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루카복음 9,23-26
오늘은 한국순교자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순교성인들 103위, 복자들 124위를 모시고 있으며, 이 분들 외에도 일만여명의 순교자를 신앙의 선조로 모시고 있지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경위는 특이했습니다.
어느 선교사의 도움없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 받아들인 일은 교회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지요.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백 여년의 세월동안 사제없이 지낸 기간이 거의 오십년, 그동안 무수한 박해를 견디어내면서도 신앙전파의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경이롭기까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절) 또 목숨을 버리는 길을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지요!
박해자들의 "어리석은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1독서: 지혜서 3,2-3)
"어떠한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2독서: 로마8, 38)라는 오늘 독서의 말씀은 바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신앙의 모범을 기리면서 우리 역시 같은 길을 걸어가겠노라 다짐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땅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잡아가거나 배교를 강요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다시 복음 말씀에로 되돌아가 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데에는 오늘날에도 십자가가 요구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에 이르는 형벌 도구인데 예수님께서 지심으로 하느님 사랑의 상징, 영원한 죽음을 벗어나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응답하시기 위해 질 수밖에 없었던 십자가입니다.
이 죄많은 세상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묵숨을 잃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힘에 겹고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핵심단어는 십자가가 아니라 '따르다'란 동사입니다.
제가 굳이 이 말을 강조하는 까닭은
1. 예수님 없는 십자가(고통)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며,
2.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살도록 우리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오늘 순교자 축일에 우리의 관심은 어쩌면 고통, 십자가에 머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고통을 선택하셔서 그 길을 가신 것이 아니듯이 우리 신앙 선조들도 고통을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니며, 오늘 우리 역시 고통을 바라보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랑을 선택하는 길을 걷기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삶에 의미와 가치를, 힘을, 기쁨을 줍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래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힘을 잃지 않으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의 길에서 만나는 작은 희생, 포기들을 예수님 때문에 바쳐드려볼까요?
순교자 성월동안 우리의 신앙이 사랑으로 훌쩍 자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