 형평에 따른 보수도 받을 수 없다.


고려되어야 할 세 가지 점


    인간 노동의 개념 자체에서 도출되는 이 이중적 성격으로부터 임금을 조정하고 결정하는 데 대한 중요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가) 노동자와 그 가족의 부양
    32. 첫째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노동자 자신과 그의 가족의 생계에 충분하여야 한다.45) 물론 농가에서나 많은 중소 상공업자의 가정에서처럼, 가족 중의 다른 사람들도 힘 자라는 대로 공동의 생계에 이바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이 어린 아이들이나 연약한 부녀자들을 혹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특히 주부는 가사와 그에 관련된 일에 그들의 힘을 쏟아야 한다. 가장의 봉급이 불충분하여 가정 주부가 자신의 고유한 책임과 의무, 그중에서도 특히 자녀 교육을 소홀히 하고 가사 밖의 일에 취업해야 하므로 혹사당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며 전력을 다하여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장이 일상적인 가정의 필요를 충당할 수 있는 충분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일 현재의 사회 상황에서 이것이 도대체 실현 가능하지 않다면, 사회 정의는 각 성인 노동자가 그와 같은 임금을 받도록 보장하는 개혁을 지체 없이 단행하기를 요구한다. 이 점에 관련해서 본인은 가정의 부담이 증가함에 따라 임금을 증가시키고, 특별한 필요에 대해서 특별한 배려를 하기 위해 고안되고 실천적으로 시도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다.


    (나) 기업의 실태
    33.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데에는 특정 기업과 그 기업주의 형편이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높은 임금을 요구하여 기업주가 파산하여, 노동자 자신에게 불행을 초래하지 않고는 지불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기업이 경영 부실, 기획 결여 또는 낡은 기술 때문에 이윤을 적게 내고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임금을 감소시킬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기업이 부당한 부담에 허덕이거나 부당하게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팔 수밖에 없도록 강요되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불할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면, 그렇게 기업을 손상시키는 자들이 중대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노동자들의 공정한 임금을 빼앗고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용자와 노동자가 모든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함께 궁리하고 노력해야 하며, 국가의 현명한 정책은 이 건전한 노력에 있어서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지, 또한 노동자들을 위해서 다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지 서로 협의해야 한다. 이 중대한 결정을 이끌어가는 정신은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일종의 상호 이해와 그리스도교적 화합의 정신이어야 한다.


    (다) 공동선의 요구
    34. 마지막으로, 임금 수준은 공공의 경제적 복지를 염두에 두면서 책정되어야 한다. 본인은 노동자들과 관리직 종사자들이 그들의 임금 중에서 필요한 지출을 충당하고 남는 부분을 저축함으로써 적은 재산을 마련하는 것이 공동선을 위해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진작부터 주장해 왔다. 그렇지만 그보다 중요성이 적지 않고, 이 시대에 특히 필요한 다른 점은 일할 수 있고 일할 뜻이 있는 이들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용 기회는 임금 수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임금이 적정선에 머물면 고용 기회는 늘어나고 그 적정선을 넘어서면 그 기회는 감소한다. 지나치게 낮은 임금 수준이나 과도하게 높은 임금 수준은 둘 다 마찬가지로 실업을 야기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이제 실업이, 본인의 재임 기간 동안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특히 광범위하고 장기적이면 무서운 두통거리이다. 실업은 노동자에게 불행과 유혹을 유발하고, 각국의 번영을 파괴하고 전세계에 걸쳐 공공 질서와 평화와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사리 사욕을 위하여 부당하게 임금을 낮추거나 올리는 것은 사회 정의에 위배된다. 사회 정의는 가능한 한 선의와 노력을 한데 모아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적당한 생계 수단을 보장하도록 임금이 결정되는 것을 요구한다.
    또한 여기서 여러 계층의 임금간의 합리적인 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농업과 공업 등 여러 경제 부문의 생산물의 가격간의 합리적인 관계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균형이 유지될 때, 인간의 다양한 경제 활동은 서로간에 상호 부조와 봉사를 제공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되고, 한 공동체를 이루는 부분이 된다. 자연 자원, 기술 성취, 경제 분야의 사회적 조직이 줄 수 있는 모든 재화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될 때에라야, 경제 사회 체제는 건전하게 수립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이 재화는 정직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에, 그리고 신중하게 이용하기만 한다면 덕을 쌓는 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더 높은 수준의 번영과 문화 생활로 인간을 향상시키기에 충분하여야 한다.46)


