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해명 요청

by 최규철아만도 posted Jul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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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저는 김해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는 최규철 아만도라고 합니다.

제 집사람이 건강이 안 좋아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면 오히려 건강에 더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접종을 하지 않았고, 코로나 치료제가 보급될 때까지 미사참례를 현재 보류 중에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718일 대우조선해양 시위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미사강론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교회법에는 미사강론은 <전례시기에 맞게 신자들의 생활규범에 대해 성경구절로 해설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 미사강론은 신자들의 생활규범에 대해 성경구절로 해설되지 않는 강론, 정치적이든 사회적 문제이든 어떤 주제로도 강론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교회법입니다.

아래의 강론을 미사강론으로 하셨다면 교회법 787, 사목지침을 위반하신 것이며, 미사강론이 아니고 미사시간 이외의 시간에 강론하셨다면 교회법 제2872, 사목지침을 위반한 것이며, 미사강론 마지막의 </역으로 지/지랄을 해줘야 사/사람이 안 된 것들은 지/지들이 뭔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다>의 말씀은 평화와 화합을 조성해야 한다는 교회법 제2871항을 위반하신 것입니다.

교회법에 그렇게 명시한 이유는, 교회가 분열될 우려가 있고, 사제의 정치참여로 인해 득보다는 실이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과 사목지침을 위반하면서까지 정치, 사회참여를 고집하는 이유를 아니 물을 수 없습니다.

[
교회법]

767 강론은 설교의 여러 형식 중에서 탁월한 것으로 전례의 한 부분이며 사제나 부제에게 유보된다. 전례 주기를 따라 강론 중에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규범이 성경 구절로 해설되어야 한다.

287 성직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보전되어야 할 정의에 근거한 평화와 화합을 항상 최선을 다하여 조성하여야 한다.

그들은 정당이나 노동조합 지도층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지 말아야 한다. 다만 교회의 관할권자의 판단에 따라 교회의 권리 수호나 공동선 증진을 위하여 요구되면 그러하지 아니하다.

교황청 성직자성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33, 정치와 사회적인 의무)

사제는 보편교회의 종으로서, 한 역사적 우연성에 자기 자신을 얽어맬 수 없으며 따라서 온갖 정치적 분파를 초월해야 한다. 만일 교회 장상의 판단에 따라 교회의 권리와 공동선의 보호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정당이나 노동조합 안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을 수 없다. 사실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들은 교회적 친교 안에서 분열의 심각한 위험이 될 수도 있으므로 성직자 신분에 맞지 않다.

(중략)

"
정치 활동과 사회 조직체들에 직접 개입하는 일을 교회는 사목자들의 어깨에 떠넘길 수 없다"는 것을 사제는 명심해야 한다. "사실 이 과제는 평신도 성소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서 평신도들은 이 성소 안에서 자기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수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제는 "평신도들의 올바른 양심을 형성시키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된다.

사제의 사명을 순전히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성격의 현세적 과업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그의 직무에 맞지 않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교회의 복음적 결과에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히려 중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 된다.

출처:

http://news.catholic.or.kr/WZ_NP/section/view.asp?tbcode=SEC01&cseq=2&seq=112468

따라서 본인이 지적한 교회법, 사목지침 위반에 대해 신부님의 입장을 표명해 주십시오. 신부님의 입장 내용을 검토 후, 교회법, 사목지침 준수가 어렵다고 판단할 경우 부산교구법원에 정식으로 고발조치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차후, 아래의 강론내용을 면밀히 분석하여, 하나하나 반박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첨부]

2022718일 거제도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 균 태 안드레아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직장에는 소속된 곳이 어디냐에 따라 귀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은 작업장에서 일을 해도 멀리서 보면 입고 있는 작업복도 똑같아 보이는데도 현장의 노동자들은 구별된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로, 또 출신에 따라 구별되기도 한다. 본사 출신이냐 원청 출신이냐, 하청 출신이냐. 구별만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구별은 거의 언제나 차별이라는 혹 하나를 달고 존재한다.

