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2022.07.01 05:44

2022년 7월 생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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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생활말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이제 얼마 후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소명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그분께서는 잠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셔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머무르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대목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이 두 자매가 예수님을 어떻게 (자신들의 집에) 특별히 모셔 들여 대접해 드리고 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르타는 손님을 맞아 전통적으로 안주인이 하는 역할을 하느라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습니다.”1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39절 참조)
 마리아가 주의 깊게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은 마르타가 (분주하게 일하며) 걱정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르타는 동생이 언니인 자신만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것을 두고 불평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이 이야기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주님의 기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을 향한 애덕의 측면에서 아마도 가장 숭고한 내용이 담긴 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대목으로서, 틀림없이 하느님-아버지와의 관계의 측면에서 가장 숭고한 내용이 담긴 장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장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형제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 사이에서 거의 저울추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복음에서 이 대목의 주인공은 두 명의 여성입니다. 예수님과 마르타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보면, 마르타가 스승이신 예수님께 불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분과 친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봉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그분을 시중드는 일로) 염려하지 않기를, 또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맡겨져 있던 역할에서 벗어나, 동생 마리아처럼 마르타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동생 마리아는 ‘제자의 역할’인, (당시 여성으로서는) 새로운 몫을 택했습니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종종 그 의미가 축소되곤 했습니다. 
곧 활동적 삶과 관상적觀想的 삶, 이 두 방식 간의 대조 혹은 거의 양자택일적 접근 방식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달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도 마리아도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고,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는 기도와 말씀에 대한 경청이 애덕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형태의 사랑을 연결하되, 단단히 결합하여 더 이상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 사랑,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41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라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시는 것을 꾸중하시는 것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부르심-성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부르셔서, 마르타가 앞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초대하시는 듯합니다. 
즉,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그분과의 심오한 관계 속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엮어 가라고 부르십니다. 이와 관련해 끼아라 루빅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회를 통해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자 하십니다. (…)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기록한 루카 복음사가에게는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말씀을 생활화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 우리도 바로 이렇게 해야 합니다. 
곧, 말씀을 맞아들이는 것,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온전한 변화를 일으키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치 땅이 씨앗을 품어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듯이, 우리도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자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새 생활의 결실이 맺어지도록, 말씀의 효과가 생겨나도록 해야 합니다.”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에게도 마르타와 마리아처럼 스승이신 예수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 들여, 그분 발치에서 진정한 제자로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요! 
하지만 괴로운 일과 질병, 여러 업무, 기쁜 일이나 만족스러운 일 등등, 마치 소용돌이처럼 우리를 휩싸는 것들 속에 파묻혀 우리는 종종 소진되곤 합니다. 
이러다 보면, 우리가 주님을 알아뵙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는 시간마저 갖지 못하고 맙니다.    
이 말씀은 더 좋은 몫을 택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할 소중한 계기가 됩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내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내적 자유로 인해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그 자유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행동할 때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며, 이러한 관계야말로 봉사와 경청에 참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레티치아 마그리|  포콜라레운동 총본부 「생활말씀」 편집위원
1   루카 복음 10장 40절. ‘분주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perispàomai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즉, ‘완전히 바쁜 상태이다/매우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다(업무량이 너무 많다)’ 혹은 ‘정신을 빼앗긴 상태이다/얼이 빠진 상태이다’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2   끼아라 루빅, 1980년 7월 생활말씀, in eadem, 『생활말씀Parole di Vita』, 파비오 차르디 엮음. (끼아라 루빅의 저작들 제5권, 치타누오바 출판사, 로마 2017년), 176-17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