5. 사회 질서의 재건


    35. 본인이 지금까지 재화의 정당한 분배와 임금의 공정한 수준에 관하여 말한 것은 개인과 직접 관련되며 사회 질서와는 간접적으로만 관련된다. 그런데 사회 질서에 대해서는 본인의 선임자인 교황 레오 13세가 건전한 철학의 원리와 복음의 탁월한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재건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그 길은 열렸다. 그러나 훌륭하게 시작된 것은 견고하게 하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이제 성취되도록 하고, 더욱 풍성한 축복이 인류에게 내려지기 위해서는 제도의 개혁과 도덕의 혁신이라는 두 가지 사항이 특별히 필요하다.
    제도의 개혁에 대해서 말할 때 본인은 주로 국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 물론 모든 구원을 국가의 개입에서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른바 “개인주의”의 폐해 때문에 사태는 급격히 변하여, 한때 번창하면서 서로 돕던 각종 제도 안에서 꽃피며 크게 발달된 사회 생활이 손상되었고 거의 파괴되어, 사실상 개인과 국가만이 남게 되었고 국가에게는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국가는 보조적 사회 구조를 잃고 이제는 사라진 조직이 한때 맡던 모든 짐을 떠맡은 결과, 한없는 업무와 책임에 짓눌려 허덕이게 되었다.
    역사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사회 상황의 변화 때문에 이전에는 소규모 집단이 수행하던 많은 일이 지금은 대규모 조직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확고 부동한 사회 철학의 근본 원리이다. 따라서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회 활동은 본질적으로 사회 구성체의 성원을 돕는 것이므로 그 성원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해서는 안된다.
    국가 권력은, 자신에게 중대한 혼란의 원천이 되며 중요성이 적은 사업과 활동의 수행을 다른 조직체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국가는 고유하게 국가에 속하고 국가만이 수행할 수 있는 임무를, 상황이 제안하고 필요가 요청하는 대로, 지도하고 감독하고 격려하고 억제하면서 더 자유롭고 힘차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은 이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를 더욱 충실히 따르고 다양한 조직체간의 위계 질서가 널리 받아들여질수록, 사회의 권위와 능률이 더욱 높아지고 국가의 상태는 더욱 행복하고 번영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 계층간의 화합


