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이달의 훈화
연중 제7주간-사순 제3주간

한재호 루카 신부

한재호 루카 신부는 2002년 제주교구 소속으로 서품 받고 현재 광주가톨릭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연중 제7주간(2월 19-25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루카 1,34)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물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녀로 살기 원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라는 표현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는데’를 뜻합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제게 장차 알코올 중독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시다.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않는데’는 아직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앞으로도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성모님의 물음 안에 평생 동정의 다짐이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요셉과 약혼하였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여인이 아기 탄생의 예고를 듣고 놀랄 필요가 있을까요? 머지않아 혼인하여 잠자리를 갖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애당초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어떻게 아기가 태어날 수 있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는 즈카르야의 경우와 비교할 때에도 드러납니다. 즈카르야 역시 천사로부터 아기가 탄생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물음이 성모님의 물음과는 달리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온 것으로 여기며 그가 벌을 받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반면 성모님의 물음은 즈카르야의 것과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불신의 물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은 이미 평생 동정을 서원하신 분이시며 요셉과 함께 동정 부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분입니다. 민수기 30장에 나온 여성의 금욕서원에 맞추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순 제1주간(2월 26일-3월 4일)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어느 날 누군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인연을 끊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에서 그려내는 성모님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결코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실행한 이가 바로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당시 사회 관습과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목숨을 거는 용감한 순종이었습니다. 또 헤로데가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려고 할 때 이집트로 떠나라는 분부를 받았는데 이때도 아무 말 없이 순명하십니다. 아무런 대책과 계획 없이 외국에서 나그네살이를 한다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또 어떠하였습니까? 포도주가 없다며 잔치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러나 성모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일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시키는 대로 하라.” 예수님에 대한 순종을 거두지 않을 뿐 아니라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셨으니, 성모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혈연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로도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모범이라는 데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순 제2주간(3월 5-11일)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두고,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고 부르시는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여인이시여’는 신약성경의 원어인 그리스말로는 ‘귀나이’(Gynai)라고 하는데, 여인을 매우 정중히 부를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대 문헌을 보면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때에도 이 단어를 썼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두고 ‘귀나이’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성모님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특별한 지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카나에서의 첫 기적(요한 2,1-11)을 먼저 묵상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카나의 기적에서 혼인잔치는 우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가장 먼저 아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니, 그분께서는 포도주가 없는 우리의 사정을 예수님께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물을 통해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우리의 죄가 사랑으로, 미움이 용서로, 부족함이 온전함으로, 이기심이 희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카나의 기적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구원 사건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준 예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와’의 모습을 지니십니다.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를 깨뜨렸던 반면, 성모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시며 예수님께 순종함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 곧 혼인잔치를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여인’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하와’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구원 사건을 예고하는 카나의 기적에서도, 십자가에서 벌어지는 구원 사건에서도 ‘여인’이라 불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순 제3주간(3월 12-18일)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여러분은 자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주려 하십니까? 통장 잔액, 아파트 한 채, 토지 문서…. 이런 물질적인 것보다는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지녔던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나신 뒤에서야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셨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성모님을 맡기신 것은 당신이 지상에서 하신 마지막 일인 셈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머니를 마지막 선물, 곧 유산으로 남기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지난 주 훈화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여인’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새로운 하와’로 여기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인류의 어머니이듯이, 성모님은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가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신 것은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교회의 어머니’ 곧 새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 요한은 새인류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나무에서 나온 열매로 인류를 타락시켰다면, 예수님께서는 골고타 동산에서 십자가 나무에서 나온 생명의 열매로 인류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하와를 통해 타락한 인류를 낳았다면,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새로운 인류인 교회를 탄생시키고 앞으로도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모님은 새로운 하와로서 예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인류인 교회 안에 포도주가 떨어질 때마다 ‘포도주가 없구나.’라며 예수님께 전구하시고, 교회를 향해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며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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