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 요한복음 11,1-45
✠ 요한복음 11,1-45
무덤에 묻힌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에게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끝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희망이 들어설 자리란 없다.'
이런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순간, 몸은 살아있으되 죽음을 뼈저리게 겪어내는 순간. 그래서 울 수 밖에 없는(35절) 순간 말입니다. 그런 아픈 순간에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십니다.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사실,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면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절망의 순간에만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무너지지 않는 희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라자로의 부활 얘기는 요한 복음에서 들려주는 일곱째 표징입니다.
앞선 여섯가지 표징(가나의 혼인잔치, 고관의 아들의 치유, 베짜타 못에서 병자 치유, 빵의 기적, 물위를 걸으심, 태생 소경을 눈뜨게 하시는 기적)을 통해서 이미 알리고자 했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무엇보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심을 나타내는 가장 완벽한(일곱이란 숫자에서도 드러납니다.) 표징입니다.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서두름없이 이틀이나 늑장(?)을 부리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그냥 두십니다. 지금 도와주지 않으시면 영영 기회란 없을 것 같은데도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와 함께 우리도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 이리 나와라"
그러면 마침내 우리는 욕심, 상처, 악습, 두려움, 절망이라는 무덤에 갇혀있는 우리의 죽은 목숨을 되살려 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아무리 부정적인 결과를 빚어내더라도 희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의 부활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이제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부활을 향한 남은 여정을 열심히 걸어가도록 서로 기도 안에서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