    국가와 모든 선량한 시민의 중대하고 절박한 의무는 상반된 이해를 가진 “계급”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나 집단 사이에 화합을 육성 촉진시키는 것이다.
   36. 그러므로 사회 정책은 직능 집단(functional group)의 재건을 지향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사회 상황이 긴장되어 있으며 따라서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사회가 상반된 이해 관심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며 적대와 투쟁으로 치닫기 쉬운 “계급”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노동이란 사실, 본인의 선임자가 그의 회칙에서 잘 밝힌 것처럼,47)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노동자도 그 존엄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노동은 일종의 상품처럼 사고 팔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수요 공급은 노동 시장에서 인간을 두 진영 같은 두 계급으로 나누고 있으며, 양편의 거래는 이 노동 시장을 두 개의 군대가 전투에 참가한 싸움터로 바꿔놓고 있다. 사회를 파멸로 이끄는 이 심각한 무질서에 대한 개선책을 가능한 한 시급히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대립이 제거되고, 사회 유기체의 잘 정돈된 지체들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떤 완벽한 개선책도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노동 시장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에 따르지 않고, 그들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서로 다른 직능에 따라서 사람들을 한데 묶는 “직능 집단”이 생겨나야 한다. 자연적으로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일치하여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내듯이, 경제 부문이든 다른 부문이든 같은 직종이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단체나 조직 같은 것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격상 자치적인 이 조직체들을 시민 사회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거기서 나온 자연적인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질서란,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잘 규정한 것처럼, 다수의 사물의 적절한 배치에서 생기는 통일성이다. 그러므로 진정하고 참된 사회 질서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 요소가 공동 유대로 함께 결합되는 것을 요청한다.48) 이러한 일치의 유대는 한편으로는 동일 “직능 집단”의 노동자와 사용자가 상품 생산이나 용역 제공에 협력하는 공동 노력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직능 집단”들이 자기의 영역에서 우호적인 조화로써 일치하여 증진시키는 공동선을 통해서 산출되기도 한다. 이 일치는 개인과 “직능 집단”이 자신의 직업상의 의무를 이행하고 또한 그것에 탁월하려고 노력하는 성실성에 비례하여 강력해지고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이들 조직체에 있어서는 전체 “직능 집단”의 공동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직능 집단의 활동이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쉽사리 결론지을 수 있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이해가 상반되어 특별한 배려가 요청되는 경우에는 각각의 회합에서 따로 협의하고, 사정이 요구한다면 따로 표결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 레오 13세가 정부의 형태에 관하여 가르친 것을 적당히 참작하여 직능 집단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직능 집단에서도 정의와 공동선이 고려된다면, 성원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이 원하는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49)
    같은 지역 사회의 주민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진 단체들을 곧잘 설립하고 개인들은 거기에 자유로이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게, 같은 직종이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직업과 연관된 목적을 위하여 그들간에 자유로운 단체들을 구성할 것이다. 본인의 선임자는 자유로운 단체의 성격에 대해서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본인은 다음 한 가지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인간은 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사적 성격을 가진 단체를 설립할 자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단체의 일관된 목적을 향하여 원활한 활동을 펴나가기 위해 훌륭한 조직과 현명한 규율을 채택할”50) 권리도 가지고 있다. 단일 직종의 범위를 넘어서는 단체의 설립에 대해서도 같은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미 번창하고 유익한 결실을 내고 있는 이들 자발 단체들은, 본인이 앞에서 언급한 더욱 이상적인 “직능 집단”의 실현을 향하여 그리스도교 사회 교리에 맞추어 길을 열고 제 몫을 하는 것을 그들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경제 생활의 지도 원리의 재건


    37. 밀접히 관련되면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이 있다. 인간 사회의 일치가 “계급” 갈등 위에 세워질 수 없듯이, 경제 문제의 올바른 질서도 거친 자유 경쟁에 맡겨질 수 없다. 오염된 샘에서 더러운 물이 나오듯이, 이 자유 경쟁에서 “개인주의 학파”의 모든 오류들이 흘러나왔다. 이 학파는 경제 활동의 사회적 도덕적 측면을 망각하거나 무시하고서, 경제 활동이란 공권력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경제 활동은 시장과 통제되지 않는 경쟁 안에서 어떤 인간의 간섭보다 더욱 적합한 자기 지도 원리를 갖게 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자유 경쟁은, 비록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정당하고 매우 유익하기는 하지만, 경제 문제의 적합한 지도 원리일 수는 없다. 이 점은 이 위험한 개인주의적 이상에 기울어진 자유 방임제에서 나타난 결과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를 다시 진실하고 효율적인 지도 원리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더구나 이 역할은 최근 자유 경쟁을 대신하여 나타난 독점 경제에 의해서 행사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제할 줄 모르는 강렬한 힘이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인류에게 유익하려면, 강력하게 규제되고 지혜롭게 통제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점 경제는 그 자체로서는 억제될 수도 통제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독점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규제하기 위해서는 한층 높고 고상한 원칙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 정의와 사회애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 생활의 모든 제도는 정의의 정신으로 물들어져야 하고, 이 정의가 무엇보다 우선하여 진정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경제 활동을 지배할 수 있는 법적 사회적 질서가 수립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회애는 이 질서의 혼이 되어야 한다. 이 질서를 효율적으로 보호하고 신속하게 옹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가는, 본인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본무가 아닌 부담들을 벗어버린다면 이 임무를 한결 쉽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각국이 대체로 상호 의존하고 있고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각국이 공동 협의와 노력으로 사려 깊은 협정과 제도를 통하여 건전한 경제 협력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좋을 것이다.
    만일 사회 유기체의 지체들이 이와 같이 변혁되고, 사회적 경제적 활동의 진정한 지침이 이와 같이 재건된다면,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대하여 말한 것을 어떤 의미에서 사회 유기체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51)
    38.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최근에 특별한 노동 조합과 노동 단체들이 창설되고 있다. 본인은 이 회칙의 주제에 비추어 여기서 그것을 간략히 개관하고 논평하고자 한다.
    국가는 노동 조합 또는 노동 단체를 법적으로 승인하고, 그리하여 일종의 독점적인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그와 같은 승인 때문에 그것만이 노동자와 고용주들을 각각 대표할 수 있고, 노동 계약과 노동 협정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노동 조합에의 가입은 각자의 선택에 달렸으나 바로 이 면에서 그 조직체는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조합에 대한 기부와 다른 특별한 회비는 일정한 직종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노동자든 사용자든 모두에게 의무적이며, 그 노동 조합에 의하여 맺어진 노동 계약도 똑같이 의무적이기 때문이다. 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노동 조합이 법적으로 승인받지 않은 업종별 또는 직업별 조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국에 의하여 선언된 것은 사실이다.
    조합 연맹은 동일 직종이나 직업의 노동자와 고용주 조합의 대표자로 구성되며 그 연맹은 국가의 진정한 독점 도구이고 기구로서 공동 이해가 걸린 모든 문제에 있어서 노동 조합의 활동을 지도하고 조정한다.
    파업과 공장 폐쇄는 금지된다. 만일 분규 중인 쌍방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공권력이 개입한다.
    이상과 같이 요약해서 묘사된 제도의 이점은 조금만 숙고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계급간의 평화스러운 협력, 사회주의자들의 조직과 노력의 억제, 특별한 정부 부서의 조정 권위 등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 원칙과 본인이 이제부터 공식화하려는 원칙에 비추어, 본인은 다음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국가가 꼭 필요하고 충분한 보조를 제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적 창의성의 자리를 점령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것을 본인은 알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노동 조합이나 노동 단체들의 체제가 지나치게 관료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위에서 열거한 일반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회 질서의 재건과 개선에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특수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사회 질서와 관습의 개혁


