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용할 양식

가톨릭부산 2023.02.15 10:29 조회 수 : 14

호수 2745호 2023. 2. 19 
글쓴이 강은희 헬레나 
오늘 일용할 양식

 

 
강은희 헬레나
부산가톨릭신학원 교수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어릴 적 첫영성체 준비를 하면서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달달 외운 이래 헤아릴 수도 없이 바쳐온 주님의 기도 중 한 구절이다. 당시의 어린 식견으로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시므로 당연히 매 끼니 우리가 먹을 음식을 주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다가 삶이 복잡해지고 생각도 많아지면서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가 주님의 기도라는데,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는 기도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것이 달랑 오늘 먹을 빵이라니? 하느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실례 아닌가? 구약에서 증언하는 하느님은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는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넘치도록 복을 내리시는 분 아니시던가? “오늘” 대신 “평생토록”을, 그리고 “빵” 대신 “우리 모든 것에 무한 축복”을 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구약성경의 잠언을 읽다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구절을 만났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잠언 30,8)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생존의 무게에 짓눌림으로 인하여,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스스로의 힘에 자만자족하여 하느님과 멀어질 수도 있으므로, 그 어느 쪽도 아닌, 오직 하느님과 함께 거닐며 살아갈 수 있도록만 보살펴 주십사 청하는 기도이다. 참으로 거룩한 겸허함이다. 모든 것에서, 심지어 하느님의 축복에서마저도 더 많은 세상의 것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에 스스로 제동을 걸며, 어느 쪽으로든 하느님을 잃는 것이 가장 큰 손실임을 깨달은 이의 간구이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기도를 직접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마음도 바로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오늘날의 문화는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그러나 덜 고민하며 누리는 것이 행복과 성공의 척도인 양 우리를 몰아대고 있다. 그야말로 마음껏 탐욕하라고 면죄부를 주는 것 같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넘쳐나 보이는 풍요의 이면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피폐해져 가는 부작용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오직 그날의 양식만으로 살아가려는 자세야말로 신앙의 진수 아닐까? 매 순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허한 존재로 머무르며, 행여 내가 가진 잉여의 것으로 이웃을 업신여기게 될세라 필요 이상의 축적을 경계하는 것. 그로써 우리가 청하는 오늘 몫의 빵 한 조각은 그대로 신앙 고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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