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움트는 것

가톨릭부산 2022.04.27 12:01 조회 수 : 13

호수 2703호 2022. 5. 1 
글쓴이 강은희 헬레나 
폐허에서 움트는 것

 
 
강은희 헬레나 / 부산가톨릭신학원 교수


 
   구약성경 강의를 하자면 전쟁 이야기를 피할 수 없다. 아브라함부터 모세와 판관들을 거쳐 이후로도 구약의 역사서와 예언서를 빼곡히 채우는 전쟁의 묘사는 참혹하기에, 우리 현실에서 수천 년 떨어져 있는 시공간의 사건들이라 해도 그 신학적 의미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해석하든 편치 않은 부분이다. 불행히도 시대와 장소만 바뀔 뿐, 이 지구상 어디선가는 항상 전쟁이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은 잔악함이 일상이 되었음을 보며, 인간성에 대한 극도의 회의마저 든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의 저 대척점에서는 또 다른 극단이 드러나며 숭고한 인간성을 증언해 준다.
 
   온 세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서, 한 편으로는 전쟁의 손익계산이 바삐 돌아가고 있을 때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런 계산은 아예 할 줄 모르는 이들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여행이 불가능해진 우크라이나의 숙박 업체들에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뭉텅뭉텅 예약하고 송금하고 나타나지 않는 ‘노쇼’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보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었기에.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하늘거리는 무대복 대신 무거운 군장을 하고서 참전한 우크라이나 발레리노의 사연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무대 위의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그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이라는 땅바닥에서 생명 수호의 가장 숭고한 몸짓을 남기고 떠나갔다. 
 
   포화가 난무하는 전투 현장에서 아이에게 방탄조끼를 양보하고 전사한 우크라이나 군인에 대한 보도도 있었다.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전쟁은 한 편에서는 고결하고 거룩하기까지 한 인간성의 증언과,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모든 것을 부인이라도 하는 듯한 잔혹함이 서로 뒤엉키고 있는 극한의 현실이요 극단의 체험이다. 그러나 그 극단이 어느 한 편만의 극단이 아니기에, 저 캄캄한 나락의 극단 그 깊이만큼이나 숭고히 고양된 또 다른 극단의 증언이 이어지기에,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까지 있어 온,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는 않을 전쟁으로부터의 파편들을 거두어내며 다시 일어서고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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