    39. 본인은 진정하고도 지속적인 복지 증진이라는 그 지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축복이 필요하고, 둘째로는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또한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본인은 기술적 직업적 사회적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층 더 기여할수록 그리고 더 나아가 가톨릭적 원리와 그 실천이 더욱 폭 넓게 적용될수록, 그 의도된 목적은 더욱 확실하게 달성되리라고 믿는다. 본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조합주의적이거나 정치적 활동을 펼 뜻을 갖지 않은 가톨릭 운동 단체(action)에 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운동 단체가 교회의 지도하에 이 원칙을 불어넣고 사도직을 실천하도록 훈련시킨 신자들에게서 이 공헌을 기대한다. 도덕 문제가 논의되고 규정되는 모든 다른 영역에서처럼, 앞에서 언급한 영역에서도 하느님께서 맡기신 수호자와 교사로서의 직책을 잊어버리거나 게을리 할 수 없는 교회를 본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 질서의 재건과 완성에 대하여 본인이 가르쳐온 모든 것은 태도의 혁신 없이는 전혀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역사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 과거에는 물론 모든 점에서 완전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의 상황과 필요에 비추어 볼 때 올바른 이성에 어느 정도 부합하던 사회 질서가 존재했다. 이 질서가 사라진 지 오래된 것은 그 질서가 변화하는 필요와 상황에 맞추어 발전하고 적응할 능력을 갖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악행에 기인한다. 인간은 지나친 이기심으로 냉혹해져서 늘어나는 대중에게 그 질서의 확장을 거부하였으며, 그 밖에도 그릇된 자유와 다른 오류의 유혹에 미혹되어 어떤 속박도 참을 수 없게 되고 모든 권위를 팽개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행 경제 체제와 그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난자인 이른바 사회주의에 대해서 주의를 돌리는 일이 본인에게 남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본인은 솔직하고 정당한 판결을 내리려 하며 오늘날의 심각한 해악의 뿌리를 더욱 철저히 파헤치고, 가장 우선적이고 필요한 치유책이 도덕의 혁신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III. 교황 레오 13세 이후의 많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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