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6주일
✠ 마태오복음 5,17-37
✠ 마태오복음 5,17-37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ᆢ완성하러 왔다."(17)
이번 주일의 말씀의 주제는 <주님의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율법에 모자라는 그 무엇을 더 보태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나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게 하는 내면의 지향을 보아야 합니다.
법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내부, 마음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하지요. 우리의 참된 삶의 태도는 마음안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에 앞서, 선택에 앞서 우리는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볼 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내지 말아야하며(21-26절), 간음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런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하지 않아야 하고(27-32절), 식전에 손을 씻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하고(마르7,1-23),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해야(마태7,21)하고, 기도란 말을 끝없이 길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신뢰를 두어야(마태6,7)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의 의로움과 달라야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이 다음 따라오는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바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의 형제애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형제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데에 도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솔한 말로, 성급한 판단으로, 거부하는 태도로도 형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생겨난 용어라 할 수 있는 <왕따> 역시 형제를 죽이는 행위, 죽음으로 몰고가는 행위임을 우리는 직, 간접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소외 계층의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장애우들, 요양시설에서 쓸쓸히 잊혀져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이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음으로는 부부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녀 사랑의 정점이 부부애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정점은 완전한 일치에 도달하는 일이니까요.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랑 없이 다만 육욕만 있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며 상대를 이용하고 상대의 자유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부부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살도록 부르심 받은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한 내어줌으로 세상에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관계입니다.
끝으로 형제애와 부부애의 바탕이 되는 정직과 진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말이란 서로를 속이는데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곧 일치에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라는 말이지요. 서로에게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맹세란 무용지물일 다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믿음 위해 세워진 관계라면 우리들 사이에 맹세란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는 어느누구도 소외되는 이가 없고, 의심은 들어설 자리가 없이 진실만이 자리하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함께 꿈꾸어 볼까요?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일은 바로 나부터 이런 사랑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먹어야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