함께 살아가자는 뜻의 상생(相生)은 사전에나 나오는 단어요, 추구해야 할 머나먼 목표로 여겨지거나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들이 듣기 좋은 소리일 뿐, 그 힘들을 미미하게 소유하거나 거의 전무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더 손해 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미포조선, 한진조선, 대우조선, 모두 노동집약산업으로 굴지의 회사가 되었다. 이 회사들의 공장들에는 언제나 본사 직원들과 원청 노동자 그리고 하청 노동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곳들에 존재하는 노사갈등은 거의 언제나 노노갈등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그 가면은 갈등보다는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며 쓰잘데기 하나 없는 데에 신경을 쓰기 싫어하고, 그런 갈등은 하등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좀먹는 것으로 여기는 사측이 자신들의 손이 더럽혀질까 저어하여 만들어낸 것들이다.

지주 아래에 존재하면서 지주와 소작농민 사이에 소통의 물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마름이다. 소작농들로부터 얻는 존경과 신뢰보다는 지주로부터 받게 되는 물질적인 이득이 더 커 보이기에 대부분의 마름은 지주 편이다. 노동자와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차별대우하며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면 사측은 값싼 노동력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고, 오너 일가는 그만큼 더 큰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다. 노동자와 노동자가 한바탕 개싸움을 벌이도록 공작질을 해대는 것이 우리시대의 마름들의 주된 역할이다.

데자뷰’(Déjà-vu)는 프랑스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기시감이라고 했다.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데자뷰라 한단다. 현대 자동차, 현대 중공업, 미포조선, 한진중공업, 대우조선, 공장 부지들은 다들 다른 곳들에 있는데, 거기서 벌어졌던 혹은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모습은 참으로 닮았다. 겉만 비슷한 게 아니라 그 속도 참 비슷하다.

우리시대의 마름들은 주로 본사 직원들 중심의 노조, 원청 노조들 그리고 언론이다. 이들 중에 가장 악독한 마름이 언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유명한 말씀, 진리로 자리 매겨도 손색이 없을 말씀 곧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이 말씀 앞에 언론은 중립을 지킨답시고 갈등 중에 있는 사람들의 양자 간 입장을 전달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그 갈등의 원인과 그 갈등의 본질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악에 맞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악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악에 맞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악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도 일하셨다»면서 노동의 신성한 가치에 대해서 말을 하고, 노동의 목적은 인간이며, 노동은 생산의 원인이지만 자본은 생산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노동하는 인간12)고 가르친다. 더불어 노동에서 인간이 그 독특한 존엄성을 얻는다(노동하는 인간1)고 천명한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참으로 열악한 이 나라 이 땅의 노동의 현실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약하디 약하다.

성당이나 예배당 문 밖만 나가면 싫어도 마주쳐야만 하는 «환장»할 현실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달콤한 말, 위로의 말이라도 신부나 목사의 입에서 나오면 살아갈 희망이라도 생기고, 살아갈 기쁨이라도 생길 텐데 자꾸만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본인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현실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분노한다. 게다가 분노의 화살마저도 그 과녁을 바꾸어 버리는 언론 마름들 일명 뻐꾸기들의 수완이 놀라움을 넘어서 무섭기까지 하다.

예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 한다»고 하셨다. 고향과 집안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장 편안해진다. 가장 편안해지기 때문에 « 그래도 고향 사람들과 집안사람들은 내 편이겠지»하는 마음에 가장 편하게 마음속을 드러낸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나 보다. 당신의 마음속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과 집안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방금 우리가 들었던 복음은 정확하게 그들의 심기를 전한다.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 못마땅하게 여겨야 할 대상에게는 그러지 못하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작태는 2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다. 분노한다는 것,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한다는 것, 그것은 저항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저항이 부활의 또 다른 말이다. 불의한 것, 거짓된 것, 피를 말리게 하고, 포기를 강요하게 하는 것, 그런 것에 저항하는데서 부터 참 삶이 시작된다. 부활의 삶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저항이 바로 진정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모습이요, 그래도 인간을 사랑하려는 힘없는 자들의 본마음이다. 사행시로 역지사지의 본뜻을 전하는 것으로 강론을 마치고자 한다. 한 자 한 자 운을 떼 주시기 바란다.

/역으로 지/지랄을 해줘야 사/사람이 안 된 것들은 지/지들이 뭔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