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 루카복음 15, 1-32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와 용서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리고 늘상 회개가 강조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실, 말씀을 깊이 읽어 보면 주제는 '하느님의 기쁨'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세 비유가 나오는데 첫 번째 비유의 종결에서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7)
두번째 비유의 종결에서도 역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라고 합니다.
세번째 비유에서는 기쁨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축제, 잔치를 말씀합니다.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그리하여 그들은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23-24)
오늘 비유 말씀은 회개하는 죄인의 태도에 집중하지 않고 그 죄인으로 인해 기뻐하시는 하느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곧, 회개를 강조하고 촉구한다기 보다는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얘기합니다.
아니, 회개하려면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란 도덕적인 질문보다 '하느님은 대체 어떤 분이신가?'란 신학적 질문이 앞서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첫번째의 '양과 목자'의 비유는 구약에서부터 자주 사용되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회개를 말하고 있지만 양이 해야할 부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께서 양을 찾고서 어떻게 하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은전의 비유는 첫번째 비유의 메시지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어 다른 두 비유보다 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만 서로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사랑의 대상임을 얘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번째 비유, 잃었던 아들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이 비유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두 아들, 죄짓는 아들과 올바른 이라고 자처하는 아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말씀합니다.
둘째 아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 주인처럼 여기는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마치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처럼 여기고 아버지를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여 아버지를 떠남이 자유를 얻는 것으로 여기는데에 있습니다.
그 결과 둘째 아들은 무질서한 삶에 젖어들고, 그 다음엔 긂주림이 찾아들고, 그 다음엔 이방인을 주인으로 삼게 되고 급기야는 돼지를 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기서 흔히 쉽게 생각하듯이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아버지(하느님)를 떠난 결과로 생겨난 상황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집이 감옥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는 곳, 자유로운 곳임을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이 그의 말걸음을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합니다만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아들은 아버지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종처럼 일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용서를 구하는 말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통회보다 앞서 있습니다. 아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아버지를 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22)
너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얘기가 남아있네요. 맏아들 역시 들째와 별다름 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 성실히 사는 것을 마치 짐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혹여나 이것이 많은 의로운(?) 신자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맏아들과 둘째 아들, 둘 다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겪는 비극의 출발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는 불행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 이야기는 맏아들이 끝으로 마음을 바꾸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의인이 회개하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은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