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부활 제7주간 - 연중 제10주간

문재상 안드레아 신부

문재상 안드레아 신부는 대전교구 소속 사제로 현재 홍산본당에서 사목 중이다. 신학생 시절 본당의 청년 쁘레시디움을 통해 레지오를 접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줄곧 레지오 단원들의 열정에 깊이 감동하고 있다.


주님 승천 대축일-부활 제7주간 (5월 21~27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예전에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삶 모든 순간이 감동적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톤즈의 상황을 보고 나지막이 읊조리시던 이태석 신부님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저의 지난 사제 생활을 돌아보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매 순간 물으며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신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저 제 앞에 놓인 수많은 일들을 해치우기도 버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판단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초대가 아닐까요?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을 닮은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가도 일상의 분주함에 치어서 그 다짐을 잊고 살기도 하고, 예수님이 아닌, 나 자신이 생각과 행동의 중심이 되는 삶이 너무 익숙하기에,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을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는 신앙인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신앙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모습으로 내려오셨고, 수난과 부활을 겪은 뒤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하늘로 가는 길’ 역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사람들이 승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2000년 전에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을, 오늘 이 땅 위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될 겁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연중 제8주간(5월 28일~6월 3일)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집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 다윗 임금은 오랜 전쟁을 마친 뒤, 이렇게 말하며 하느님의 집을 짓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시켜서 ‘지금 성전을 짓는 것이 당신 뜻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분명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집이기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거부 의사가 조금은 의아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하느님의 집’은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지어내신 분이시고, 우리의 흠숭과 찬미 없이도 이미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집을 짓는 일은 ‘거처가 없으신 하느님께 머무르실 거처를 마련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데 필요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집을 짓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 역시 다윗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나 자신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위해서 활동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느님의 이름을 내걸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충동이 들 때, 먼저 성모님께 눈길을 돌리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나서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투신’은, ‘수동의 극치’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가장 능동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겸손한 대답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내어 맡김’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집을 짓고자 했던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긴 마리아가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집’이 되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 역시 그분의 거처가 될 수 있음을,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연중 제9주간(6월 4~10일)
‘하느님과의 관계성’

여행 중인 어느 주교가 ‘은자들이 산다는 섬’을 방문합니다. 거기에서 주교는 세 노인을 만나는데,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면서도 제대로 된 기도문 하나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 노인들은 하느님 섬기는 방법을 잘 모른다며, 그저 “당신도 셋이요, 우리도 셋이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라고 했고, 주교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라도 가르쳐주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 노인들은 해가 질 때야 겨우 주님의 기도를 외웠고, 주교는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주교는 멀리서 무엇인가 빛을 내며 물 위를 걸어 배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노인들이었고, 그들은 주교에게 “주님의 기도가 잘 기억나지 않으니 다시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주교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 올라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톨스토이의 단편 ‘세 명의 은자들’이라는 작품의 줄거리입니다. 신학에 대해서는, 교회가 정한 규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삶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리적 지식이 많다는 것이, 교회 안에서 행하는 활동의 양이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담보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과의 관계성’입니다.
레지오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거짓으로 타인 앞에서 몸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진정 아무것도 모르는 티끌 같은 존재임을 아는 것’에서부터, ‘그런 나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셨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요? 이제껏 살아오며 소설에 나오는 주교와 같은 자세를 가진 적은 없었는지 자신을 향해 묻게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그분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저의 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연중 제10주간(6월 11~17일)
성경과 성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람, 한 사건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거나, 교회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표면적인 변화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결국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된다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금 더 큰 열성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의미합니다. 물론 모든 단원은 성모님께 특별한 공경을 드리지만, 그 특별한 공경이 사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셨기 때문이며, 그 순명을 통해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조금 더 깊이 매료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분의 사랑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식과 활동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를 위해 가장 좋은 선물을 이미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과 성체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복음을 읽고, 매일 성체 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그리스도인은 점점 더 깊이 그분의 사랑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성체를 자주 영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랑은 때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 당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을 우리 역시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 모시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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