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 마태오복음 5,38-48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지? 성인들에게나 해당되지.. 라는 생각이 혹시 들지 않나요?
예수님은 오늘 "이웃사랑" 아니 더 나아가 <원수 사랑>을 얘기하십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은 예수님 시대 이전(구약)에도 잘 알려진 계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원수에 대한 사랑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12,20)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 잠언(25, 21-22)의 말씀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1. '이웃'이란 경계가 구약에서와는 달리 내 동족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와 인종을 뛰어넘기에 새로운 계명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란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되묻습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루카 10, 29-37참조)
2 사랑의 질, 강도(强度)가 훨씬 높기에 새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질은 하느님의 사랑(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입니다.
3. 어떤 대가도 기다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같은 사랑이기에 새 계명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종결 짓는 중심 구절입니다. 묵상 시작에서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영은 우리의 본성적인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사랑으로는 실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 때에 그 사랑의 실천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곧, 하느님께로 되돌아가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의탁할 때만이 살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계명을 산다는 것은 짐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이 계명을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부어넣어 주신 사랑을 확인하는 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내 안에 그분의 '피'(?)가 흐른다는 표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