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 요한복음 20,1-9
드디어 부활절입니다. 봄과 함께 맞이하는 부활절이라 더욱 희망과 생명을 말해 줍니다. 세상의 어둠과 싸우고 계시는 모든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희망과 생명이 싹트는 그런 부활절이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빨리 종식되길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해제 되자마자 무덤을 찾아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요한 외에는 다 도망가고 없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 끝까지 예수님을 지켜 보았던 그녀입니다.
그녀에게는 두려움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었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18) 이 사랑은 죽음의 문턱까지 그녀를 내몰았던 죄의 무게를 뼈져리게 느낄 때 예수님의 조건 없는 용서, 사랑을 대면하고서 새롭게 태어나면서부터 품게된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예수부활의 첫증인이 됩니다.(요한 20,11-18; 마태 28,9-10; 마르 16,9-17참조)
이어 베드로와 요한으로 추정되는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빈무덤만 보았는데 다른제자는 보고 믿었다고 복음은 들려줍니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 곧 시신이 없다는 사실이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믿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부활하리라고 하셨던 예수님 말씀에 대한 기억때문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알려주는 하늘나라에 관한 표징들, 희망, 생명의 메시지들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있다면 그분을 알아볼 것입니다. 빈무덤만 보고서도 주님의 부활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렇게 표징을 읽어내는 우리들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매일의 우리 일상에 희망을 생명을 주는 개적인 체험 사건일 것입니다.
만일 오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부활절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끝으로 차동엽 신부님의 강론 글 중 몇 줄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인공입니다. 우리 역시 이 은총 가득한 부활의 대열에 끼어 있습니다. 살아서는 거듭거듭 부활하여, 마침내 죽어서는 영원히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우리 삶의 절망이라는 무덤 주변을 맴돌지 않을 일입니다. 실패의 무덤, 좌절의 무덤, 패배의 무덤, 체념의 무덤.... 그 많은 무덤이 이제 주님의 부활로 인해 빈무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묻었던 모든 죽음이 다시 희망으로, 다시 꿈으로, 다시 승리로 부활했음을 굳게 믿습니다. 알렐루야!>

